일본영화《절식》(2005) 의 줄거리는 아래와 같다.
아름답고 날씬한 여고생 토모코. 짝사랑했던 동급생 아키라에게 고백했다가 퇴짜를 맞는다. 왜 자기와 같은 예쁜 여학생을 마다하는지 이유를 몰라 혼란스럽다. 집으로 돌아온 토모코...울다가 얼핏 거울을 보는데 거울 속에 비친 못생기고 뚱뚱한 한 여자애를 보고 깜짝 놀란다. 갑자기 구토.. 화장실에 들어가 토하고 다시 거울을 보니 본래의 토모코의 얼굴로 돌아왔다. 체중도 돌아오고..이후 이런 이상한 현상은 계속된다. 등굣길에 윈도우에 얼핏 비친 자신의 모습..다시 그 뚱보 여자애가 비친다. 다시 구토가 일어나고 토한 다음 다시 본래의 얼굴로 돌아온다. 퇴교길에 친구애와 들린 빵집..그 애가 아키라를 좋아한다고 하자 토모코 화를 내는데 그 때 갑자기 자기 모습이 그 뚱보 여자애로 변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란다. 집으로 급히 돌아온 토모코 본래의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 구토를 시작하는데 이번에는 좀처럼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가지지 않는다. 저울은 90kg을 가리키고 있고...다시 등굣길에 구토를 시작하지만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온 토모코 자신의 자신의 얼굴을 문질러보고 비틀어 보아도 그 얼굴을 사라지지 않는다. 왜 갑자기 살이 쪘을까 속상해 울고 있는데 이 때 토모코의 엄마가 방으로 들어온다.
"여긴 너 방이 아니야" 엄마가 말한다. 그럼 누구 방이냐고 묻자 "여긴 너 동생 카즈미의 방이고 카즈미는 몇년 전에 죽었지 않았냐" "현실을 봐. 너는 항상 과체중이었어" 엄마는 토모코에게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다그친다.
그녀의 구원은 자신이 카즈미가 아님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하나. 엄마는 바로 그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럴수록 자신을 카즈미로 위장하면서 더 깊은 자기만의 방 속으로 숨어든다. 이것은 가공 속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피오나가 되고 토모코가 되어 버린 한 여성...그녀는 오늘날 히키코모리 "은둔형 외톨이"라고 불린다. (KBS 추적 60분 <은둔형 외톨이 보고- 나는 방 밖으로 나가고 싶다>)
3년 째 방밖으로 나오고 있지 않다는 20대 여성. 세상을 거부하려는 듯 커텐이 쳐져 있고 이불을 뒤짚어 쓰고 있다. 어머니가 이불을 걷으면 비명을 지른다. 방안의 거울은 뒤집은 채 구석으로 치워져 있다. 그녀를 방밖으로 끌어내려는 가족, 친척, 상담사, 심지어 취재진까지 동원된 2주간의 노력은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왜 그녀는 히키코모리가 되었을까? 어머니의 말. “가게 다니다가 좀 뚱뚱해졌어요...운동 열심히 해야겠다고..자기 속으로 운동 열심히 해야되겠네..그러더니 어느 날 왔다 갔다 하더니 기운이 하나도 없이 저렇게 된 거예요.” 결국 다이어트의 실패가 그녀를 히키코모리로 만든 것이다.
