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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세상읽기

신애는 과연 신을 버렸는가-《밀양》, “믿음”의 진정한 의미를 묻다.



신애는 과연 신을 버렸는가?

《밀양》,
믿음”의 진정한 의미를 묻다.





1
. 어떤 종교든 종교의 궁극적 목적은 다르지 않다. 그것은 구원과 해방이다. 그러나 그것을 풀어가는 방식은 각 종교마다 그 종교가 가진 고유의 프레임에 따라 달라진다.

기독교의 기본 프레임은 "하느님"이다. 어떤 사건이든 하느님과 연관성 속에서 일어나며 그 연관성 속에서 의미를 가진다. 하느님을 매개로 하지 않는 구원과 해방은 없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소통하는 수단인 기도는 기독교의 핵심적 요소일 수밖에 없다. 물론 다른 종교에도 기도라는 양식이 있다. 불교의 경우도 기도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신앙을 구성하는 필수적 요소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되돌아보고 마음의 근본자리로 돌아가기 위한 수행법의 하나이며 따라서 그것은 참선, 염불, 다라니경 암송 등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수행이 곧 하느님과의 소통이며 하느님에 의해서 부여되는 그 은총에 의해서 구원과 해방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기도는 기독교에 있어서 필수적 신앙의 양식이다. 그것은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기독교도들이 하느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었다고 했을 때 그것의 진정성 여부이다. 하느님을 체험했다고 그것이 곧 하느님과의 소통이 일어났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소박한 생각이다. 인간은 자신의 원 또는 욕망을 쉽게 하느님에게 투사하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허깨비를 하느님으로 오해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에의 체험은 아주 까다롭게 해석되어야 한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란다. 하느님과의 소통을 신앙의 최고의 단계로 보는 기독교적 컨셉에서 하느님에의 체험 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직접적 체험 앞에는 어떤 심오한 사상도 타당한 비판도 무력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체험은 100에 99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허깨비일 가능성이 많다. 그러므로 그 체험을 아주 까다롭게 해석하지 않는 한 기독교 신앙은 쉽게 독단으로 빠져들기 쉽다. 이것을 방치하면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탄을 불러들일 수 있다. 사실 오늘날의 기독교는 수많은 사탄들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자신을 위장하고 있다. 반면 진정한 믿음들이 사탄으로 몰리고 있다.

반면 불교의 경우는 기독교와 다른 프레임으로 해서 이런 위험성은 적다. 불교도의 경우도 기도를 통해서 영적 체험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을 통해 부처님을 만날 수도 있고, 아미타불을 만날 수도 있다. 그저 개인적인 위안이고 행복일 뿐이다. 그것이 그 체험자에게 영적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구원과 해방은 부처님이나 아미타불이 내리는 은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체험이 가짜라 하더라도 그 해악은 지엽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체험에 대해 그렇게 까다롭게 해석하지 않아도 별 문제는 없다.

불교의 위험성은 기독교와 약간 다른데 있다. 그것은 비우고, 버림으로써 깨달음을 통해서 구원과 해방을 얻어가는 프레임이기 때문에 "비움"의 진정성 자체가 허술하게 해석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무엇을 비웠는가가 상당히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해방의 조건으로서 그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자칫 빈부격차를 심화시키고 정당화시키며 나아가서 계급사회를 공고화하는 위험한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 나아가 이 프레임으로 해서 불교는 어떤 종교에 비해서 부패하기 쉽다. 불교에는 죽음을 해석하고 맞이하는 행사들이 많다. 49재와 같은 것이 그 대표적이다. 이것은 산 자가 죽은 자와 관계를 정리하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좋은 제도이다. 그러나 여기에 욕망이 투사되면 49재는 사찰의 상품이 되고 모든 제례는 죽음을 파는 마케팅이 된다.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독단 -그리고 그에 따라오는 광신-들의 각축장이 되었다면 사찰은 욕망의 장터가 되었다. 물론 본래 기독교가 그런 것이 아니고 본래 불교가 그런 것이 아니다. 둘 다 인간구원과 해방에 대한 강력하고 유효한 수단들을 제공하는 인류문화의 보물들이다. 그러나 각각의 종교 마다 그 프레임으로 해서 생겨나는 함정들이 있다. 기독교의 경우 독단에 빠질 위험성이 있고 2천년 기독교 철학과 신학은 이 함정을 해석하고 차단하고 제거하는 유력한 수단들을 발달시켜왔다. 불교의 경우 그 프레임으로 해서 성직자가 쉽게 탐욕에 빠질 위험성이 있고 그래서 어떤 종교 보다 이것을 엄격하게 규제해 왔다. 성직자들의 경우 세속과의 일체의 인연을 끊고, 무소유를 최고의 덕목으로 가르쳐 왔다.

한국 교회는 지나치게 "믿음"의 양식에 의존함으로써 독단의 위험성에 대한 기독교의 안전장치들을 무력화시켜왔다. 그 거짓된 믿음, 독단의 각축장이 영화 "밀양"이라는 공간에서 신애의 체험을 통해서 심도있게 펼져진다.



2
.  영화 "밀양"(감독; 이창동) 이해하기 위해서 신애(전도연 粉)의 성격이해가 필요하다. 우선 그녀는 대단히 자의식이 강하고 그럼으로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을 극단적으로 싫어한다. 우선 그녀는 왜 밀양으로 왔는가? 그녀 자신이 설명하는 표면적인 이유는 이렇다.



2. 개울(외부/낮)

도로 아래의 작은 개울가. 신애와 아이가 나란히 앉아 있다. 마치 나들이라도 나온것 같다. 가을 햇볕이 내리쬐는 주위의 풍경은 별난 것이 없지만, 그런대로 평화롭긴 하다.

신애(감탄하듯) 좋다…… 그지?

뭐가 좋아?

신애(잠깐 말이 막히다가)……햇볕.

…….

신애 준, 여긴 아빠 고향이야. 아빠가 늘 밀양에 가서 살고 싶다고 했잖아. 기억나지?

아빠 없잖아.

신애 아빠가 없어도, 우리가 있잖아.

아빠 생각이 나서인지 아이는 말이 없다. 신애는 갑자기 아이를 와락 끌어안고 아이의 뺨에 자신의 뺨을 갖다 댄다. 아이가 엄마를 뿌리치려하자, 그녀는 더욱 얼굴을 붙이며 장난스럽게 말한다.



남편은 교통사고로 죽고 신애는 아들과 밀양으로 살러온다. 그 이유는 아빠가 생전에 원했기 때문이라는 것..그녀는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환기시킨다. 다음 신은 피아노학원을 열고 개업떡을 돌리는 장면..



7. 양장점(내부/낮)

신애 안녕하세요? 요 옆 <준피아노학원>에서 개업인사 왔어요.

양장점여자(떡을 받으며) 서울서 오셨다고예?

신애 벌써 아시네요.

양장점여자 손바닥만한 동네 아입니꺼, 여가.

(그녀의 시선은 무심한 듯 하면서도 신애를 유심히 관찰한다.)

신애예……(뭔가 어색해서 묻지도 않은 말을 한다.) 애 아빠 고향이 밀양이에요.

