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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기장

두 종류의 악 : 사이코패시와 아우슈비츠

 

 

1. 예로부터 연쇄 살인범들은 있었다. 영화화되어 유명해진 것으로 런던의 살인마 잭더리퍼(Jack the Ripper,1888)나 미국의 테드 번디(Ted Bundy, 1974)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최근의 것만 해도 유영철(2003), 정남규(2004), 강호순(2006) 사건 등이 있다.1) 이  "연쇄살인범"(serial killer)들이 일반 살인범과는 그 범죄의 성격이 다른데 로버트 헤어(Robert D. Hare)는 이러한 류의 범죄를 "사이코패시"(psychopathy)라 부르고 그 연쇄살인범을 "사이코패스"라고 불렀다. (물론 모든 연쇄살인범이 사이코패스는 아니고 모든 사이코패스가 연쇄살인범은 아니지만 개괄적으로 이 둘의 외연은 일치한다)

 

이 사이코패스형 살인범은 일반 살인범과 어떻게 다른가? 그 전형적인 사례가 강호순이다. 그에게서 7명의 부녀자를 살해하고 암매장한 연쇄살인마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이웃사람들은 입을 모아 "친절하고 성실한 사람"이라고 증언했다. 그는 매력적이라 할 만큼 준수한 외모와 선량한 미소로 여자들을 차례차례 차로 유인해 목을 졸라 죽였다. 시체는 자기 집 근처 벌판과 야산 이곳저곳에 파묻었다. 살인극이 끝나면 그는 다시 싹싹한 30대 동네 청년으로 돌아가 태연하게 트럭을 몰고, 가축을 기르고, 스포츠마사지사 일을 했다. 그에게서는 살인행위에서 오는 가책과 같은 감정의 동요가 없었다. 이것이 그를 일반 살인범과 구분지우는 점이다. 이들에게는 "감정"이 없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남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empathy, 즉 타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어있다. 정상적인 사람의 경우 타인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으로 즉각 전이된다. 사이코패스의 경우 어떤 이유로 해서 이것이 차단되어 있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무감각하게 된다. 단적으로 말해서 타인이 나와 같은 사람이 아닌 이 의자와 같은 하나의 사물로 간주된다. 우리가 이 의자를 부수듯이 그는 사람을 죽인다.

 

얼핏 사이코패스도 감정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일반인 보다 더 격렬한 감정 -대개 증오감이지만- 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흉내에 지나지 않으며 주의깊게 학습된 것이다. 그의 내면에는 차가운 계산이 있을 뿐이다. 사이코패스 연구자 헤어 교수에 의하면 사이코패스는 비유하자면 색맹과 같다는 것이다. 색맹인 사람이 빨간색 신호등을 보고 차를 세운다면 그가 빨간색을 지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맨 위의 신호등에 불이 켜지면 그것이 멈춤 신호라는 것을 알 뿐이다. 색맹인 사람이 "빨간 신호등이 꺼졌어"라고 말하더라도 그는 실제로 "맨 위의 등이 꺼졌어"라는 의미로 말한 것이다. 사이코패스도 이와 비슷한데 이들이 감정을 경험하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이 사용하는 단어들을 배워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감정을 설명하거나 모방한다.  그는 감정적 표현의 단어를 사용해서 감정을 표현할 수 있지만 감정 그 자체는 그의 마음 속에 떠오르지 않는다.

 

최근의 실험들은 이런 임상적 결과들을 뒷받침한다. 일반인들은 중립적 단어보다 감성적 단어에 더 빠르게 반응한다. 예를 들면 '종이' 보다는 '죽음'이라는 단어에 더 강하게 반응한다. 뇌파사진을 찍어보면 '종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보다 '죽음'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뇌파가 높게 나타난다. 하지만 사이코패스의 경우는 달랐다. 이들의 정서적 단어에 대한 반응은 중립적 단어일 때와 동일했다.2)

 

이에 대한 원인으로 사회학적, 그리고 복합적 가설이 있지만 생물학적으로 사이코패스는 선천적인 뇌의 장애로 인한 것이다. 미국 위스콘신 의과대학교 코닉스 교수가 위스콘신 주 교도소에 수감된 사이코패스들의 뇌를 정밀 조사한 결과, 사이코패스들의 뇌는 공감능력과 의사결정에 미치는 뇌의 전두엽과 뇌의 다른 부분들을 연결해주는 고리가 약한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감정과 기억, 정서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측두엽 내부의 뇌 구조물인 편도체가, 기억력과 사고력 등의 고등행동을 관장하는 전두엽과 활발하게 상호작용하지 않을 때 사이코패스의 성향을 드러내는 것으로 밝혀졌다.