오늘날 다이어트 산업은 최고의 호황산업이다. 이것을 호황산업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두 가지 은밀한 작업이 필요하다. 첫째는 뚱뚱하다는 것 자체를 부끄럽게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먹고 싶은 대로 먹으니까 자제력도 없고 또 운동도 하지 않으니까 게으르다. 어딘가 미련해 보인다. “가꾸지 않고, 돌보지 않은 몸이라는 것은 전형적인 하층계급의 표시다. 운동을 통해서 단련된 건강한 몸, 캘리포니아식 스포츠를 통해 그을린 피부, 이것이 상류층의 표시다.”(EBS, <웰빙 권하는 사회>에서 한 인터뷰)
여기서 한 걸음 더. 그 정도면 인간적으로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뚱뚱하면 뭔가 탐욕스럽고 음험하고 마음씨도 나쁠 것 같다. 그런 사람을 고용해도 될까? 그런 사람과 결혼해도 될까? 이제 뚱뚱하다는 것은 정상인과 차이를 나타내는 지표가 아니라 차별의 지표가 된다. 전방위로 퍼붓는 광고와 드라마 등을 통해서 이것을 사람들의 의식 속에 내면화시킨다. 이제 아무도 뚱보가 되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아무도 자신을 뚱보라 생각하지 않으면 이 은밀한 공작은 효과가 없다. 다음은 뚱보의 외연을 넓히는 것이다. 그 역할을 하는 것이 모델이나 스타들이다. 그들은 대부분 정상에서 상당히 벗어난 체형을 갖고 있다. 키는 크고 몸무게는 그 키를 가진 보통 사람의 2/3 밖에 되지 않는다. 이효리나 전지현과 같은 이른바 몸짱들을 끊임없이 보여줌으로써 그것을 표준체형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이제 소수의 사람들을 빼고는 대부분 뚱보의 범주에 들어가게 된다.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몸에 대해서 불만감을 갖고 부끄럽게 생각하게 할 수 있다면 이 마케팅 전략은 성공한 것이다. 자신의 몸에 혐오감을 갖도록 만들어라! 이 혐오 마케팅이 다이어트 마케팅의 핵심전략이다.
논의에서 많이 벗어나 버렸지만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그녀는 왜 히키코모리가 되었는가? 옛날 같으면 예쁘장한 얼굴에 약간 토실토실한 사지...어쩌면 자신의 몸을 자랑스러워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혐오 마케팅으로 그녀는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심지어는 죄스럽게 생각한다. 몸에 대한 죄의식...그것은 마케팅에 의해서 심어진 것이지만 이미 자신 속에 내면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녀 자신의 생각이나 다를 바 없다. 거울 속에 비친 혐오스러운 몸뚱이...그것을 바로 잡으려는 다이어트는 실패로 돌아가고 차라리 거울을 치워버리고 싶어한다. 그 거울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타인의 시선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스스로를 방에 가두는 히키코모리가 된 것이다.
《절식》의 토모코도 《슈렉》의 피오나도 모두 히키코모리다. 단지 "방 밖으로 나온 히키코모리" -형용의 모순이자만- 다. 밖으로 나온 히키코모리는 가면을 쓴다. 토모코는 카즈미가 되고 피오나는 또 다른 피오나로 변신한다.
이 히키코모리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 《슈렉》에서는 대망의 왕자님의 출현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어떤 왕자도 피오나를 방 밖으로 꺼집어내는데 실패했다. 그것에 성공한 유일한 남자는 괴물 슈렉. 슈렉은 전혀 멋지지 않다. 그러나 그는 그렇다고 성형수술도 하지 않고 다이어트도 하지 않는다. 그는 세상이 갖다 대는 그 잣대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상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피오나가 토모코라 해도 개의치 않는다. 그는 세상이 덮어 씌우는 그 혐오 마케팅에서 자유롭다. 피오나는 자신의 몸과 외모가 전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슈렉으로부터 배운다. 슈렉은 오히려 그녀를 매력적이라고 생각하고 그 슈렉의 눈을 통해서 이제 자신의 몸을 자랑스러워하게 된다.
토모코의 피오나
카즈미의 피오나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드디어 마법에서 풀려난다. 그녀를 가둔 그 마법의 주술은 혐오마케팅이고 이 마케팅이 만들어 놓은 가짜의 자기인 카즈미의 피오나를 이제 걷어찰 준비가 되었다. 그녀가 그 카즈미의 껍질을 벗어던졌을 때 마법이 풀리고 토모코의 피오나로 돌아간다. 그녀는 이제 진정 히키코모리에서 탈출한 것이다.
《슈렉》은 자본의 혐오마케팅의 주술에 걸려 주눅이 잔뜩 들어있는 현대인 -특히 현대 여성들- 에게 그 마케팅에 속지 말라고 외치는 드림윅스 버젼의 통쾌한 "소비자 고발"로 읽어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