양장점여자 그래예?

신애 예.



이 맥락에서 신애는 남편을 사랑했다는 것, 그래서 죽은 다음에도 남편을 못 잊어 남편의 고향으로 일부러 살러 온 것으로 이해된다. 그녀는 그것을 아들에게도 환기시키고 심지어는 옆집 양장점 주인에게도 환기시킨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되면서 둘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람을 피우고 신애에게 폭력을 가하기도 했다는 것이 드러난다. 신애와 동생과의 대화 중..



20. 피아노학원(내부/밤)

신애 나도…… 그 인간 보고 싶어.

민기(잠시 말없이 앉아 있다가) 나 솔직히 누나 이해 못하겠어. 매형이 왜 그렇게 보고 싶어? ……그리고, 매형 고향이라고 여기 밀양까지 내려와 사는 건 또 뭐야? 매형……, 누나 배신하고 딴 여자랑 바람났었잖아.

신애가 눈물이 흐르는 채로 소리 내어 웃으며 동생을 쳐다본다.

신애 아냐, 임마. 그거 다 사람들이 잘못 안 거야. 준이아빠는…… 우리 준이랑 나만 사랑했어. 그런 사람 아니야.

민기 아니긴 뭐가 아냐? 제발 인정할 건 좀 인정해라.



신애는 남편의 불륜을 언급하기를 꺼리며 부정한다. 그녀는 그 가혹한 현실을 보기를 거부한다. 그래서 서로 사랑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알아주기를 원한다. 밀양은 안성맞춤이 아닌가? 아무도 그들이 사이가 나빴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곳이고 둘이 사랑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죽은 남편의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 얼마나 지극한 사랑의 징표인가? 이제 그녀는 스스로를 납득시킬 수 있게 되었다. "그거 다른 사람이 잘못 안거야. 준이 아빠는....우리 준이와 나만 사랑했어. 그런 사람 아니야'"라고 동생에게 역정을 낸다.

이것은 신애가 기독교에 그렇게 쉽게 빠져 들었는지를 보여주는 복선이기도 하다. 그녀의 고통의 해결방식은 고통 자체를 직면하고 그 해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고통 자체의 근원을 부정하는 것이다. 남편의 부정을 부인함으로써 남편으로 해서 생긴 고통을 해소한다. 나아가 서로 사랑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면 그것은 완벽하다. 밀양행은 그 마무리를 위한 소도구다. 그러나 고통의 원인을 부정하기 위해서 온 밀양에서 그녀는 더 큰 고통에 직면한다. 그녀의 유일한 삶의 근거인 아들 준이 유괴, 살해된 것이다.

그녀를 더 고통스럽게 한 것은 이 비극의 원인제공자가 어느 정도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돈 많은 여자처럼 행세하며 전원주택을 지을 것처럼 땅을 보러 다닌다. 그리고 준이가 다니는 웅변학원 원장 도섭에게도 좋은 땅 있으면 알아봐 줄 것을 부탁한다. 그러나 그녀는 달랑 6백여만 원의 예금 잔고를 갖고 있을 뿐이었다. 실제 땅을 살 여력도 안 되면서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자신의 결혼생활이 불행하지 않았으며 행복했다는 이미지를 다른 사람에게 주고 싶어 밀양에 왔듯이 자신이 가난하지 않으며 부자라는 이미지를 주고 싶어 허세를 떨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허세의 결과 웅변학원 원장 도섭은 그 돈을 갈취하기 위해 신애의 아들 준을 유괴, 살해한다.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고, 사랑하는 아들마저 살해당하는 비극 앞에 그토록 숨기고 싶었던 초라한 자신의 모습이 여지없이 폭로된다. 땅 속에서 끌려나온 지렁이가 바로 자신의 모습이다. 다음 씬은 지렁이를 보고 놀라는 장면...



93. 신애 집(내부/저녁)

신애 이제…… 죄송하지만 돌아가 주세요. 저 할 일이 많거든요.

말을 마친 그녀는 몸을 돌려 부엌 쪽으로 걸어간다. 사람들 선뜻 일어나지 못하 고 보고만 있다. 갑자기 부엌 쪽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들린다. 종찬이 놀라 달려간다.

종찬 와예? 신애씨, 와 그래예?

그러나 신애는 얼굴을 감싸진 채 계속 소리를 지르고 있다. 종찬이 싱크대 밑을 들여다본다.

종찬 지렁이네요, 지렁이…… 난 또 뭐라고……. (신애를 쳐다보며 짐짓 농담을 한다.) 와, 지렁이가 디기 놀랬겠다. 다시는 이 집에 안 오겠네.

얼이 빠진 듯 서 있던 신애는 갑자기 자리에 주저앉으며 울음을 터트린다. 그녀의 울음은 타는 듯이 맹렬하다. 불에 덴 아이처럼 울고 있는 그녀를 종찬이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 있고, 사람들도 보고 있다.



이제 어떻게 다시 땅 속으로 숨어들 것인가? 자신의 초라한 본체를 숨길 수 있을 것인가? 신애는 교회에서 그것을 발견한다.

아들의 장례식을 치른 다음...



63. 거리(외부/낮)

동사무소를 나온 신애가 휘청휘청 걷고 있다. 여전히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고, 흙먼지가 거리를 쓸고 지나간다. 물건들이 떨어지고 날리며 굴러간다. 그러나 아 무것도 의식하지 못하는 듯, 마치 누군가에게 떠밀리듯 걷고 있는 그녀의 표정. 어느 순간 그녀는 마치 딸꾹질하듯 끄윽끄윽 괴롭게 숨을 쉬고 있다. 그녀의 속 에서부터뭔가 치밀어 오르는 듯이.

그녀는 더 이상 걷지 못한다. 안에서부터 계속 뭔가 치밀어 올라 숨을 못 쉬게 한다. 그녀의 가슴 밑바닥에 뭉쳐져 있던 고통어린 그 무엇이 계속 치밀어 오르 는 것 같다. 숨을 쉬기 위해 그녀는 두 손을 무릎에 대고 몸을 구부리고 있다. 마치 토하려는 자세처럼. 그러나 헛울음 같은 고통스런 소리만 나올 뿐 숨을 쉴 수가 없다. 누군가 그녀에게 다가온다. 종찬이다.

종찬 신애씨, 와 그래요? 어데 아파요?

신애는 대답 없이 몸을 구부린 채 고통스럽게 안간힘을 쓰고 있다. 종찬은 어찌 할바를 모르고 그녀를 내려다 볼 뿐이다. 그녀는 괴롭게 고개를 쳐든다.

신애의 시점. 바람이 무섭게 불어대는 거리. 길 가운데 허공에 걸린 현수막 하나 가 금방 떨어질 듯 바람에 요동치고 있다. <상처 받은 영혼을 위한 기도회>라고 쓰인 부흥회 선전 현수막.

