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철학자 연구 2
온생명과 가이아; 비교와 비판
1. 들어가는 말
어떤 개념의 창안은 개인의 몫이지만 그 개념이 활착하느냐의 여부는 사회의 몫이다. 개념은 비판의 장 속에서 그 비판을 이기고 살아남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마치 어떤 형질의 출현은 유전자의 몫이지만 그 형질이 자연의 장 속에서 활착하느냐의 여부는 자연의 복잡한 네트워크상에서 작동하고 있는 자연선택의 테스트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것을 성공적으로 통과했을 때 이것은 자연의 네트워크상에 받아들여지고 보존된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개념도 이 과정을 통과함으로써 개념들의 네트워크(지식체계)속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포퍼는 이것을 "세계3"-객관적 지식-이라고 불렀다.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암묵적인 전제가 있다. 우리와 동시대의 우리 철학자나 우리 과학자들에 의해서 논의된 것은 철학의 주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아직 우리의 철학이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없으며 있다 하더라도 아직 미성숙 단계여서 연구의 대상이 되기는 시기상조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그러나 우리는 타성에 젖어 곳곳에서 발호하고 있는 우리의 생각들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김용옥 교수의 "기철학"이 학위논문의 주제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 내가 볼 때는 이것은 우리의 의식의 문제이지 우리 학문의 수준의 문제는 아니다. 그것이 학문의 장 속에 들어오게 되면 비판의 장을 통과해 가는 과정에서 더욱 깊어지고 넓어지면서 본래의 창안자의 수준을 뛰어넘는 사상으로 발전해갈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한 생각을 구체화하는 것은 개인이지만 이것을 성숙시키는 것은 사회이고 이때 그 생각은 세계3의 객관적 지식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장회익 교수의 "온생명"의 개념을 함께 검토해 보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2. 단위의 문제
2-1 장회익 교수의 문제의식은 지구상의 생명 현상을 지구만을 배경으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우선 생명의 주요한 기능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그는 체제 유지 , 자체 복제, 변이 계열 형성 , 협동 체계의 형성 등 4가지를 주요 기능으로 제시하고 있다. 1) 여기서 생명에 가장 핵심적인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체제 유지 기능이다. 다른 기능들은 이 기능이 작동한다는 전제 하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 이것은 "자유에너지의 흐름을 형성하는 강한 비평형의 여건 아래서만 일어날 수 있다." 이 조건과 함께 몇 가지 부가 조건이 충족되면 계 자체는 주변 여건의 지속적 변동에도 불구하고 상대적 안정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이 과정에서 ""바깥"과 구분되는 의미에서의 "안"이 출현하고 이것이 생명의 가장 원초적 형태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아직 생명이 아니다. 태풍도 이 조건을 어느 정도 충족시키지만 생명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그것이 우리가 보는 낱생명체(개별 생명체)는 모두 다른 낱생명체들의 존재에 의존한다. 장회익 교수는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낱생명체들을 "보작용자'" 또는 "보생명"이라고 부른다. 물론 이것은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낱생명들은 다른 낱생명들에 대해서 보생명이 된다.
요컨대 자유에너지의 흐름이라는 필요조건에 보생명이라는 충분 조건이 주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그것을 생명이라고 부를 수 있다. 태풍을 생명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은 이 충분 조건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낱생명들은 기본적으로 자유에너지의 흐름 및 "보작용자"의 존재 하에서만 가능한 조건부적 존재다.2)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낱생명체들을 하나의 온전한 독립적 단위로 보기 어렵다. 작게로는 다른 낱생명체들에 의존하며 크게로는 자유 에너지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태양-행성 시스템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낱생명체들이 우리들의 눈에는 아무리 독립적 단위로 보인다고 하더라도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각각을 낱개라고 말할 만한 독립성을 가진다고 볼 수 없다. 그것의 개체성은 객관적 사태라기 보다 실용적 규약에 가깝다. 그래서 어떤 것을 낱개로 보느냐 하는 것은 종에 따라 그리고 보는 레벨에 따라 달라진다. 그렇다면 이런 상대적 관점이 아닌 "절대적" (말에 약간의 어폐가 있지만) 관점에서 낱개라고 할만한 것은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 개체는 우리의 눈이 만들어 놓은 규약적 단위가 아니고 자연적 단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에 비하면 다른 낱생명체들은 실제 개별적 독립적 단위가 아니고 전체의 부분들이고 각 낱생명체들은 별개의 것으로 구분되지 아니하는 연속적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충족시킬 수 있는 최소한의 단위는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온생명인데 장회익 교수는 온생명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좀 길지만 인용해 둘 가치가 있다.