2. 여기서 필자의 관심은 이 선천적 사이코패스에 있지 않다. 여기서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후천적으로 만들어지는, 말하자면 '의사擬似-사이코패시'(pseudo-psychopathy)다. 이것은 사회적 필요 또는 사회적 조작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으로 사이코패시와의 차잇점이 있다면 공감능력의 전반적 결여가 아니고 특정 현상 또는 부분에 대해 일어나는 결여 현상이다. 다시말해서 사이코패스가 아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전적으로 정상인데 특정 부분에 대해서만 사이코패시적 성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의 그 유명한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의 근원이라고 생각한다.

 

사이코패시는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의 결핍으로 해서 타인을 사람으로 취급하기보다 한갖 物로서 취급하게 된다. 그렇다면 타인을 한갓 물로 보도록 유도하고 교육함으로써 어떤 누군가를 의사-사이코패스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의사-사이코패시는 경우에 따라서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일정한 자질이기 때문에 교육을 통해서 조장되기도 한다. 의사의 훈련을 생각해 보자. 본과로 진입하면 처음 접하게 되는 인체 해부학 실습의 중요한 목적은 몸의 구조와 장기의 기능들을 배우는데 있다기보다도 더 근본적으로 몸을 '대상화'시키기 위한 훈련이다. 타인의 몸에서 자신의 몸으로 전이되는 그 감정이입을 차단시키고 타인의 몸을 한갖된 物로서 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사람의 몸에 메스를 갖다 된다는 것은 그 자체 메스껍고 혐오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 피가 튀고 살이 뭉개지는 그 고통이 고스란히 자신에게로 이전될 터이니 말이다. 일반인으로서는 그 느낌이 당연한 것이겠지만 직업으로서의 의사가 그래서는 안 될 것이다. 인간의 몸에 대한 냉정한 제 3자적 입장이 필요할 것이고 또 그래야만 할 것이다. 말하자면 사이코패시적 자질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것이 지나쳐서 인체가 진짜 물로 다루어질 수도 있다. 아래 기사는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국내 한 대학의 보건계열 학생들이 해부학 실습용 시신(카데바)을 가지고 장난을 치며 부적절한 처신을 하는 사진들이 인터넷 상에 확산돼 물의를 빚고 있다. 20일 오후 인터넷 주요 포털사이트에 '폐 적출 ㅎㅎ', '뇌 잘라내고 ㅎㅎ' 등으로 올려진 문제의 사진들은 국내의 한 보건계열 학과에 재학 중인 대학생이 지난해 7월 중국 모 대학에서 해부학 실습을 받는 학생들의 사진으로 자신의 미니홈피에 올린 것이다.

 사진 속 학생들은 해부학 실습용 시신에서 장기와 뇌 등을 적출한 뒤 이를 꺼내 들고 웃으며 장난치는 모습을 하고 있다. 시신에서 뇌를 적출한 후 자신의 머리 위에 올려놓고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는 가하면 손으로 'V'자를 그리며 웃는 학생들도 보인다.

 사진을 미니홈피에 올린 학생은 '갈비뼈를 자르는데 ㅎㅎ. 아주 쾌감이 들던데. 폐 생각보다 정말 크다 ㅎㅎ'라는 글도 사진 밑에 함께 올려 놓았다.  이밖에 '뇌 잘라내고 즐거운 ○○언니 ㅎㅎㅎ', '밥맛 떨어진다' 등의 글이 사진과 함께 올라와 있다." (2010-01-20,연합뉴스)

 

이것은 군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적을 자신과 다름없는 인간으로 보는 이상 전쟁터에서 상대의 목숨을 끊는 일은 피하고 싶은 혐오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렇게 해서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 적에 대한 감수성의 차단이 필요하고 이것을 위해 적을 사람으로 보지 않도록 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군대의 훈련을 통해 적은 상징 조작되어 사람이 아닌 ‘괴물’ 또는 ‘악마’로 가공된다. 더 나아가 자신이 군인이기 이전에 사람이라는 진실 자체가 공인된 살인 앞에 편안할 수 없다. 훈련을 통해서 자신마저도 제거되며 다만 명령을 수행하는 살인기계로 가공된다. 말하자면 사이코패시적 자질이 요구되며 이것이 ‘정훈교육’(troop information)의 진정한 목적이다.3) 이것은 항상 지나칠 수 있으며 전장의 비극을 낳는다. 최근에 일어난 사건...