64. 부흥회 입구(내부/낮)

상가 건물의 2층에 있는 어느 교회의 입구에 신애가 들어선다. 몇 걸음 뒤에서 종찬도 따라오고 있다. 계단 좌우로 <상처 받은 영혼을 위한 기도회>를 알리는 현수막, ‘여러분을 환영합니다’라는 글귀 등이 붙어 있고, 교회 사람들이 계단을 올라 오는 신자들에게 전단지나 안내서들을 나눠 주고 있다. 교회 안에서는 성가를 연주하는 음악소리가 흘러나온다.

65. 부흥회(내부/낮)

연단 앞에서 젊은 밴드 연주자들이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기타와 베이스, 드럼과 키보드까지 갖춘 5인조 밴드. 부흥회라기보다 마치 작은 콘서트장 같은 분위. 기다. 그들의 뒤에 <성령의 기름 부어주소서>, 또는 <영혼의 상처 씻어주소 서> 등의 글귀가 적힌 현수막이 보인다.

음악에 맞춰 함께 찬송하고 기도하는 신자들의 모습이 다양하다. 손뼉을 치는 사람, 두 팔을 위로 쳐들거나 앞으로 내밀며 노래하는 사람, 머리를 깊이 숙이고 기도하는 사람 등. 안경을 들어 눈물을 닦는 여자, 눈을 감은 채 몸을 좌우로 일렁이는 중년 남자 등도 보인다.

그 가운데 신애가 이방인처럼 앉아 있다. 그녀는 자신이 이곳에 왜 와 있는지 조차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는 듯한 표정이다. 그녀의 뒷자리에 종찬의 모습도 보인다. 어색하기는 종찬도 못지않다.

카메라는 교회 뒤쪽에 고정되어 있다. 따라서 교인들의 뒷모습만 볼 수 있다. 교회 가운데 기둥이 있고, TV모니터와 스피커가 매달려 있다. 이제 밴드 연주는 끝나고 키보드의 장중한 배경음악 속에서 부흥목사가 기도를 이끌고 있다. 그는 연단에서 내려와 신자들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기도하고 있다. 부흥목사의 기도가 계속되는 동안 카메라 앞줄의 어느 중년여인이 몸을 앞뒤로 흔들며 서럽게 울고 있다.

부흥목사 우리의 마음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고통에서 일으켜 주 시는 하나님……. 당신의 그 귀한 사랑을 내 안으로 부어 주소서. 오! 하 나님. 오! 하나님……. 꽉 막혀있는 마음을, 뭉쳐있는 마음을 풀어주게 해주소서.

중년여인의 울음이 잦아드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앞쪽에서 누군가의 기침소리 가 들린다. 속이 꽉 막혀 답답해서 터져 나오는 것 같은 어느 여자의 기침소리. 이윽고 그 기침소리는 울음소리로 바뀐다. 너무나 절절한 울음소리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가슴 저 밑바닥에서 터져 나오는 것 같은 울음. 울음의 주인공은 자신의 속에서 부터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그 고통의 부르짖음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는 것 같다.

부흥목사 오, 하나님…… 오, 하나님……. 내가 마음의 고통과 상처로 인하여 통곡하오니 꽉 막혀 있는 마음을, 뭉쳐있는 마음을 풀어주소서. 슬픔에 젖어 있는 마음을,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을, 하나님이여…… 치 유해주소서.

비로소 우리는 그 울음의 주인공이 신애임을 알 수 있다. 그녀는 두 손을 가슴에 꼭 붙인 채 온몸으로 소리 내며 통곡하고 있다. 가슴 밑바닥까지 뭉쳐져 있던 그녀의 슬픔과 고통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뒤에 앉은 종찬이 어찌 할 바를 모르고 그녀를 보고 있다. 목을 놓아 울고 있는 신애의 뒤로 목사가 다가온다. 키보드의 음악과 함께 이제 목사는 노래로 기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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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목사
사랑합니다. 나를 자로 삼으신 주

사랑합니다. 나를 자로 삼으신 주

내 부르짖음 들으시고 가자하심을

영원히 주 찬양합니다……

목사는 기도를 계속하면서 신애의 머리에 손을 얹는다. 신애, 천천히 고개를 들어 허공을 쳐다본다. 울음이 약간 진정이 되는 듯하다. 자신의 속에 있는 것을 다 비어낸 것 같은 텅 빈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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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신앙 속으로 숨어든다.. 이 울부짖음은 이제 불쌍한 여인의 초라한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신과의 만남이라는 위대한 모습으로 고양된다. 교회에서 맞게 된 그 신애의 감응이 진정한 신과의 만남인지, 고통이 만들어낸 환상인지 가려내는 까다로운 절차가 필요하지만 한국교회는 그것을 개의치 않는다. 그것은 대단한 종교적 행위로 격상되고 신애는 여기서 다시 지렁이가 되어 땅 속으로 숨어들 수 있는 여지를 얻게 된다. 교회는 그녀가 하느님을 만났다고 선언한다. 신애의 간증에 대해서 전도사가..



67. 피아노학원(내부/낮)

전도사 우리 이신애 자매님은 하나님을 만났어요. 하나님을 만나고 성령을 받았어요. 고마우신 우리 주님께서 그런 은혜를 주셨어요. 고통 받는 어린 양에게 구원을 주셨어요.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꺼?

교인들 아멘!

전도사 하나님은 지금 이곳에 계십니다. 우리와 지금 이곳에 함께 계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지금 이곳에 계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성령 안 에서 모든 것을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그렇게…… 253장 찬양하겠습니 다. 253장, 그런 마음을 가지면서, 손뼉을 치면서 찬양하겠습니다.  



이제 신애는 자신의 불행을 부정하며 스스로 행복하다고 강변한다. 교회는 그것을 찬양하고 그것은 그녀의 현실부정을 더 강화한다.



70. 양장점(내부/낮)

양장점 안에 동네 가게 아줌마들 몇 명이 모여서 떡볶이 등 주전부리를 하고 있 다. 신애가 그들에게 전도를 하고 있는 중이다.

신애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 거예요. 믿음을 가지면요, 살면서 어떤 어려움이나 고통이 와도 행복할 수 있어요. 고난이 와도 감 사할 수 있거든요.

아줌마1 그래, 준피아노 보마 나도 하나님 함 믿어보고 싶기도 해. 얼굴이 확 밝아졌어. 딴 사람 맹쿠로…….

신애 그럼요, 절 보세요. 제가 증거예요. 제가 지금 얼마나 행복한데요?

양장점여자 그런데 준피아노. 나는 솔직히 잘 이해가 안가거든. 자꾸 행복하다, 행복하다 카는데, 뭐가 행복하단 말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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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애
예, 그건요…… (미소를 짓는다.) 그냥 느끼는 거예요. (가슴에 손을 얹으 며)꼭 연애하는 거 같아요. 연애를 하면 그렇잖아요, 누가 나를 사랑해주고 생각해준다는 느낌 때문에 행복하잖아요.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에 사랑하는 사람이 생각나고 행복해지잖아요. 꼭 그런 감정이예요. 하나님이 절 사랑하고 지켜봐 주신다는 느낌…… 그걸 순간순간 너무 분명히 느끼고 그게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양장점여자(탄식처럼) 아, 나도 연애 한번 해 봤으마 좋겠다!

신애 그럼 교회 나오세요. 남편 눈치 안보고 마음 놓고 연애하실 수 있어요.

