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과 현실
초월과 내재, 《매트릭스》와《토탈리콜》
1. 영화 《매트릭스》가 나오자 말자 기독교의 구속론(救贖論)의 SF적 패러디라는 지적이 많이 있었다.
매트릭스는 컴퓨터가 지배하는 세계속에서 인간을 가둬놓는 감옥이다.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면 그 만큼 완벽한 감옥도 없을 것이다. 바로 그것이 매트릭스라는 감옥이다. 불쌍한 영혼들을 이 감옥에서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가 영화의 주제이고 주인공 네오는 악에서 인간을 해방시키기 위해 지상에 강림한 신의 아들 예수(Jesus)의 패러디로도 보인다.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매트릭스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그 안에서 태어난 사람이 있었네...그 분은 그가 원하는대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분이었지...그가 옳다고 생각하는대로 매트릭스를 다시 만드는 능력말이지...그가 처음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한 분이고...우리에게 진실을 가르치셨지. 매트릭스가 있는 한... 인류는 결코 자유로와 질 수 없네.
...그 분이 돌아가신 후...오라클은 그 분의 재림(return)을 예언했네...그 분의 강림(coming)이 매트릭스를 파괴시키고...전쟁의 종식과...우리에게 자유를 줄거라고 말이야. 그게 우리가 평생을 바쳐가면서 매트릭스를 탐색하는 이유라네..그 분을 찾는 거지.
이 영화가 풍기는 짙은 기독교적 냄새는 등장인물들의 이름에도 반영되어 있다. 네오(Neo)는 새로움을 뜻하는 그리이스어 Neos에서 파생한 접두어로, 신기원을 가져올 구원자라는 함축이 있다. 저항군의 지도자 모피어스(Morpheus)는 그리이스 신화에서 꿈의 신으로, 어둠을 뜻하는 그리이스어 Morphnos에서 비롯되었는데, 이것은 그가 검은 옷을 입는 데서 암시되어 있다. 여성전사 트리니티(Trinity)의 이름은 '삼위일체'라는 뜻이다. 예언자 미라클은 누구일까? 저항군의 모선의 이름이 '느부가네살'(Nebuchadnezzar)에 그 암시가 들어있다. 느부가네살은 바빌론의 왕으로 유다왕국을 멸망시키고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에서 쫓아내어 바빌론으로 끌고 간 소위 "바빌론 포수捕囚(BC 517년)"를 일으킨 장본인이다. 그 당시 예언자 예레미야는 "그" 분이 강림해서 이스라엘을 이 고통스러운 환란에서 구원해 주리라고 예언했다. 바로 그가 우리를 시온(예루살렘의 별칭, 영화 《매트릭스》에서는 매트릭스 밖에 있는 피난처)의 땅으로 돌아가게 해 줄 것이라고 예언한다.
'최초로 우리를 자유롭게 한 그 분'은 모세, 예언자 오라클은 예레미야, 저항군의 지도자 모피어스는 세례 요한, 트리니티는 막달라 마리아, 에이팍, 스위치, 탱크, 도저, 마우스 그리고 사이퍼는 예수의 12제자들의 패러디이다. 사이퍼는 네오를 배반하는데 이것은 유다와 닮아 있다. 인공지능에 의해서 접수된 땅은 예루살렘으로 그 자유를 회복할 미래의 예루살렘은 시온에 대응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하나 좀 이상한 것은 왜 저항군의 모선의 이름을 하필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바빌론 왕국의 왕의 이름에서 따 왔을까 하는 점이다. 유대인을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준 페르시아의 왕의 이름을 따서 '키로스'(Kyros)로 했으면 더 그럴듯하지 않았을까?
예레미야서의 가장 특징적인 내용은 '새 언약'이다. 그것은 앞의 '모세 언약'의 단순한 회복이나 실현이 아니다. 바빌론 포수를 통해서 고뇌 속에 성숙한 새로운 사유는 종전의 민족 종교를 넘어서서 보편 종교에로의 길을 준비하게 된다. 사실 바빌론 포수 이후 그 언약의 내용은 확연하게 달라지고 그 새로움의 완성은 예수에 와서 완성된다. 그래서 오라클(예레미야)이 예언한 그 분의 이름은 새로운(new) 구세주라는 의미에서 '네오'(Neo)이다.
2. 기독교와의 이런 대비는 이 외에도 곳곳에서 암시된다. 네오는 프로그램을 해킹해서 유통시키는 해커이다. 네오에게서 프로그램을 산 한 젊은이가 다음과 같은 말을 툭 던지는데 네오의 성격을 암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할렐루야. 넌 나의 구세주야, 친구. 나한테는 예수 그리스도라구.