아프가니스탄에 파견됐던 미군이 아프간 반군의 훼손된 시신 일부를 들고 기념촬영을 했던 사진이 공개돼 파문이 일고 있다. 특히 이번 사진은 지난 1월 미군의 아프간 반군 시신방뇨 사건과 2월 코란소각 사건, 그리고 지난달 미군 하사의 아프간 민간인 총기난사 사건 등으로 미국과 아프간 정부간의 긴장이 높아진 시점에 공개돼 양국 관계를 더욱 악화시킬 전망이다.


문제가 된 사진은 18일(한국시각) 로스앤젤리스 타임즈(LAT)가 공개한 것으로 아프간 잠볼지역에서 촬영됐다. 이날 공개된 사진에는 미 82공수여단 소속 미군 병사들이 자살폭탄 테러로 훼손된 아프간 반군의 하반신 사진을 들고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다른 사진에는 미군 병사가 사망한 아프간 반군의 손을 '손가락 욕설'모양으로 만든 채 웃는 모습을 하고 있다.  (2012-04-19,CBS )


 



3. 나치스에 의한 유대인 대량학살 이른바 ‘아우슈비츠’가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그것을 설계하고 실행한 아이히만(Adolf Eichmann)은 악의 화신 그 자체였을까? ‘악’은 ‘악마성’이라는 특별한 사람들에게 부여된 성질일까?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 재판을 보면서 이 생각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면서 다음의 두 가지 특징을 찾아냈다. 그것은 첫째, 아이히만이 악의적인 동기나 의도를 가지고 악을 행한 악마적인 인간이 아니라는 점이며 둘째, 그는 선악을 구분할 수 있는 인지 능력과 자신의 일을 처리할 수 있는 합리적인 인간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화이트칼라이며 상식적인 인간이다. 그는 너무나 평범하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의도적으로 살인을 행하거나 어떤 악마적 동기를 가지고 유태인을 학살한 것이 아니고 주장했다. 그는 자기가 더러운 악당이 아니며 범죄자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이 명령받지 않은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오직 명령에 따라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평범한,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는 당시 주어진 체제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류의 최대 죄악인 ‘홀로코스트’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 ‘악’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아렌트는 그것이 ‘무사유’, ‘사유 없음’이라고 단정한다.4) 그것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그 어떤 반성적 성찰도 수행하지 않는, 그냥 주어진 현실과 조건들을 승인하고 그 안에서 충실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의 그 '평범성'(banality)에 있었다.

 

요컨대 악의 평범성은 그 무사유 속에 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악의 평범성이란 ‘무사유’에서 온다는 것 즉 악은 단지 남의 고통과 삶을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저질러지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사이코패스에게서 보아왔던 타자에 대한 감수성의 결여 그것인데 그것이 평범하다는 점에서 사이코패시적 이라기보다 의사-사이코패시적 형태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의사-사이코패시는 태어나는 악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악이다. 이것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의사는 어떻게 훈련되며, 군인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타자에 대한 감수성의 의도적 차단이며 결과적으로 남의 고통과 삶을 이해할 수 없는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결과한다.

 

아이히만은 나치스 독일이 길러 놓은 의사-사이코패스다. 그가 전형적 사이코패스와 다른 점은 무엇인가? 전형적 사이코패스는 타자일반에 대한 감수성이 결여되어 있지만 아이히만의 경우는 특정한 타자에 대한 감수성만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 특정한 타자가 바로 유대인이다. 다른 타자에 대해서는 감수성이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으므로 그는 자기가 키우던 강아지의 죽음에 대해 슬픔에 잠긴다. 그러나 그가 오늘 한줌의 재로 사라지게 한 유대인들에 대해서는 어떤 일말의 감정도 없다. 쓰레기를 처리하듯이 정해진 매뉴얼에 따라 사무적으로 일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우슈비츠의 문을 나서는 순간 그는 일상사의 조그만한 일에 울고 웃는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그러나 그 평범성이 아우슈비츠로 들어서는 순간 ‘절대악’으로 변질된다. 이것이 소름끼치는 ‘악의 평범성’이다.

 

이 평범한 악 또는 의사-사이코패시는 상대를 물화함으로써 상대에 대한 자신의 감수성을 차단하는 훈련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이것은 정치적 의도를 가진 대중조작을 통해서 만들어질 수 있다. 이 교육과정을 통해서 감수성 풍부한 청년들을 살인을 서슴치 않는 살인기계로 바꿀 수 있다. 더 이상 그들이 다루는 대상은 사람이 아니며 무의미한 사물이든가, 제거되어야 마땅한 괴물이기 때문이다.