자신의 말이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운지 신애가 소리 내어 웃고, 다른 아줌마들도 웃는다.


자신의 결혼생활이 불행하지 않았으며 행복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까지 납득시키기 위해서 밀양행을 감행했듯이 이제 아들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불행하지 않으며 행복하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기 위해서 범인을 용서해 주겠다고 선언한다. 그것은 신앙의 힘으로 까지 고양되면서 엄청난 이미지 업을 가져다준다. 그녀 스스로 거기에 도취되기 시작한다. 교회는 거기에 힘을 보태고...



75. 까페(내부/낮)

오집사(꽃다발을 신애에게 건네며) 축하해요.

사람들의 박수 속에 꽃다발을 받으며 신애는 채 말을 잇지 못한다.

신애……예뻐요.

케이크의 촛불을 불어 끈다. 다시 박수.

신애(감정을 억제하려 애쓰며) 감사합니다. 이렇게 예쁜 꽃도 주시고…… 저는 오늘이 제 생일인지도 몰랐는데……. (사이) 저……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어요. 제가 여기 오면서 결심한 게 있어요. (잠시 말을 끊고 사람들을 둘러본다.) ……저 이번 주일에 교도소로 면회를 갈려고 해요.

오집사 교도소를 와? 누가, 아는 사람이 교도소에 들어갔어요?

신애(미소를 지으며) 예, 제가 잘 아는 사람이 지금 교도소에 있지요. 우리 아이죽인 범인이요.

사람들은 뭐라고 할 말을 잃은 표정이다.

김집사 그 사람…… 범인을 와 면회하려는데?

신애 용서해주려고요. 내게 너무 큰 고통을 안겨준 사람이지만…… 하나님이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라고 했잖아요.

신도2 이신애씨 정말 대단하다!

사람들은 쉽게 더 말하지 못한다. 사이.

김집사 그런데 꼭 면회를 가서 용서해줘야 하나?

신애 그럼요. 내가 교도소에 직접 찾아가서 그 사람한테 내 용서를 말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게 중요하죠.

신애의 눈빛과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다. 사람들은 말없이 그녀를 본다. 문득 오집사가 감동한 듯이 손을 뻗어 신애의 손을 잡고 노래 부르기 시작한다.

오집사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76. 목사 사무실(내부/낮)

소파에 신애와 목사가 마주 앉아 있다.

목사 용서한다는 것…… 쉬운 일 아입니다. 하나님 말씀 중에 우리가 제일 지키기 어려운 것이 내 원수를 용서하라는 말씀이예요. 그런데, 우리 자매께서는 그 고통을 겪고서도 이제 직접 용서까지 하겠다니 참 어려운 결심을 했습니다.

신애 사실은 오래 생각한 일이예요, 목사님. 제가 주님을 받아드리고부터…… 제게 너무도 고마우신 주님을 위해 난 무얼 해야 되나 하고 늘 생각했거든요.

목사 이신애씨 교도소 갈 때 하나님이 따라가실 낍니다. 자, 함께 기도하십시 다.



그러나 그 용서가 가짜라는 것은 다음 씬이 암시하고 있다. 신애가 피아노학원의 애들을 데려다 주는 도중 곡목 길에서 맞고 있는 도술의 딸 정아를 본다. 한참 들여다보다가 그녀를 구해주지 않고 그냥 간다. 도술을 용서하겠다는 신애의 결심과는 앞뒤가 맞지 않다. 그것은 그녀의 용서행위가 도술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의 불행을 부정하기위한 방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74. 도로(외부/낮)

신애 안녕!

아이들도 손을 흔든다. 차가 출발하기 전에, 도로에서 안으로 들어간 골목에 십대 아이 두어 명이 보인다. 남자 아이가 여자아이를 때리고 있는 듯하다.

조금 가다가 갑자기 차를 정지시키는 신애. 다시 차를 천천히 후진시킨다.

차창 너머로 골목 안쪽의 광경이 보인다. 남자아이가 여자아이를 때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여자아이는 정아이다. 그녀는 별 저항도 하지 못하고 맞고만 있 다. 남자는 씬18의 그 아이고, 그 옆에는 친구인 듯한 다른 사내아이가 서서 보고만 있다.

그들을 보고 있는 신애의 얼굴.

무자비한 폭력은 계속된다. 정아가 더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른다. 그러다가 정아는 신애 쪽을 본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다.

신애는 말없이 보고만 있다.

남자는 간간히 뭐라고 말하면서 계속 때린다. 발길질을 하기도 한다. 고통스런 비명소리를 내고 맞으면서도 정아는 계속 신애를 보고 있다.



3
. 신애는 하느님을 받아들인 신앙의 증거로 자식을 죽인 범인(도섭)을 용서하기로 고 교도소를 찾는다. 그러나 신애는 범인이 자신이 용서를 베풀기 전에 이미 주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84. 접견실(내부/낮)

작은 구명이 송송 뚫린 플라스틱 창 너머로 죄수복을 입은 한 남자가 교도관과 함께 들어선다. 박도섭이다. 그는 자리에 앉아 굳은 얼굴로 면회객을 본다. 사이.

박도섭을 쳐다보는 신애의 얼굴. 잠시 말없이 앉아 있다가 이윽고 입을 연다.

신애……얼굴이 좋네요. 생각보다.

박도섭 죄송합니다.

신애 아니에요. 건강해야지요.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아무리 큰 죄를 지은 죄인이래도 하나님은 건강을 주시잖아요.

말없이 신애를 바라보는 박도섭. 그녀의 말이 좀 뜻밖인 것 같은 표정이다.

신애 이 꽃…… (손에 들고 있던 꽃을 들어 보인다.) 오다가 길가에 핀 걸 꺾어 왔어요. 이 안에선 꽃 보기 힘들잖아요. 예쁘죠? 이 예쁜 꽃도 하나님이 우리한테 주시는 선물이에요. 내가 오늘 여기 찾아온 건요…… 하나님 은혜와 사랑을 전해주러 왔어요. 나도 전에는 몰랐어요. 하나님 계시다 는 것도 절대는 안 믿었어요. 내 눈에 안 보이니까 안 믿었지요. 그런데 우리 준이 때문에……

그녀는 잠깐 감정을 억제하려 한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려 노력한다.

신애……하나님 사랑을 알고 비로소 마음의 평화를 얻고 새 생명을 얻었어요. 얼마나 감사한지, 그 분의 사랑과 은혜를 느낄 수 있어서 얼마나 행 행복한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내가 이곳에 찾아온 거예요……. 그 분의 사랑을 전해주기 위해서요.

박도섭 고맙습니다.

신애가 박도섭을 쳐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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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도섭 정말로 고맙습니더. 준이 어머니한테 우리 하나님 아버지 이야기를 듣게 되이…… 참말로 감사합니다. 내 기도가 통했는갑심더.

박도섭의 그 말이 신애를 놀라게 한다.

 

박도섭 저도 믿음을 가지게 되었거든예. 여, 교도소에 들어온 뒤로…… 하나님을 가슴에 받아들이게 됐심더. 하나님이 이 죄 많은 인간한테 찾아와 주신거지예.