(Hallelujah, You're my savior, man. My own personal Jesus Christ)
《매트릭스》는 가상과 현실의 두 세계가 있으며 그것을 명백히 구분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 이원론은 매트릭스의 너머의 세계가 존재하며 그것을 넘어서서 진정한 현실에 닿을 수 있다는 입각점에 서 있다. 이 입각점이 성립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데카르트가 찾아왔던 것이다. 절대적 주체성으로서의 '나'가 그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영혼이다. 그것은 매트릭스가 갖는 '연장'과는 다른 '사유'라는 속성을 갖고 있다. 그것은 연장된 것이 아니므로 세계의 바깥에 있고 따라서 매트릭스의 바깥에 있다. 물론 우리의 육체는 그리고 우리의 감각은 물질의 매트릭스 안에 있다. 그래서 감각과 육체의 영향으로 자칫 가상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쉽다. 그러나 원리적으로 우리의 영혼은 가상과 현실을 구분할 수 있다. 만일 내가 '연장'으로서 존재한다면 그 존재는 가상인지 현실인지 구분하기 어렵겠지만 '사유'로서 존재한다면 그 존재는 가상일 수 없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진짜로) 존재한다. 이것은 existence로서의 존재이다. '존재한다'는 의미를 지니는 라틴어 동사 'exister'는 '위치하다'는 뜻의 'sistere'와 '-의 밖에'를 의미하는 접두사 ex의 합성어이다. 현실적 존재는 세계의 '바깥에 서 있음'이다. 대상화될 수 있고 객체화될 수 있는 것은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 객체화될 수 없는 것 그 절대적 주체성 그것은 사유 밖에 없다. 그것은 세계를 초월해 있는 존재, 절대정신으로서의 신이다. 그것은 기독교의 신이며 데카르트 철학에 기초한 이 《매트릭스》가 그 기본구도를 기독교에서 가져온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것의 문제는 매트릭스 내의 존재가 자신이 매트릭스에 갇혀 있음(다른 말로 매트릭스의 바깥)을 아는 것이 도대체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데카르트 식으로 이야기하면 어떻게 사유하는 실체로서 정신이 우리에게 알려지게 되었나 하는 것이다. 연장으로서의 세계 속에는 그 단서가 전혀 없지 않은가? 그것은 경험을 통해 학습한 것이 아니고 신에 의해서 우리에게 본래 부여된 본유관념(innate ideas)이다.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매트릭스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그 안에서 태어난 사람이 있었네...그 분은 그가 원하는대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분이었지..."라고 매트릭스를 본 최초의 '그'를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매트릭스 안에서 매트릭스를 넘어서는 것이 가능한가?
이것은 헤겔이 묻고 해결하고자 한 문제였다. 나의 '영혼'은 절대로 대상화될 수 없는 그 무엇이 아니다. 대상화 가능한 수준에서 절대적 주체성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발전 단계가 있다. 경험은 자기와 그 자기속으로 들어온 대상을 다시 자기 속에 포괄해 가는 과정이다. 이 자기는 다시 새로운 대상화의 대상이 될 터이다. 이것이 헤겔에 있어서 정신의 자기발전의 논리였다. 헤겔은 이러한 자기경험의 과정이 최종적으로는 더 이상 대상화되지 아니하는 절대 주체성으로 이행해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재적 이행을 통해서 보다 풍부해진 경험은 결국 세계를 넘어가게 된다는 논리이다. 말하자면 dasein(세계-내-존재)이 existence(脫存, 또는 實存)로 이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매트릭스안에서 매트릭스를 초월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매트릭스내에서 매트릭스를 깨달은 자가 출현했다고 해도 그렇게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내재와 초월을 매개하려는 이러한 헤겔의 곡예는 과연 가능할까? 이것은 2차원 평면을 아무래 포갠다 더라도 3차원 공간으로 변할 수 없는 것처럼 무망해 보인다. 두께가 0인 종이를 무한개를 포갠다 하더라도 그것이 두께를 가질리가 없다.
두차원 뒤섞기 ; 좌측은 에셔의 《파충류》,우측은 마그리뜨Magritte의 《달콤한 진실 》
점진적 이행이 아니라 단적인 초월이 있을 뿐이며 그 초월은 매트릭스 내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바깥에서 부과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매트릭스에 대한 돌연한 깨달음은 신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다. 가상을 넘어 현실에 착목할 수 있는 능력, 데카르트의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확고한 기반 그것이 '나' 속에 있는바 그것은 신에 의해서 우리에게 앞서 주어진 것이다. 데카르트의 관점에서 볼 때 매트릭스는 일시적으로는 모르지만 영구히 인간을 그 속에 가둬놓을 수 없다. 내 내부를 직시하면 가상과 환상은 눈녹듯이 소멸할 것이다. cogito ergo sum!