타자를 비인간화하며 타자를 무가치하고 강력한 힘을 지닌 악마와 같은 추상적인 괴물로 그리고 그들이 우리의 소중한 가치와 신념에 근본적으로 위협이 된다는 생각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시작된다. 대중의 공포가 점점 수위를 높여가고 적의 위협이 임박해지면 합리적인 사람들이 비합리적으로 행동하고 독립적인 사람들이 분별없는 군중에 휩쓸리며 평화로운 사람들이 전사로 돌변하게 된다. 포스터나 텔레비전, 잡지표지, 영화, 인터넷 등에 등장하는 극적인 시각이미지들은  강력한 공포와 증오를 각인시키고 우리와 다른 "괴물"로서 각인시킨다. 5)


이 과정은 교묘한 언어조작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아이히만은  현실과 자신들을 실재로 이어주는 대신에 우회적인 언어규칙을 만들고 지속적으로 사용함으로써 그들이 가진 정상적인 지식과 동일하지 않게 하는 현실감각의 결여를 유도했다. 예컨대 유대인 대량학살을 ‘최종적 해결’, 전쟁포로 살해를 ‘특별처리’, 강제수용소를 ‘보호감호’, 약자에 대한 잔혹한 가학행위를 ‘확고한 태도’라고 불렀다. 이 언어 속에서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은 차가운 사물이 되고 자신들과 상관없는 비현실적 존재가 되었다.

 

타자를 정치적 조작을 통해서 사물로 또 괴물로 만드는 이 과정은 나치스 독일에 해당되는 특수한 예외가 아니라 일반적 현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우슈비츠는 고유명사라기 보다 보통명사에 가깝다. 이렇게 해서 역사적으로 인간이 아닌 ‘그것들’(사물 혹은 괴물)이라고 칭해졌던 집단들의 목록은 엄청나게 길며 사실 우리들 중 거의 모두가 거기에 포함되어 있다. 니그로, 히스패닉, 빨갱이, 동성애자, 아메리카 원주민, 유대인, 마녀, 무슬림, 노동자, 아일랜드인, 타밀족, 크로티아인, 투치족, 조센징, 전라도 까지...

 

그리고 일단 그 집단이 ‘그것들’의 소굴로 변하고 나면 특히 권위를 가진 누군가가 명령을 내릴 경우, 그 무슨 짓이든 허용된다. 양심은 더 이상 필수적이지 않은데, 왜냐하면 양심은 우리를 다른 인간들에게 얽매이게 할 뿐 ‘그것들’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직 내 동포, 내 친구, 내 아이들에게만 적용될 뿐 적의 동포, 친구, 아이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들은 내 도덕적 우주에서 배제되고, 나는 이제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으며, 어쩌면 나와 같은 집단에 속한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으며 그들의 집에서 그들을 내쫓거나, 가족에게 총을 쏘거나, 산채로 불태울 수 있다.6)


1994년 르완다에서 일어났던 비극은 우리 속에 들어 있는 평범한 악의 악마성을 여지 없이 보여주었다.7)

"지옥에는 악마가 없다. 모든 악마는 르완다에 모여 있기 때문이다." 1994년 아프리카의 소국 르완다에서 발생한 '피의 잔치'를 두고 현지의 외국인이 전한 말이다. 백일 동안 백만명이 죽임을 당하고 수백만명의 난민을 낸 이 비극적인 사건을 세계는 오늘날 '르완다 사태'라고 부른다.

 

1962년 벨기에로부터 독립한 르완다에서는 지배계층인 투치족과 피지배계층인 후투족 사이에 크고 작은 충돌이 그치지 않았다. 벨기에는 식민 통치를 원활히 하기 위한 방법으로 종족간의 갈등을 이용했다. 소수종족인 투치족으로 하여금 다수인 후투족을 다스리게 한 것이다. 식민 기간 동안 당연히 교육과 문화의 혜택은 투치족에게 집중되었다. 그러나 벨기에로부터 독립한 이래 정권은 인구의 85%를 차지하고 있는 후투족에게로 넘어갔고 이 과정에서 종족간 골이 깊어져 서로 죽고 죽이고 쫓고 쫓기는 일이 30년 동안 되풀이 되었다.