신애는 말없이 박도섭을 쳐다본다. 박도섭은 믿음을 가진 사람답게 아주 평화롭고안정되어 보인다.

신애(이윽고) ……그래요?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박도섭 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꺼? 하나님이 저한테, 이 죄 많은 놈한테 손 내밀어 주시고, 그 앞에 엎드리가 지은 죄를 회개하도록 하고, 제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더.

신애 하나님이…… 죄를 용서해주셨다고요?

박도섭 예! 눈물로 회개하고 용서 받았습니더. 그라고나서부터 마음의 평화를 얻었심다. 잠도 잘 자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기도하고…… 하루하루가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하나님한테 회개하고 용서받았으이 이 렇게 편합니다, 내 마음이. (가슴에 손을 얹는다.)

신애…….

박도섭 요새는 내가 기도로 눈 뜨고 기도로 눈 감습니더. 준이 어머니를 위해서 도 기도 마이 합니더. 빼놓지 않고 늘 합니더. 죽을 때까지 할 낍니더. 그런데인제 이래 만나고 보이, 하나님이 역시 제 기도를 들어주시는 갑심더.

언제부터인가 신애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


신애는 깊은 충격에 빠져 혼절하고 만다.
목사를 비롯한 몇 신도들이 신애를 위로하기 위해 모였다.



93. 신애 집(내부/저녁)

신애의 집 마루에 여나믄 명의 교인들이 앉아 있고, 조금 떨어져서 신애가 앉아 있다. 목사를 비롯해 김집사, 오집사, 박명숙도 있고, 종찬의 모습도 보인다. 무 거운 분위기다.

오집사 우리 주님도 이선생을 이해하실 끼다. 이선생도 주님 말씀 실천할라꼬 노력 안했나? 그 원수 같은 범인을 용서할라고 교도소에까지 안 찾아갔 나?

목사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참 어려운 겁니다. 주님의 뜻대로 용서하고 싶어서…… 용서해 줄라꼬 만났는데, 막상 용서가 안 되고 마음이 더 괴로 워진 것이지요. 이런 때일수록 우리 주님에 대한 믿음으로 이겨내야 합니 다.

신애…….

신애는 여전히 말이 없다. 종찬이 그런 그녀를 안타까운 듯 쳐다본다.

목사(사람들을 돌아보며) 우리 이신애 씨를 위해 함께 기도하십시다. 기도 속에 서 해답을 찾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자 다같이 기도하겠 습니다.

모두들 고개를 숙이고 기도를 시작한다.

목사 우리를 사랑하고 구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여기 니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당신의 뜻을 지키기 위해 나섰던 가련한 어린 양이 그 마마음의 슬픔과 고통을 이기지 못해 참으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이 가 가련한 영혼에게 구원의 손길을 주시고 죄인을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는 믿음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신애(갑자기 소리친다.) 용서요? 어떻게 용서해요?

모두들 놀라 그녀를 쳐다본다.

신애(자리에서 일어나며)용서하고 싶어도 난 할 수가 없어요! 그 인간은 이미 용서를 받았대요! 하나님한테! 그래서 마음의 평화를 얻었대요!

김집사(신애를 진정시키려 붙들며) 아이고, 와 이라노? 목사님 기도 중에……. 그 래 하나님이 용서하셨으이까네…… 이선생도 용서해야지.

신애 이미 용서를 받았는데, 내가 어떻게 다시 용서할 수 있어요? 내가 그 인간을 용서하기도 전에 어떻게 하나님이 먼저 그를 용서할 수 있어요? 난 이렇게 괴로운데 그 인간은 하나님 사랑으로 용서받고 구원 받았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왜? 왜애?

모두들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녀를 쳐다보고만 있다.

신애 이제…… 죄송하지만 돌아가 주세요. 저 할 일이 많거든요.



하느님에 대해 분노한 신애는 믿음을 철회하고 그 불합리한 신을 조롱하고 거부한다. 그녀는 부흥회 기도회 집회에 가서 "거짓말이야"라는 김추자의 노래를 틀고, 강장로를 유혹해 자신을 겁간하게 함으로써 10계명을 조롱한다.



98. 공터(외부/저녁)

비가 내리고 있는 어느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공터에서 부흥회가 열리고 있다. 이삼 백 명의 신자들이 모여앉아 기도를 하고 있다. 더러 우산을 쓰고 비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사람들의 뒤로 우산을 쓴 신애가 다가온다. 목사와 청중들의 소리가 들려온다.

노목사 할렐루야!

청중들 아멘!

노목사 할렐루야!

청중들 아멘!

노목사 네. 우리 하나님께 한번 더 찬양과 영광의 박수를 올리겠습니 다.

박수를 치는 사람들. 추적거리는 빗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목사의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서로 몸을 밀착한 채 우산을 쓰고 함께 기도하는 젊은 연인들, 눈을 감고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 등. 차가운 빗발에도 신앙의 간절함이 느껴진다.

그녀는 기도하는 사람들을 보며 연단 앞쪽으로 걸어간다. 연단 위에는 ‘밀양지 역 합동기도회’란 글씨가 보이고, ‘새롭게 하소서’ ‘믿음으로 인한 변화’ 등의 현수막도 보인다. 목사들로 보이는 몇 사람들이 연단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고, 신애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도 보인다.

나이 지긋한 목사 한 분이 설교를 하고 있다.

노목사 여러분! 성령님이 붙들지 않는 인생 비참합니다.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히지 않는 인생 맨날 패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에 충만해야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합당하게 순종하며 살 수 있어요. 그것에 자유함이 있고, 은혜가 있고, 복이 있어요.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의 관심이 오직 성령님께로 집중되기 를 축복합니다.

청중들 아멘!

노목사 기도 할 때도, 생활 속에서도, 봉사할 때에도, 성령님과 함께, 성령님을 위하여, (손을 들며) 성령님 안에서!

이게 우리가 사는 방법이란 거죠. 그러므로 오늘 이 숲 속에서 이 성령님의 놀라운 일들을 아시고 성령 충만을 받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청중들 아멘!

노목사 이 시간에 우리 함께 기도하겠어요. 무릎 꿇고 하겠어요, 땅과 가까이.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오늘 이 시간 능력으로 역사하 시옵소서. 말씀으로 역사하시옵소서. 지혜로 역사 하시옵소서, 은사로 역사 하시옵소서, 열매로 역사 하시옵소서, 성령 충만 하도록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순종하며 살겠습니다. 포기하며 살겠습니다. 성령님의 명령을 따라 살겠습니다.

순종의 삶을 선포하고 고백하는 기도, 여러분 이 4가지가 성령 님의 충만을 받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이 4가지의 순서를 쫒아서 이 시간에 다 같이 두 손을 들고, 또 팔이 아프면 내리기도 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오늘 이 시간 간절히 성령 충만을 선포 하고 외치는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겠습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살아계신 성령님 감사합니다. 찬양합니다…….

찬송 “약할 때 강함 되시네” 라는 밴드 연주와 함께 청중들 통성 기도를 시작한다.

