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생명의 디자인과 자연의 미학

영원과 찰나..크기와 시간(2000.9)

 

영원과 찰나..크기와 시간

 

 

   두가지 시간

 

 어린 초등학교 시절.아침을 먹고 나온지 2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3교시에 들어가면 벌써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무더운 여름,학교를 파하고 냇가에서 친구들과 뒹굴다가 한참 놀았다 싶어 하늘을 쳐다보면 해는 아직 중천에 떠 있다.이제 나이가 들어가니 아침을 걸리고도 배고픈 기색이 없고 점심먹고 나면 금방 해가 서산으로 넘어간다.초중고등학교 12년은 엄청나게 길게 느껴지건만 지금에 와서 12여년은 바로 엊그제 같다.그래서 시인들은 시간의 유수같은 흐름을 한탄했던가?

 해가 지고 달이 뜬다.이것을 가지고 인간은 시간을 측정한다.이 시간은 어느 누구에게도 예외없이 일률적으로 흐른다.이것이 우리의 주관적 경험과는 관계없이 외부에서 무차별적으로 흐르는 뉴턴의 절대시간이다.(아인시타인의 시간도 그 시간 자체가 의식적 경험과 연관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철학적 관점에서 뉴턴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느끼는 시간의 개념은 이것과는 다르다.우리의 느낌으로는 어떤 때는 시간이 빨리 날라가고  어떤 때는 느릿느릿하게 기어간다.과학의 논의와는 별도로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칸트,그리고 베르그송 까지 철학자들은 시간이 객관적 실재가 아니고 주관적 현상임을 강조해왔다.그것은 우리의 의식경험과 연관되어 있다.그러나 시간에 관한 철학자들의 관점도 철학자들에 따라 크게 다르며 객관적 현상에 가까운 쪽에서 주관적 현상에 가까운 쪽에 까지 걸치는 넒은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다.전자에 칸트가 있다면 후자에 베르그송이 있다.전자의 경우 시간은 우리의 선천적 직관형식이기 때문에 객관적 실재는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의 의식경험안에서는 보편적이다.후자의 경우는 단적으로 그것은 "持續"(필자는 아직도 이것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이며 그것은 우리 경험의 충실도에 따라 달라진다.필자는 이 중간쯤에 이 둘을 매개시키는 다리를 놓을 수 없을까 생각해 왔다.필자가 도입하고자 하는 것은 크기와 시간을 연관시킨 동물생리학자들의 시간개념이다.다음절은 동물생리학자 슈미트-닐센의 생리학적 시간에 관한 논의이다.(Schmidt-Nielsen,Scaling,Cambridge Univ.,12장)

 

  크기와 시간

 

  심장박동수와 시간

작은 동물은 큰 동물 보다 더 빠른 템포로 일생을 산다.호흡은 더 빠르고,심장은 더 빨리 뛰며 다리는 더 빨리 움직인다.모든 것이 큰 동물에 비해 더 빠르다.시계상의 시간이 큰 동물이든 작은 동물이든 상관없이 똑같은 생리적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뾰족뒤쥐의 심장박동수는 분당 1000회인데 대해 코끼리는 30회에 지나지 않는다.코끼리의 심장이 1000회 뛰는데는 약 30분이 걸린다.다른 생리적 기능도 이와 마찬가지이다.뾰족뒤쥐는 코끼리보다 더 빠른 삶을 살고 그래서 시계상의 시간단위는 이 두 동물에게서 아주 다른 의미를 갖는다.생리적 시간은 상대적 개념이며 동물의 크기가 그 동물의 시간을 규정한다.

작은 심장은 더 빠른 속도로 뛰고 박동간의 간격도 더 짧다.진동수와 시간(주기)은 반비례한다.거꾸로 말하자면 진동수는 시간의 역수다.

 

   진동수=1/주기

 

체중(Mb 단위kg)에 대한 심박수(fh)는 통상 분당 심박수로 표시하는데 슈탈에 의하면 아래와 같다.

 

 

 

그러므로 1회 박동에 요하는 시간(th,단위 분)은 다음과 같다.

 

 

Mb가 1kg이면 심장박동주기는 0.249초로 1초의 1/4이다.초당 4번 뜀으로 분당 240번 뛰게 된다.

생리적 빈도 가운데 많은 자료가 있는 것은 포유동물들의 호흡빈도이다.슈탈에 따르면 동물들의 호흡빈도는 아래와 같다.

 

 

이 식에서 동물들의 호흡시간을 알 수 있다.

 

 

심장박동수와 호흡수에서 체중의 지수가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심장박동수와 호흡수간의 비율을 계산해 보면 아래와 같다.

 

 

지수 0.01은 별 의미가 없다.그러므로 우리는 심장박동수는 호흡수의 대략 4.5배라고 일반화할 수 있을 것이다.이 비율은 동물의 크기와는 무관하며 모든 포유동물에 대해서 타당하다.물론 이 경험식은 평균값이며 동물에 따라서는 이 일반값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다.

새는 포유동물 보다 더 느리게 호흡하며 심장박동율도 늦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그것의 호흡수에 대한 심장박동수의 비는 약 9.0이다.이것은 호흡당 심장박동수가 새가 포유동물의 2배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대사율과 시간

 동물의 삶의 속도가 얼마나 빠른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측도는 대사율이다.아래 식이 보여주듯이 대사율은 체중이 증가함에 따라 감소한다.