 

1994년 4월, 후투족 출신의 하비아리마나 대통령은 드디어 종족간의 분쟁을 종식하기 위한 평화협정을 체결한다. 그러나 평화협정을 체결한 대통령이 의문의 비행기 사고를 당하고 이를 투치족의 짓이라 판단한 후투족에 의해 20세기 최후의 홀로코스트가 발생한다.

 

대통령의 죽음을 계기로 다수이자 군부를 장악하고 있는 후투족에 의한 투치족 학살이 시작되었다. 약 백일간 후투족은 총과 칼, 몽둥이와 창으로 투치족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도륙했다. 이 과정에서 약 백만명의 투치족 (투치족의 3/4 )과 온건한 후투족이 희생되었으며 비극은 그해 7월 투치족 반군이 르완다 전역을 장악함으로써 종료되었다.

 

투치족을 사람이 아닌 추상적인 대상으로 보고 박멸해야할 "바퀴벌레"라고 부름으로써 감수성의 이전을 차단했다. 그래서 늪지에서 투치족 사람과 마주치면 그들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8)


이 비극은 보스니아 내전에서도 예외없이 발생했다. (1992~95) 후투족에 의해서 행해졌던 그 끔찍한 인종청소가 여기서도 똑같이 전개되었다. 밀로세비치의 주도하에  인종청소의 광기에 휩쓸린 세르비아인들에 의해  200만명 이상의 보스니아인이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집단광기는 예외가 아니고 통상적 경우며 우리가 인간성에 대한 깊은 성찰을 멈추는 순간 아우슈비츠는 언제, 어디서든지 재현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악마는 멀리 있지 않다.



4. 이 아우슈비츠는 먼 나라의 일이 아니다. 우리가 그 비극의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으며 아직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르완다에 바퀴벌레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빨갱이’가 있다. 이것은 단순히 좌우 이념의 싸움이 아니다. 이념은 핑계일 뿐이다.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지만 일제의 잔재는 청산되지 않았고 오히려 일제에 부역했던 그 세력이 미국을 등에 입고 해방정국의 주류세력으로 부활했다. 이 친일파는 친일부역의 트라우마를 반공으로 포장하는데 성공했다. 그들의 과거를 알고 있는 민족진영을 공산주의자와 함께 묶어서 좌파로 내치는 이념의 프레임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한다. 이른바 "빨갱이"의 탄생이다.

 

청산되어야할 역사를 망각하고 자신들의 적을 국민의 적으로 되돌리는 악마의 계몽이 반공교육을 통해서 전개되었다. 어떤 생각도, 어떤 주장도 빨갱이라는 한마디에 무력화되어 버렸고, 그렇게 규정되는 순간 그가 누구이든 더 이상 인간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것은 '괴물'이고 '마녀'고 '바퀴벌레'였다. 이 조작을 통해 친일세력은 오늘날 까지 면면히 이어져 오면서 사회의 주류세력으로 자리잡고 있다.

 

우리가 받은 반공교육은 전국민의 사이코패스화를 효과적으로 만들어왔다는 점에서 나치의 선전교육에 못지 않다. 50대인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시절 도덕교과서의 본래 이름은 '반공도덕'이었다. 어린 우리는 도덕교육이 곧 반공교육인 줄 알았다. 도덕교육이 타자를 이해하도록 하는 공감의 교육이 아니라  타자를 사물화시키는 증오의 교육이라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것인가? 다음은 40대 이상이라면 누구라도 공감할만한 반공교육의 한 풍경..


  6월25일이 다가오면 반공포스터를 그렸다. 미술시간에도 그리고, 숙제를 내줘서도 그리고, 반공포스터 그리기 대회에 나가서도 그렸다. 그러나 아이들 백명이면 백명이 다 똑같게 그리는 것은 북괴(북한이라는 말이 없었다. 북한괴뢰를 줄여 북괴라고 했다)의 모습이었다. 

  머리에는 도깨비처럼 뿔을 그려야 했고 얼굴과 팔엔 빨간 색을 칠했다. 왜? 빨갱이니까. 또 팔뚝엔 온통 고슴도치처럼 가시같이 뻣뻣한 털을 그려넣어야 비로소 북괴의 모습이 됐다. 그리곤 남한을 잡아먹으려고 하는 모습을 그렸다. 아니면 용감한 아이가 북괴를 몽둥이로 때려잡는 것을 그리든지...아이들은 포스터 아래나 위에 '무찌르자 공산당, 쳐부수자 북괴군' '반공 방첩'과 같은 구호를 써넣었다. 9)

 반공 웅변대회도 해마다 열렸다. 웅변원고의 단골메뉴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하는 이승복의 절규(최근 기자들 사이에 그 보도가 가짜였다, 아니다 하는 논란이 있었다)와 '일천구백오십년 유월 이십오일, 새벽 네시'로 시작하는 전쟁 이야기였다. 또한 오른 손과 왼 손을 치켜든 뒤 허공에서 양손을 부르르 떨며 '이 연사 소리높여 외칩니다'도 단골메뉴였다.