사람들 틈에 서서 연단을 보던 신애, 연단 뒤쪽으로 걸어간다.


99. 천막 안(내부/저녁)

무대 뒤에 설치 된 천막 안. 행사에 필요한 여러 가지 기자재와 도구가 보이고, 한쪽에는 오디오 기계도 있다. 천막의 문이 열리고 신애가 안을 들여다본다.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주위를 살핀 뒤 안으로 들어온다. 오디오 기계 앞으로 다가와서 기계를 살핀다. 그리고 가방 안에서 뭔가를 꺼낸다. 음반가게에서 훔 쳤던 CD다. 오디오 플레이어를 열고 CD를 넣는다.


100. 공터(외부/저녁)

연단 위에서 노목사가 중간 기도를 하고 있다. 곁에서 진행요원이 목사가 비를 맞지 않도록 우산을 들고 있다.

노목사 오, 아버지여. 성령의 능력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 합니다. 할렐루야! 오늘 이 자리에 온 한 영혼 한 영혼 가운데 기름 부어 주옵소서.

청중들 아멘!

노목사 역사 하시옵소서.

청중들 아멘!

갑자기 스피커가 혼선이 되는 듯한 잡음이 들린다. 노목사는 잠깐 당황하지만 설교를 계속한다.

노목사 말씀 하시옵소서.

청중들 아멘!

노목사 치유 하시옵소서.

청중들 아멘!

다시 스피커가 귀에 거슬리게 울린다. 그리고 갑자기 음악의 전주가 시작된다. 노목사는 당황하면서도 목소리를 높여 기도를 계속한다.

노목사 회복시켜 주옵소서.

청중들 아멘!

그러나 목사의 설교는 스피커에서 울려퍼지는 김추자의 ‘거짓말이야’란 노래로 덮여진다.

노래(E)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당황하는 노목사, 놀라 쳐다보는 신도들. 진행요원들이 무대 뒤쪽으로 달려간다. 일부 신도들은 놀라 쳐다보지만, 많은 신도들은 기도에 열중하고 있다. 노목사도 기도를 계속한다. 그 위로 천연덕스럽게 울려 퍼지는 스피커의 음악소리.

노래(E) 사랑도 거짓말…… 웃음도 거짓말…… 그렇게도 잊었나…… 세월 따라 잊었나…….

우산을 쓴 채 소나무 숲을 걸어 나오는 신애. 그녀의 눈빛이 기묘하게 빛난다. 가끔 뒤를 힐끔거리기도 한다. 여전히 음악은 계속되고 있다. 문득 그녀의 걸음 이 늦춰진다. 마치 속에서부터 뭔가 치밀어 오르는 듯 괴롭게 숨을 쉰다. 한 발 짝씩 고통스럽게 걸어가면서, 그녀는 계속 숨을 쉬려고 애를 쓴다. 



다음은 강장로를 유혹하는 씬... 신애, 강장로와 부둥켜안은 상태에서 하늘을 향해서 "잘 보이느냐"고 조롱한다.



104. 은혜약국(내부/낮)

조제실 유리창을 통해 강장로가 뭔가 이상한 듯 바깥을 내다본다.

약국 밖에서 신애가 약국 안을 보고 서 있다. 그 느낌이 좀 묘하다. 핸드폰 울리는 소리. 신애, 핸드폰을 열어보더니 곧 끊어버리고 약국 안으로 들어선다.

신애 장로님!

조제실 안에서 약사복을 입은 강장로가 나온다.

강장로 오랜 만이시네, 이선생……. 교회 안 나오시이 얼굴 보기도 힘드네요.

신애 집사님은 안계시네요. 교회 가셨나?

강장로 아니, 장 보러 갔어요. 오늘 우리 집에서 철야기도회 하는 날이라서……

신애 잘됐다. 나 장로님한테만 상담할 게 있어서 왔는데……

그녀가 강장로 앞으로 바싹 다가온다. 판매대를 사이에 두고 그녀는 그를 쳐다 보며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고 웃는다.

신애 아이…… 어떡하지?

강장로(좀 당황해서) 무슨 상담할라고?

신애 아이…… 창피해서 어떻게 말하지? 내 몸이 좀……이상해요……. 가슴이 막 울렁울렁하고요…….

강장로 어데 체했나?

신애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아이 참 어떻게 설명해야 되지? 있잖아요…… 내 몸이요…… (창피한 듯 수줍게 몸을 꼰다.) 이야기 할려니까 너무 부끄러워요…….

잠시 두 사람은 말없이 쳐다보고 있다. 그녀가 한숨을 내쉰다.

신애(속삭이듯) 장로님 저 드라이브 좀 시켜 주실래요?


105. 차 안(외부/낮)

강장로가 차를 운전하고 있고, 옆자리에 신애가 앉아 있다.

운전을 하는 강장로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다. 이윽고 그가 시선을 아래 쪽으로 보낸다. 그의 시선을 따라 카메라, 틸트 다운하면 신애의 손이 그의 허벅지를 어루만지고 있다. 그녀는 강장로를 빤히 보고 있다. 그는 몹시 당황해서 어 찌할 바를 모른다.


106. 공터(외부/낮)

국도변에 위치한 어느 한적한 공터. 강장로의 차가 들어와 선다.

강장로가 신애를 껴안고 성급하게 입을 맞춘다. 아무래도 그는 이런 경험이 별로 없는 듯하다. 마치 오래 가두어둔 욕망이 걷잡을 수 없이 솟구치듯 남자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여자의 입술을 탐닉하며 그의 손은 여자의 가슴을 더듬는다.

신애(손으로 밀어내며) 잠깐만…….

강장로(숨을 헐떡이며) 와아?

신애 우리 나가서 해요. 여기 너무 불편해. 답답하고…….

신애를 쳐다보는 강장로. 차 문을 열고 그가 먼저 내린다. 그는 약간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그리고 뒷 트렁크로 가서 깔개를 꺼내 나무 밑 평평한 곳을 골라 깐다. 뒤에서 신애가 다가와서 남자를 등 뒤에서부터 끌어안는다.

신애 나오니까 좋잖아요……. 그죠?

그녀는 남자의 등에 얼굴을 붙이고 두 손으로 남자의 가슴을 어루만진다. 그 행동이 남자를 당황하고 얼떨떨하게 만들지만, 분명 흥분시키고 있다. 그녀의 손이 아래로 내려간다.

신애 해요, 빨리…….

신애가 먼저 펼쳐진 깔개에 눕는다. 카메라,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틸트 다운하 면서 거꾸로 된 여자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준다. 번쩍거리는 은박깔개 위 에서 그녀는 하늘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 남자의 머리가 화면 안으로 들어온 다. 남자는 아직도 주저주저 하며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듯하다. 신애가 와락 남자의 얼굴을 자신의 가슴에 끌어당긴다. 그제야 남자는 신애의 가슴을 헤치고 입술을 가져간다. 그녀는 몸을 뒤틀며 흥분에 들뜬 숨소리를 연기하고, 그것이 남자의 욕정을 재촉한다. 남자의 입술은 정신없이 여자의 가슴을 더듬는다. 그동안 그녀는 여전히 하늘을 응시하고 있다.