 

 

시간은 대사율의 역수이기 때문에 대사시간(tmet) 또는 생리적 시간은 체중에 따라 다음과 같이 변한다.

 

 

이것은 우리가 심장박동률에서 본 것과 동일한 관계에 있다.아주 작은 동물에게는 심장이 1초에도 서너번 뛰지만 큰 동물에게는 그 보다 더 긴 시간이 걸린다.똑같은 것이 모든 대사율의 과정에도 적용된다.생리적 시간은 체중이 증가함에 따라 시계의 시간의 척도에서 증가한다.

그러므로 대사적 시간을 생리적 시간으로 사용하는 것이 이치에 맞으며 실제 시계의 시간은 동물의 크기에 따라 그들의 삶에 그 의미가 아주 다르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동물들의 삶:얼마나 길고,얼마나 빠른가?

 작은 동물들의 삶은 아주 빨리 전개되며 그래서 그들은 오래살지 못한다. 그러나 생리적 시간에서는 그 동물이 크든,작든 무관하게 똑같은 수명을 누린다.

 30g의 쥐는 분당 150회 호흡하고 일생(3년)동안 2억회 호흡한다.5톤의 코끼리는 대략 분당 6회의 호흡을 하며 40여년의 생애동안 쥐와 대략 같은 수의 호흡을 한다.쥐의 심장은 분당 600번 뛰며 일생동안 8억번 뛴다.코끼리의 심장은 분당 30회 뛰는데 일생동안 뛰는 심장박동수는 쥐와 비슷하다.

 물론 수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잡아먹고 잡아먹히는 가혹한 자연환경하에서 동물들이 평균적으로 살아가는 기간으로 정해야 할 것인가,아니면 포식자가 없는 상황에서 살수 있는 최대값을 잡아야 할 것인가? 우리가 조사할 수 있는 것은 사육장의 동물이다.이것을 기준으로 조사해 보면 포유동물의 수명은 그 크기에 의존하며 다음 식에 따른다.

 

 

새장속의 새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위의 두 방정식은 인상적인 사실을 보여준다.우선 수명이 몸의 크기에 따라 증가한다는 것이다.더 나아가 포유류와 조류의 식에서 그 지수값이 사실상 같다.그러나 같은 크기의 포유류보다 새가 더 오래산다.그 계수의 차가 약 2.5이기 때문에 새가 같은 크기의 포유동물 보다 약 2.5배 오래산다고 말할 수 있다.

 

  하루살이의 하루

 

생리적 시간으로 보았을 때 모든 포유동물들의 수명은 같다.그러나 천문학적 의미에서의 수명은 다른데 그것을 결정하는 기준은 그 몸의 크기이다.동물들의 일생동안의 심장박동수와 호흡수 그리고 대사의 횟수는 동일한데 사이즈가 커질수록 그 주기가 길어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수명이 길어진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 논의를 확장시키고 싶은 유혹을 떨칠 수 없다.생리적 시간은 바로 의식경험의 가장 원초적 형태이다.그렇다면 동일한 생리적 시간을 산다는 것은 그 의식경험의 양에서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물론 그 질은 다를 것이다.그러나 여기서 인간의 의식경험이 더 고차적 경험이라는 것은 나오지 않는다.(이것은 고차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별도의 논의를 필요로 하는 주제이다.필자가 여기에 대해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한 것이 있는데 다음책을 참조) 다만 두 동물이 다른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천문학적 시간의 관점에서 어린이의 시간은 느리게 가고 노인의 시간은 빨리간다.같은 시간안에 어린이가 겪는 의식의 경험량은 노인의 경험량 보다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생리적 의미에서 인간은 10대가 끝났을 때 70수명의 2/7를 살은 것이 아니라 이미 반이상을 살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생리적 시간으로 본다면 20대초에  -가속도까지 감안하면-이미 40대에 접어든 것이다.(이 수치는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필자가 편의상 붙여본 것이다.)우리의 삶은 서서히 시작해서 점점 가속되는 차에 비유할 수 있다.20대초에 살날이  앞으로 2/7가 남았고 느긋해할 일이 아니다. 시간상으로 보아 이미 반을 훨씬 지난 것이다.천재들은 이미 20대에 그 과업을 완수한다.(아!필자의 초라함이여!)

 시간의 의미는 개인의 일생에서도 달라지지만 크기가 다른 두 종의 경우는 그 차이가 더 분명해진다.10g의 쥐에게 시계상 시간으로 하루가 100톤의 푸른고래에게는 거의 2달에 해당한다.그러나 두 종이 사는 생리학적 시간은 같다.그들은 똑같은 양의 시간을 향유하고 죽는다.하루살이의 하루도 그 자체로서는 영겁이다.

 

  다시 걸리버로

 

 걸리버와 릴리푸트인이 생리적 시간에서는 동일한 시간을 누린다고 하더라도 물리적 시간은 서로 다르다.그것은 크기와 연관되어 있다.걸리버가 소인국에 1년동안 머물었다고 생각해보자.그 기간이 릴리푸트인들에게 생리적 시간으로는 얼마일까?

 

 

 52년이 흘렀다! 걸리버의 1년은 릴리푸트인들에게는 52년에 해당한다.걸리버를 맞이했던 릴리푸트의 왕을 비롯한 그 세대는 이미 죽고 없을 것이다.걸리버가 소인국을 떠날 때 그가 도착했을 때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몇몇 노인들은 걸리버가 해안가에 도착했을 때의 그날을 마치 전설처럼 손자들에게 들려주고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