3. 이런 측면에서 《매트릭스》에 깔려 있는 사고는 전혀 새롭지 않다. 그 다루는 소재가 "가상현실"과 같은 첨단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가상은 극복되고 지양될 수 있다는 근대적 신념에 기초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매트릭스를 넘어 있는 초월적 실체가 있을 때이다. 그러나 그것을 가정하지 않을 경우 가상과 현실의 구분은 애매해진다. 도대체 이 둘을 존재론적으로 구분할 수 있기는 한 것일까?
이런 관점에 서면 《매트릭스》와는 아주 다른 성격의 영화가 가능하다. 앞서 보았듯이 '있음'과 '없음'의 문제는 감각의 문제라기 보다 의식의 문제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모든 대상화를 넘어서는 절대적 주체성으로서의 의식은 없다. 어떤 것도 -그것이 물질이든 정신이든- 다른 것에 의해서 대상화될 수 있다. 의식이 의식에 의해서 대상화되어 의식의 의식이 되고 다시 이 의식의 의식의 의식은 다시 의식에 의해서 대상화되어....매트릭스에 비유하면 이 세상은 수없는 매트릭스들이 층층히 켜켜히 포개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매트릭스의 바깥으로 나오는 순간 그 매트릭스가 가상인지 아닌지를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또 다른 매트릭스일 뿐이다. 또 다시 가상과 현실의 모호한 지경으로 들어간다. 꿈에서 깨어났다고 현실이라 할 수 없다. 당신은 지금 꿈속에서 꿈을 꾸고 그 꿈에서 깨어났을 뿐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완전한 가상에서 완전한 현실에 까지의 스펙트럼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관점은 오히려 내재와 초월을 매개할려고 한 헤겔의 관점에 더 가깝다. 가상과 현실을 구분해주는 것이 의식인데 그 의식이 가상이라면 그것은 사실 가상과 현실의 구분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다르게 표현한 수사법일 뿐이다. 《공각기동대》는 이 정체성의 와해를 잘 보여준다. 뇌는 해킹가능하며 그 주체성 자체를 대체할 수도 있다. 엉뚱한 기억을 주입해 정체성을 난도질해 버릴 수도 있다. 그것은 데카르트가 보듯이 전혀 확고한 기반이 아니다.
한 청소원이 (나타나지도 않으면서) 이혼을 강요하는 아내의 고스트를 해킹하기 위해 액세스하고 있다. 쿠사나기는 격투 끝에 이 청소원을 붙잡는다. "그러나 그 청소원에게는 아내가 애초에 없었다. 청소원은 아내, 불륜, 이혼, 딸 등과 같은 모든 기억들이 의사체험인 것을 알고 경악한다. 그가 끔찍이 사랑하는 딸이 있다고 생각했던 사진에는 그 자신과 개 한 마리만이 찍혀 있다.
이 가상과 현실의 구분의 해체..이것이 《공각기동대》의 한 주제이기는 하지만 아직 그 해체의 정도가 약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개와 함께 살고 있는 고독한 청소원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소원에게 심어진 가상이 아무리 그럴듯하다 하더라도 실제의 현실과의 대비에서 가상임이 밝혀질 수 있다. 가상과 현실의 철저한 해체는 오히려 이런 철학적 물음을 표방하지도 않으며 구태여 나타낼려고도 하지 않는 한 영화에 의해서 성공적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그것이 바로 《토탈리콜》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얼핏보면 단순하다. 여행에서 남는 것은 기억 뿐이다. 그렇다면 그 기억을 주입하면 가지 않고도 여행의 효과를 낼 수 있지 않은가? 이 아이디어에서 만들어진 회사가 리콜사라는 회사이다. 착암기 기사 퀘이드는 리콜사에서 이 화성여행 상품을 산다. 그런데 기억을 주입하는 과정에서 사고가 생겨 기억주입이 중단된다. 그 사고는 우연한 것이 아니고 화성에 대해 원래 갖고 있던 기억과 충돌한데서 생겨난다. 다시말해 퀘이드는 화성에 실제 간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본래 화성의 정보부의 유력자인데 어떤 일로 기억이 제거된 채 지구로 와서 완전히 다른 인간으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비밀리에 화성에 잠입해서 저항군과 함께 화성을 해방시키는데 성공한다. 그는 보잘 것 없는 착암기 기사 퀘이드가 아니고 화성해방의 영웅 하우저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또 하나의 다른 층이 있다. 곳곳에서 단서를 흘리고 있는데 그 하나가 화성에 동행했으면 하는 여자의 유형을 선택하라고 했을 때 그가 선택한 그 유형의 여자를 실제 화성에 가서 만나게 된다. 