우리가 만일 생명에 관한 이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그 생명의 단위를 무엇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우선 한가지는 이 때 나타나는 각 단계의 "개체"를 생명단위로 보는 경우이다. 이러한 관점은 우리가 경험적으로 획득한 생명체의 개념에 가까우며, 실제로 각 단계의 개별적인 동적 체계가 정보의 담지자로서 중요한 기능을 지닌다는 점에서 유용성을 지니는 관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체들은 기본적으로 외적 자유에너지의 흐름 및 협동 상황 아래에 있는 여타 개체들이라는 필수적 조건, 즉 그 "보작용자"의 존재 아래서만 기능하는 조건부적 존재이며, 또한 협동 체계의 형성을 통해 지속적으로 상위개체를 이루어 나가는 복합적 위계 체제속의 한 잠정적 구성요소를 이루는 존재이다. 따라서 이들을 생명의 단위로 볼 경우 "어떠한 조건 아래서 존속이 가능한 어느 단계의 개체"를 진정한 생명단위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야기된다.
...이 현상을 독자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전체 시스템으로서의 최소단위를 생명의 단위로 설정하는 것이 합당하다. 이는 유한한 시공간 내에서 기능하는 하나의 제한된 실체를 이루면서도 그 안에 생명의 "정의"에 포함된 모든 내을을 담고 있는 하나의 완결된 단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존재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천문학적 규모를 지니는 것이어서, 현대 과학적 시야의 조명을 받지 않는다면 그 존재조차 상정해 보기 어려운 그 무엇이다.3)
그래서 장회익 교수는 지구상의 생명체들을 포함하는 태양-행성계야 말로 진정한 의미의 개체라고 할 수 있다고 보고 이것을 일반 낱생명체들과 구분하기 위해 "온생명"(global life)이라고 부른다.
2-2 온생명의 핵심은 독립성과 자족성인데 그렇다면 이것이 바로 서양 근세철학에서의 ""실체"와 유사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체란 "존재하기 위해서 자신 외에 어떤 다른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으로 정의된다. 데카르트는 정신과 물질이라는 2종의 실체를 인정했으며 이 각각이 실체라는 것으로 해서 그 정의상 서로 교통할 수 없다. 이것이 그 후 마음과 물질의 상호관계에 대한 복잡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라이프니쯔에게서 여기에 해당하는 실체가 ""단자"인데 이것들이 모두 실체이기 때문에 서로 교통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 절대적 자족성은 그 정의 상 다른 것에 의존적일 수 없다. 만일 우리가 이상적 단위를 찾는다면 바로 이 실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태양-행성 시스템은 실체가 함축하는 그러한 의미에서 자족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자족적인 것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다. 그것은 객관적으로 다른 것으로부터 분리 가능한 독립적 단위이다. 여기에 대해서 장회익 교수는 인상적인 비유를 동원하고 있다. 지구상의 생명체가 다른 곳으로 이주한다고 했을 때 생존하기 위해서 가져가야 할 최소한의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지구 전체를 통채로 가져간다고 해서 생존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지구는 외부에서의 자유에너지의 유입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지구와 함께 태양을 가져간다면 우리는 큰 어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최소단위(사실 엄청난 이삿짐이다!)는 지구-태양 시스템이다.