신애(마치 은밀한 농담이라도 하듯, 입 모양으로만) 보여?

웃음인지 울음인지 그녀의 입주변이 바람에 문풍지가 떨 듯 여리게 떨린다.

신애(다시 또박또박 끊어서 입 모양으로만) 잘, 보, 이, 냐, 구…….

아무래도 상대방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것 같은지 비로소 입 밖으로 말을 내 뱉는다.

신애 잘, 보, 이, 냐, 구……!

문득 남자의 움직임이 멈춰진다. 신애가 남자를 내려다본다. 남자는 그 자세대로 꼼짝 않고 있다.

신애 왜요?

강장로(고개를 쳐들어 신애를 보며) 내가 지금 잘못하고 있는 거지요? 이라마 안 되는데……

신애(장로의 얼굴을 끌어당기며) 괜찮아요…….

강장로 (신애의 손을 떼어내며) 안되요. 이라지 맙시다! 우리 지금 해서는 안될 짓을 하고 있어요.

그는 신애의 가슴을 여미어준다. 그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다.

강장로  내가…… 내가 잘못했심다, 이선생. 내가 너무 큰 잘못을 했어요……. 일어납시다. 하나님이 보고 계신데……

그는 신애 앞에 거의 무릎을 꿇고 있다. 신애는 그대로 누운 채 남자를 본다. 그리고 하늘을 쳐다본다. 신애가 하늘을 노려보더니 갑자기 퉤, 침을 뱉는다. 그녀의 표정이 점점 사나와지며 증오와 적의에 가득 차 다시 침을 뱉는다.

그러나 남자는 신애의 행동을 의식하지 못하는 듯 신애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울먹이고 있다.

강장로 일어납시다, 이선생……. 내가 잘못했어요…….

머리 위 숲에서 새소리들이 수다스럽게 흩어진다.


신애는 급기야 자살을 시도한다.



114. 신애 집(내부/밤)

마당에서 보는 어두운 신애의 집. 준의 방만 불이 켜져 있고, 열린 방문으로 흘러나온 빛이 마루에 드리워져 있다.

준의 방에 앉아 있는 신애.

사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의 불을 켠다. 부엌과 안방의 불도 켜고 화장실의 불도 켠다. 피아노학원의 불까지 켠다. 온 집안의 불을 환하게 밝히고 나서 소파 앞 바닥에 앉는다. 탁자에는 과일 접시에 사과 두어 개가 놓여 있고, 그 중에는 깎다만 사과도 하나 있다. 갑자기 시장기라도 느낀 것처럼 그녀는 과도를 들어 깎다만 사과를 베어 먹는다. 사과를 사각사각 씹는 그녀의 얼굴로 카메라가 느리게 다가간다. 허공을 바라보는 두 눈의 동공에 물기가 맺힌다. 한 순간 그녀의 몸이 굳어진다. 고통을 참는 듯 얼굴에 경련이 스쳐간다. 그러나 그녀는 입술을 실룩거리며 억지로 웃음 짓는다.

신애(여전히 허공을 보며 속삭이듯) ……봐? 보여?

그러나 허공을 향한 그녀의 시선이 차츰 떨리기 시작한다. 마침내 그녀는 고개 를 숙여 아래를 내려다본다. 사이. 그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핏방울이 바닥에 떨어진다. 칼로 베어진 그녀의 가는 손목에서 피가 흘러나와 잠옷을 적시고 마루 바닥 위로 떨어지고 있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피아노학원으로 나가고, 카메라가 그녀의 뒤를 따라간다. 핏방울이 계속 떨어지고 있다. 그녀는 정신없이 피아노 학원 문을 열고 나간다. 어두운 거리에 서서 그녀는 신음처럼 소리를 내 뱉는다.

신애……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길 건너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녀를 본다. 지나가던 차 한 대가 멈추고 운전자가 내려서 다가온다. 그녀는 피에 젖은 손을 쳐든 채 어린애처럼 계속 흐느끼고 있다.

신애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기독교의 하느님에 대한 마지막 신성 모독인 자살을 기도한다. “사과”가 창세기의 타락의 상징인 금단의 열매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사과 깍는 장면도 주의깊게 배치된 것 같다. 손목을 그으면서 하늘을 향해 “봐? 보여?”라고 중얼거린다. 하느님에 대한 항의성 자살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 다음 장면이 요해불가다. 갑자기 왜 길거리로 튀어나와 “살려주세요!”라고 외쳤을까? 갑자기 죽음이 겁이 나서? 그럴 수도 있으나 이런 해석은 전체 극의 구도를 용두사미로 만들어 버린다. 여기에는 분명 어떤 의미가 있다. 나는 여기에 또 한번의 급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뜰로 햇볕이 비춰드는 마지막 장면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신애가 처음에 도섭이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하느님은 죄 없는 자신을 그러한 고통 속으로 몰아넣은 도섭에게 응당의 벌을 내려야 한다. 자신의 기도를 듣고 그 고통을 어루만져준 그 하느님이 도섭의 고통도 어루만져 주었다니! 나는 피해자고 그 놈은 가해자다! 기도하고 용서를 구하면 누구나 다 받아 주고 용서해 주는 그런 헤픈 하느님이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나에게 하느님이 다가온 것은 나의 고통이 특별해서가 아니었다. 어중이떠중이에게도 다 응답하는 하느님! 심지어는 살인을 저지른 놈에게도 친절히 응답하는 하느님이라니? 신애 하느님에 대한 분노에 치를 뜬다.

이게 어떤 분노일까? 이런 경우와 흡사하지 않을까? 내가 늙은 노모를 모시고 있는 아들이라고 하자. 나에게 형이 하나 있다. 이 형은 전답을 다 팔아먹은 다음 소식이 끊겼다. 이 형이 근 20년 만에 거지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노모는 이 아들을 내치지 않고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형에 대한 나의 냉정한 태도를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며 못마땅해 하며 나무란다. 노모는 어느 손가락 하나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있겠느냐며 자신을 봉양해온 아들이든 자신을 버린 아들이든 똑같은 사랑을 준다. 이 노모에 대한 동생의 기분은 어떻겠는가? 형보다 오히려 노모에 대한 미움이 솟구치지 않을까? 신애의 기분이 바로 이렇지 않았을까? 그는 일부러 노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을 골라서 할지 모른다. 신애가 바로 하느님에게 했듯이...분하고 원통한 마음에 목숨을 끊으면서 항의한다. 그러나 신애가 손목을 긋는 순간...갑자기 무엇인가 잘 못되었다는 생각이 뒷통수를 친다.

내가 과연 도섭을 용서하려고 교도소에 갔는가? 그렇다면 하느님이 먼저 용서했다고 분하고 원통할 일이 무엇이 있는가? 용서하러 간 것이 아니다. 내가 얼마나 행복한가를..네 놈을 용서해줄 만큼 내가 행복하다는 것을 놈에게 시위하러 간 것이다. 남편을 잃고, 자식을 잃었지만 나는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여자가 아니야. 나는 하느님이 선택하신 특별한 사람이야. 놈이 자신을 그렇게 보아 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나 어처구니없는가? 그 놈도 행복하다니?? 잠도 잘 자고 마음도 편하고 하루하루가 감사하다고???