그래서 화성에서의 모험담 자체가 사실이 아니고 리콜사가 판 여행상품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생각해 보면 그녀가 화성에 있을 때의 실제 애인이었기 때문에 잠재의식이 그런 유형의 여자를 선택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가장 혼란스러운 것은 리콜사의 직원이 그를 방문해서 화성에서 일어난 일은 여행상품의 하나인데 당신이 너무 열중해서 정신적 손상을 입을 위험성이 있다고 당장 깨어날 것을 종용했을 때 일어난다. ("가상, 가상현실, 현실" 참조) 주인공 하우저는 이 리콜사 직원의 말이 거짓이라고 결론내린다. 화성의 일은 여행상품이 아니고 진짜다. 그러나 그 근거가 분명하지 않다. 그래서 어쩌면 리콜사 직원의 말처럼 상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전체 문맥은 이것도 저것도 다 그럴 듯하게 들리게 만든다. 《공각기동대》의 바트의 말이 바로 이 상황을 말하고 있다. “의사체험도 꿈도, 존재하는 모든 정보는 현실이요 또 동시에 환상일 뿐이야. 유일하게 의미 있는 것은 현존하는 상황이다. 그것이 꿈인지 의사체험인지 실재인지 하는 존재론적 물음은 무의미하다. 한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든 가지게 되는 모든 정보는 현실인 동시에 환상인 것이다. 그것이 현존해 있는 한에서 현실이며, 그 궁극을 확인할 수 없다는 점에서 환상이다."(이정우, 『기술과 운명』, 60면) 《토탈리콜》은 그것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보여준다. 그런 면에서 가상의 본질에 대해서 《공각기동대》 보다 훨씬 완성도가 높아 보인다. 《토탈리콜》은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 하나는 슈왈츠네거의 근육질로 포장된 전형적인 헐리우드형 액션 영화이다. 그런 차원에서그런대로 재미있는 영화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숨어 있는 다른 얼굴이 있다. 가상과 현실의 본질이라는 문제를 심도있게 탐색하고 있다. 그 구분자체를 붕괴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그 구분을 전제하고 있는 《매트릭스》가 근대적 기획이라면 《토탈리콜》(1990)은 훨씬 더 포스트모던적인 기획이다. 그것은 가상현실의 본질에 대해서 더 심오한 탐색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공각기동대》(1995)나 《매트릭스》(1999) 보다 제작연도는 더 오래된 영화이지만 주제는 더 새롭다. 이 《토탈리콜》의 구도가 《매트릭스》 보다 더 뛰어난데도 불구하고 그 심오성이 별로 지적되고 있지 못한 이유를 나는 모르겠다. 그 외양상의 단순구도에 현혹되어 그 속에 들어 있는 다른 이야기를 놓친 것일까?
이 《토탈리콜》과 잘 맞아 떨어지는 것은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이다. 퀘이드와 하우저의 삶이 어느 것이 현실이랄 것도 없이 서로 병행하듯이 장자와 나비의 삶이 서로 병행하고 있다. 어느 것이 현실이고 어느 것이 가상인지 묻는 물음자체가 부질없다.
지난 어느날 장주는 꿈에 나비가 되었다. 펄펄 나는 것이 확실히 나비였다. 스스로 유쾌하여 자기가 장주인줄을 몰랐다. 그러나 조금 뒤에 문득 깨어보니 자기는 틀림없이 장주였다.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꾼 것인가? 나비가 장주가 된 꿈을 꾼 것인가?
(『莊子』, 김달진 역해, 문학동네, 38면)
가상과 현실의 관계를 보는데는 두 가지 입장이 있다. 하나는 그 구분이 가능하다고 하는 입장이며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 《매트릭스》 류이다. 그것은 물질적 세계 너머의 존재를 인정하는 초월적 존재론에 기초하고 있다. 서양의 주류적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그 구분이 원리적으로 가능하지 않으며 구분이 있다면 각자 자신의 주관적 관점이고 또 잠정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지각하는 현상의 세계 이상의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것은 내재적 존재론이며 서양에서는 범신론으로 알려져 있는 비주류적 전통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 《토탈리콜》 류이다. 가상과 현실에 대한 동양적 전통은 아무래도 후자에 가까워 보인다.(특히 불교의 경우...) 그런 면에서 가상과 현실에 대한 탁월한 해석이 가미된 《토탈리콜》 류의 영화가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