세포를 하나의 단위로 볼 수 있고, 개개의 사람도 하나의 단위로 볼 수 있지만 그러나 태양계를 하나의 단위라고 했을 때 그 의미가 본래 단위의 의미에 훨씬 더 가깝다. 전자의 경우는 동시에 보작용자를 필요로 하지만(이것이 본래 단위의 의미를 손상시킨다) 태양계 전체는 보작용자를 고려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태양-행성계가 어느 무엇보다도 아주 근사한 독립적 단위라는데 대해서는 동의한다. 그러나 계속 일어나는 필자의 의구심은 "그래서 어떻다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장회익 교수가 찾고 있는 것은 존재의 절대 근거를 묻는 우주론인가? 그렇다면 온생명의 개념은 오히려 너무 좁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태양-행성계를 논리적 관점에서 ""자족적"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온생명의 논리적 귀결은 스피노자의 무한실체로서의 "신"이다. 거기서 절대 자족성을 완성할 수 있고 우리는 그것을 一者라고 부른다. 현실적 존재들은 개체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일자이지만 다른 개체들과의 관계 속의 일자라는 점에서 절대적 일자는 아니다. 보작용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절대적 일자는 신 밖에 없다.
그러나 만일 장회익 교수가 찾고 있는 것이 이러한 절대적 일자가 아니고 상대적 일자들이라면 모든 현실적 존재는 일자(一者)이면서 다자(多者)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서양근세 철학과 대비되는 것으로 불교의 화엄사상의 기본적 입장이다. 법장( 法藏)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소상히 풀이하고 있다.
문: 이미 일(一)이라고 말한 것이 어찌 일속에 십(十)을 지닐 수가 있다는 말인가.
답: 이른바 일이라는 것은 자성으로서의 일이 아니고 연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일 속에 십이 있다는 것은 이것이 연을 이루는 일인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은 것이라면 자성이 있으므로 연기됨이 없을 것이며, 일이라고 이름할 수가 없을 것이다. 나아가 십이라는 것도 모두 자성의 십이 아니고 연을 이룸으로 인한 까닭으로 이 때문에 십 속에 일을 지니는 것은 이것이 연을 이루는 자성이 없는 십인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자성인 것으로 연기를 이루지 않으니 십이라고 이름할 수가 없다. 그런고로 모든 연기는 다 자성이 아닌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하나의 연이 사라짐에 따라 바로 일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으로서 이런 이유로 일(一)속에 바로 다(多)를 갖춘 것을 그대로 연기의 일(一)이라고 할 따름이다.4)
사물이 갖는 일(一)과 다(多)의 이 이중적 구조야말로 "현실적 존재"(actual entities)의 본성을 규정한다. 5) 아래 그림은 이것을 도식화한 것이다.
그림 1 존재의 다층적 구조
모든 것은 부분이면서 전체이다. A는 하나의 독립적 단위이다. a1은 독립적이라고 볼 수 없는데 그것의 존재는 a2, a3라는 보작용자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 A의 독립성도 잠정적인 것인데 한 층 높은 레벨에서 그것은 B, C 라는 보작용자를 통해서 비로소 성립한다. 그러나 한 층 낮은 레벨에서는 a1도 독립적 단위라고 할 수 있다. 6)
물론 이 존재의 사다리를 한없이 타고 올라가면 더 이상 보작용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절대적 단위 -일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반면 이 사다리를 한없이 내려가면 더 이상 개체화시킬 수 없는 그 무엇 -보작용자만이 있고 정작 자신을 자신이라 할 만한 실체는 사라진 그것-을 만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논리적 외삽이며 현실적 존재의 모습이 아니다.
용수가 『中論』에서 ""결정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항상됨에 집착하는 것이고 결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단멸(斷滅)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있다거나 없다는데 집착해서는 안된다."(定有則著常 定無則著斷 是故有智者 不應著有無)7)고 한 말은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물은 독립적 常數이면서 동시에 의존적 變數이다. 관점에 따라 상수로 취급될 수 도 있고 또 변수로 취급될 수도 있다. 낱생명체들도 상수이면서 동시에 변수이다. 태양-행성계의 온생명도 물론 독립적 상수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다른 맥락에서 변수이며 존재하기 위해 다른 보작용자의 작용이 필요하다. 요컨대 온생명이 독립적 단위로 취급될 수 있는 만큼 낱생명체도 독립적 단위로 취급될 수 있다. 어느 것이 진정한 단위인가 하는 물음은 별로 실익이 없다. 진정한 단위인지 아닌지는 대상 그 자체의 성격이라기보다 우리가 그 대상에 대해서 어떤 질문을 하느냐에 의존한다.