 이어서 음악시간에 퍼져 울리던 끔찍한 증오의 노래..박두진 작사 김동진 작곡 '6.25노래'


1.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2.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 불의의 역도들을 멧도적 오랑캐를
하늘의 힘을 빌어 모조리 쳐부수어 / 흘려온 갚진 피의 원한을 풀으리.

(후렴)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여기에 세뇌된 우리는 어느 정도 의사 사이코패스다. 빨갱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공포와 함께 격렬한 증오감이 터져 오르면서 그 사람이, 그 집단이 '그것'으로 보이고, '괴물'로 보인다. 사리분간이 멀쩡하던 사람이 일시적으로 呪文에 자동반응하는 좀비가 된다. 이것이  지난 50년간 한국사회의 주류인 친일세력이 그들이 불리할 때 마다 불러내는 신통방통한 주문이었다. 이른바 이념논쟁이다.

 

친일 세력이 역사적으로 청산되고, 사회적 주류에서 대체될 때 그들이 자신의 과거의 트라우마를 은폐시키기위해 조작해 놓은 '빨갱이' 프레임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날이 올 때 까지 우리나라에도 언제든지 아우슈비츠가 재현될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증오에 기반한 세력이 있는 이상 지옥은 그렇게 멀리 있지 않다. 지난 MB정부 4년은 새삼 우리에게 이것을 일깨워 주었다.



5. 잘 알다시피 공자는 仁을 군자가 가져야할 최고의 도덕적 자질로 삼았다. '인'이란 무엇인가? 사전 그대로의 의미로서는 '어질다'는 것인데 어질다는 것은 무엇인가?

 

철학적 용어들은 대부분 그 용어가 처음 제출되었을 때는 일상적 용어였고 시중잡배들도 다 알 수 있는 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단어에 복합적인 형이상학적 함축들이 들어오면서 전문적 철학적 용어(jargon)로 변해간다. 공자의 '인'도 그랬으리라 생각된다. 공자가 이 말을 쓸 당시에는 인은 시중의 일상용어였다. 일상용어로서의 인은 무슨 의미였을까? 관념적 용어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무수한 변용을 겪는데 대해서 기술적 용어들은 그 원초적 뜻을 화석처럼 간직하고 있는 수가 많다. 이런 관점에서 도올 김용옥 교수는 한의학에서 사용되는 인의 의미에 주목한다.10) 한의학에 '不仁'이라는 증세가 있다. 물론 이것은 어질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마비(痲痺) 즉 감각이  없는 증세를  지칭한다. 서양의학에서의 마비 증세는 anesthesia 인데, 이것은 an+aisthesis의 합성어인데 not(an, -이 아닌)+sense perception(aisthesis, 감각) 즉 감각 없음을 의미하고 이것은 한의학의 不仁과 그 함의가 정확히 일치한다.

 

여기에 비추어 볼 때 인은  마비의  반대 의미인 감각, 느낌(feeling)을 지칭한다. 공자가 말한 인의 원초적 의미는 '느낌'이었을까? 그렇다면 공자가 가르친 군자의 최고의 덕목은 풍부한 감수성이었을까? 느낄수 있는 힘 이것은 맹자(孟子)가 말했듯이 타인의 고통, 불행에 대한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표출된다. 그러나  측은지심은 인의 한 실마리일 뿐 그 근본은 느낄 줄 아는 힘, 공감할 줄 아는 능력이다.

 

이것이 결여된 것을 우리는 앞서 사이코패스라고 불렀다. 그의 잔인함은 타자의 고통을 느낄 수 없는 그의 무능력에서 온다. 그런 의미에서 사이코패시를 공자투의 용어로 말하면 不仁이고 사이코패스는 不仁者이다. 이런 의미에서 군자는 사이코패스의 대척점에 서 있고, 군자의 나라는 사이코패스가 만들어내는 아우슈비츠의 대척점에 서 있는 나라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조용현, 신생, 2012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