신애에게서 용서는 무엇인가? 그것은 용서로 포장된 증오다. 칼로 손목을 긋는 순간 그 깨달음에 도달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하느님을 받아들이면서 느꼈던 그녀의 행복은? 행복으로 포장된 불행이 아니었을까? 보이기 싫은 불행을 은폐하고 심지어는 행복으로 포장할 수 있는 기회를 교회가 제공한 것이 아닐까? 그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다. 그녀는 진정 하느님을 만난 적이 없다. 교회에서의 그 통곡은 내면에서 터져 나오는 슬픔이었고 그 슬픔을 하느님으로 해석해주는 종교가 있었을 뿐이다. 고통이 크면 클수록 하느님이라는 가면에 더 몰입하게 되는데 이것이 혼자의 경우에는 일종의 정신적 질환이라는 것이 금방 드러난다. 그러나 이것이 교회라는 제도를 통해서 다른 사람을 통해서 인정받게 되면 영적 능력으로 인정받게 되고 그것은 자신마저도 속이게 된다.

이것이 신애에게 가능하다면 어떻게 도섭이라고 가능하지 않겠는가? 작년 도섭은 웅변학원이 잘 되지 않자 미술, 보습을 함께 할 수 있도록 학원 규모를 늘렸다. 이 바람에 최근 빚에 쪼들리고 있었다. 이 도섭에게 신애가 지나가는 말로 “ 좋은 땅이 있으면 집 짓고 살 거예요. 그래서 요즘 땅 보러 다녀요. 원장님도 좋은 땅 혹시 아시면 소개 좀 해주세요.”라고 말한다. 도섭은 이 여자가 돈이 좀 있구나 생각하고 그의 아들 준을 유괴하고 급기야는 죽이고 만다. 유괴범에다 살인자가 된 것이다. 자신이 저질러놓은 이 엄청난 현실 앞에 망연자실했을 것이다. 후회하고 후회해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그 때 교회가 손을 내민다. 그는 이 참혹한 현실을 잊기 위해 결사적으로 기도에 매달린다. 하느님이 손 내밀어주시고 그 앞에 엎드려 지은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받는다. 그러나 그게 진짜 하느님일까? 자다가 목이 마르면 꿈속에서 물 마시는 꿈을 꾼다. 원망충족이라는 것.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는 것을 알기에 용서받는 몽상을 하고 그 원망이 절실해지면 그 원망이 하느님의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그는 그것을 진짜의 하느님이라고 굳게 믿는다. 교회는 회개한 그에게 쉽게 면죄부를 주고 그는 더욱 독실한 크리스찬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죄책감과 회한, 그리고 공포가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만들어 놓은 허깨비에 지나지 않는다.

신애가 하느님에 대한 항의로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손목을 긋는 순간 놈은 하느님이 이 놈을 용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 심리적 과정을 재구성해보면...

과거 기도에서 느낀 나의 행복의 느낌 자체가 사실 가짜가 아닌가? 불행하지 않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나 자신마저 속인 것이 아닌가? 그를 용서할 수 있다는 나의 느낌도 가짜가 아닌가? 너를 용서할 수 있을 만큼 나는 행복하다고 나 자신을 속이기 위한 것이 아닌가? 놈이 행복하다고 하는 순간 나는 행복으로 위장해 놓았던 비참한 나를 직면하게 된다. 나는 전혀 행복하지 않다. 그리고 자식 잃은 고통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놈은 나의 가면을 여지없이 벗겨 버렸고 나는 일광 속에 나뒹굴어진 지렁이처럼 밝은 일광, 촘촘한 햇빛 이른바 “밀양” 속에 나뒹굴어졌다. 더 이상 숨을 수 없는 “나”는 비명을 지른다. 이 긴 날을 이 고통 속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아득, 진실로 아득하기만 하다.

그러나 이 고통스러운 깨달음 속에 무엇인가 위안거리가 있다. 나나 마찬가지로 저 놈의 “행복감”도 가짜다. 스스로의 죄책감이 만들어 놓은 허깨비다. 처음 그런 놈에 까지 손잡아주고 구원을 약속하는 하느님에 분개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 놈을 용서해준 적이 없다. 하느님이 나의 고통에 대해 손잡아준 적이 없는 만큼 그 놈의 죄책감에 대해 손잡아준 적이 없는 것은 확실하다. 그 놈은 살아있는 그 긴 날 동안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고 그 놈에게는 그것을 벗어날 탈출구는 없다. 나는 이제 전혀 행복하지 않지만 그 놈이 나 보다 더 불행하다는 것이 조금 나를 행복하게 한다.

하나님이 그를 용서함으로써 나는 분개했고 하느님에 대한 나의 나름대로의 응징을 시작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전혀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아뿔사!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하느님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서 자살하기 위해 내 손목을 칼로 그리고 있지 않은가? 오! 노! 노! 그녀는 피를 흘리면서 거리로 뛰쳐나가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라고 소리지른다.



4
. 이 사건으로 신애는 몇 개월 동안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퇴원 후 그녀가 처음 한 것은 미장원에 들려 머리 자르는 일. 그런데 거기서 만난 미용사가 공교롭게도 도섭의 딸인 정아다. 그녀는 카트 도중에 미용실을 뛰쳐나온다. 놈의 딸마저 용서할 생각이 없다. 그녀는 이제 “~인체 하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았으면서 사랑한 체, 없으면서 있는 체, 증오하면서 용서하는 체 하지 않는다. 이것은 중요한 전환을 암시한다. 이제 신애가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자신의 모습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게 용서하지 않는다는 의도를 분명히 드러낸 것이다. 더 이상 자신의 본 모습을 숨기는 “지렁이”가 아니다.

이것은 마지막 씬에 잘 드러난다. 미장원을 뛰쳐나와 집으로 돌아온 신애, 거울과 가위를 꺼집어 내어 마당으로 나온다.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비춘다. “~인 체” 하면서 항상 자신의 본모습을 직시하기를 거부해온 신애가 이제 자신의 얼굴을 직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때 카메라가 이동하면서 햇빛이 비쳐 들어오고 있는 마당을 비춘다. 땅 속으로만 숨어들던 지렁이가 이제 밝은 일광, 치밀한 빛 속으로 나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들의 죽음이라는 고통스러운 체험을 통해서 이제 고통스럽더라도 진실을 있는 그대로 대면할 수 있는 성숙으로 향한 치유의 과정이 시작되고 있다.

밀양은 2중적 의미를 가진다. 아무도 신애를 알지 못하는 낯선 소도시...밀양(謐陽)은 자신을 숨길 수 있는 컴컴한 땅 속의 세계다. 그래서 신애는 이 낯선 소도시 속으로 지렁이처럼 숨어들었지만 밀양(密陽)은 신비한 빛(Secret Suhshine)의 도시다. 그 빽빽한 빛이 신애를 밝은 일광 속에 드러낸다. 이제 그녀는 진정 자기와 대면할 준비가 되었고. 하느님과 만날 준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