2-3 생명에 대한 온전한 이해는 생명의 독립적이며 자족적인 단위를 찾는데 있다는 것이 장회익 교수의 일관된 입장이다. 그러나 필자는 단위란 맥락의존적이기 때문에 맥락을 떠나 ""진정한 " 단위 등을 논의하는 것은 별로 실익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상대적 의미라면 자연에는 자족적이고 독립적이라고 할 만한 단위들이 있다. 이러한 단위를 찾아내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복잡한 수준 모두를 고려할 수 없기 때문에 복합적이지만 마치 단일한 것으로 간주해도 좋은 단위를 찾는다.(이때 어떤 관점을 취하느냐에 따라 단위의 범주는 아주 달라질 것이다.) 단위가 확정되면 이제 단위들간의 관계를 다룰 수 있는데 이때 단위내부의 복잡한 관계는 고려할 필요가 없다. 마치 그것들은 단일한 것처럼 외부와 관계한다. 이것을 극단으로 단순화시킨 것의 한 예가 역학에서의 "질점"(質點)이다. 이것은 사회과학에서도 흔한데 국제정치를 논하는 사람들은 마치 각각의 국가가 단일한 개체(단위)인 것처럼 다룬다.
그러나 우리가 단위를 찾는 이유를 잊어서는 안된다. 관심은 단위 자체에 있다기보다 단위들 간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단위를 확정지우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것은 토인비의 작업과 비교해 보는 것이 유용하다. 그는 역사의 연구 단위가 국가가 아니고 문명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국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국가의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에 국가는 자족적 단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물음으로 시작한다.8)
영국의 역사를 단독으로 취급하여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영국 국내사를 그 대외관계와 연결시키지 않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일까? 연결시키지 않을 수 있다면 그 밖의 대외관계는 2차적인 중요성 밖에 없는 것일까? 그리고 다시 이런 모든 대외관계를 자세히 검토한다면 그 밖의 모든 대외관계는 2차적인 중요성 밖에 없는 것일까? ..이런 물음에 대한 답변이 긍정적이라면 외국의 역사는 영국과 연결시키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지만 영국의 역사는 세계의 다른 부분을 끌어들이지 않아도 대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결론지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영국사의 주요한 흐름인 봉건제, 종교개혁, 해외진출, 의회제도, 산업혁명 등을 차례로 고찰하면서 영국사는 유럽의 여타국가와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자족적 단위가 될 수 없다고 결론 내린다. 그렇다면 영국사를 이해하기 위한 최소의 단위는 무엇인가? 영국의 역사 속에 발생한 여러 사건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중국의 역사나 한국의 역사를 알아야할 필요는 없다.(물론 엄밀한 의미에서 연관 없는 것은 없겠지만 그것을 모른다고 해서 영국역사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프랑스나 독일의 역사를 모르고서는 영국의 역사의 주요한 사건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그는 서구사회를 역사연구의 최소단위라 보고 이것을 문명에 대한 정의로 가져온다. 물론 한국은 영국과는 다른 단위에 속한다. 토인비는 이런 방식에 따라서 역사 속에 나타나는 20개의 단위를 확정한다.(한국은 중국, 일본과 함께 극동문명에 속한다)
토인비가 역사의 단위로서 문명을 가져온 것은 그것이 국가나 민족보다도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자족적 단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토인비의 목적은 이 단위를 찾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목적은 상대적으로 자족적인 각 문명들을 비교함으로써 문명의 성장과 붕괴의 원인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나아가 문명들 상호간의 관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장회익 교수의 온생명이 하나의 단위라면 다른 것과의 관계의 문맥 속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사실 하나뿐인 단위 그것은 단위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가 아는 온생명의 단위는 지구-태양 하나 뿐이다.이 온생명의 개념이 실제적인 의미를 가지려면 다른 태양계의 생명체가 발견될 때이다. 그 때 비로소 온생명의 의미가 드러날 것이다. 관계의 맥락이 결여된 단위가 단위가 아니듯이 다른 온생명과의 관계의 맥락이 결여된 온생명을 단위로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토인비가 문명을 단위로 가져온 것은 적어도 하나 이상의 문명들이 있다는 전제에서이고 그런 맥락에서만 문명이 단위가 될 수 있다. 오로지 하나의 문명만이 있다면 그것을 문명의 단위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온생명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외계생물체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지구상의 구체적 생물체의 이해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관심의 초점은 단위가 아니라 그것이 생명의 이해에 어떤 시사를 던지는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논의의 초점을 바꾸어서 온생명과 가이아를 비교해 보자.
3. 온생명과 가이아
3-1 장회익 교수는 생태계, 생물권, 가이아 등 온생명과 어떤 면에서 유사한 개념들이 있는데 구태여 온생명이라는 개념의 도입이 왜 필요했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9) 특히 온생명은 가이아와 유사한 것으로 보이는데 장회익 교수는 가이아와 온생명과의 차이를 두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는 낱생명체들처럼 지구 생물권 자체도 항상성이라는 특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러브록이 항상성 유지체로서의 지구 생물권에 가이아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10) 장회익 교수의 지적처럼 러브록이 만일 항상성 유지라는 것만으로 지구 생물권을 살아있는 것으로 보고 가이아라는 이름을 명명했다면 러브록이 지나친 실체화와 의인화의 오류를 범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집안의 온도 조절기나 문 자동개폐기도 살아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러브록이 지구 생물권을 살아있는 하나의 실체로 보고 가이아라고 명명한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아니다. 앞서 논의한 것처럼 다가 일로 통합될 때 그 구성요소들에는 없는 전체로서의 독특한 성질이 나타난다. 그래서 그 일은 다의 집합이기는 하지만 다로 환원시킬 수 없기 때문에 그 자체 새로운 실체라고 볼 수 있다. 화이트헤드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궁극적 형이상학적 원리는 이접적으로 주어진 존재들과는 다른 또 하나의 새로운 존재를 창출해내는, 이접(離接, disjunction)에서 연접(連接, conjunction)에로의 전진이다. 이 새로운 존재는 그것이 찾아내는 '다자'(多者)의 공재성(共在性, togetherness)인 동시에, 또한 그것이 뒤에 남겨놓은 이접적인 다자속의 '일자'(一者)이기도 하다. 즉 그것은 그 자신이 조합하는 많은 존재 가운데 이접적으로 존재하게 되는 새로운 존재인 것이다. 다자가 일자가 되며 그래서 다자는 하나만큼 증가된다. 존재들은 그 본성상 접합적 통일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이접적인 다자인 것이다.11)
새로운 실체에는 새로운 이름이 필요한 법이다. 그 구성요소들이 기 존재하는 것이라고 해서 그 구성요소들이 만들어내는 전체도 새롭지 않다는 것은 환원주의적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 가이아는 낱생명체들이 만들어내 놓은 새로운 실체이다. 러브록이 가이아의 개념에 도달하게 된 그 과정이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1967년 러브록은 NASA로부터 화성에 생명체의 가능성을 조사해 주라는 프로젝트를 받는다. 그는 강력한 생명 활동이 있으면 그것이 그 행성에 어떻게든 영향을 줄 것이고 그것은 어쩌면 행성의 대기 상태에 반영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12)
<표1>은 지구와 금성의 대기의 성분을 비교한 것이다.13) 금성과 지구는 완전히 상이한 대기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만들었을까? 특히 지구상에 존재하는 풍부한 산소는 무기적 환경에서는 만들어질 수 없으며 강력한 생명활동의 결과라고 보지 않으면 안된다. 산소는 사실 반응성이 풍부한 기체이다. 그것은 통상적으로 다른 기체들과 결합해서 이산화탄소나 산화철과 같은 화합물이 된다. 그것이 산소 분자O2로서 단독으로 존재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지구 대기권의 21%가 그렇게 단독으로 존재하는 산소분자들로 채워져 있다. 그렇다면 다른 물질과 반응해서 사라지는 이상으로 새로운 산소가 대기권 속으로 끊임없이 유입되고 있다고 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무엇이 산소를 대기권 속으로 계속 리필시켜주고 있는가? 그것은 생명이다. 풍부한 산소의 부존은 그 행성에 생명이 존재한다는 증거이다.
표1 금성과 지구의 산소의 비율
산소는 오늘날 지구상의 생명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다. 그런데 그 산소는 지구상에 생명이 있음으로서 비로소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생명을 살게 만든 생명의 환경으로서 지구가 있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지구 자체가 바로 생명의 산물이라고 보아야할 것이다. 이 행성이 지난 36억년간 생명이 깃들기에 적합한 조건을 유지해온 것은 생명 자체의 활동의 결과이다. 이러한 생각은 지구라는 "무생물적 집"과 그 속에 살아가는 "생명이라는 거주자"라는 전통적인 2분법을 무너뜨린다.
어떻게 대기중의 산소와 질소가 식물들과 미생물들에 의해서 만들어질 수 있었으며. 어떻게 백악과 석회암이 한때는 바다에 떠 있던 미생물들의 껍질에서 만들어질 수 있었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라. 생물은 결코 화학과 물리학의 무정한 손길로 인도되는 그러한 불활성의 세계에서 그저 적응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태고적이나 지금이나를 막론하고 우리 조상들에 의해서 다듬어졌으며 ,또한 오늘날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에 의해서 끊임없이 유지되는 그러한 세계에 살고 있다. 생물들은 그들의 이웃의 활동에 의해서 만들어진 물질들로 조성되는 그러한 세계에 적응하고 있는 것이다. 14)
생명들의 활동의 결과물이면서 동시에 생물들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지칭할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다. 종래에 사용해온 "지구"라는 이름은 2분법적인 뉘앙스가 강해서 이 새로운 생각을 표현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 러브록은 그것을 그리이스 대모신에서 따와 "가이아"(Gaia)라고 불렀다.
다가 일로 통합되면서 다에게는 없는 자체의 고유한 성질을 구유하게 될 때 그것이 비록 물리적으로는 다들의 모임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더라도 독립적 실체로서의 자격을 갖게된다. 그런 의미에서 가이아는 독립적 실체로서의 자격을 갖는다. 장회익 교수는 가이아는 태양의 존재없이 성립할 수 없으므로 독립적 단위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단위란 통합의 원리이면서 동시에 관계의 원리15)라는 점에서 볼 때 자족성이란 상대적 개념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진정한 자족적 존재는 무한실체로서의 신 외에는 있을 수 없다. 태양계-행성 시스템도 거의 자족적이기는 하지만 완전히 자족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것을 단위로 받아들인다면 가이아 자체도 단위로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는 없어 보인다.
3-2 필자는 장회익 교수와는 반대로 온생명 보다는 가이아가 훨씬 더 근사한 자연의 단위로 보인다. 필자가 보기에는 자연의 단위로 만드는 것은 ""자족성"이라기보다 "주체성"이다. 태양-행성 시스템 가운데 낱생명들이 없는 행성을 우리는 온생명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자족성을 조건으로 한다면 온생명이라고 부르지 않을 이유는 없어 보인다. 여기에 대한 분명한 언급은 찾아 보지 못했지만 문맥으로 보아 이것은 장회익 교수의 생각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만일 낱생명들의 존재와 함께 비로소 온생명이라고 불릴 수 있다면 온생명은 독립적 실체라기 보다 낱생명들에 그 낱생명들의 성립조건(비평형의 성립조건으로서 태양)을 합쳐 놓은 개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만일 온생명이 독립적 실체로서의 자격을 가지려면 낱생명과는 독자적으로 자신의 성질을 갖고 있어야 한다.(주체성의 요구)16) 그래서 낱생명과 무관하게 온생명을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최소한 그럴 수 있는 조건을 명시해야 한다.) 지금 내가 새로운 태양-행성계를 관찰하고 있다고 하자. 거기에 낱생명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는 상태에서 그것이 낱생명들이 존재하는 온생명인지 아니면 단순한 태양-행성계인지를 확인할 방법이 있는가? 가능할 것 같지 않다. 그러나 가이아는 이것이 가능하다. 외계에서 지구를 보고 있으면 그 행성이 갖는 대기의 특이한 화학적 조성(표1)을 쉽게 확인할 수 있는데 이것은 낱생명들의 활동의 결과이기 때문에 그것이 단순한 무기적 행성이 아니고 가이아임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생명론의 관점에서 온생명이 가이아에 비해 설득력이 떨어지는 점은 온생명에서 낱생명들의 역할이 수동적인데 대해서 가이아에서는 능동적이라는 점이다. 다시말해서 개체생명들 없이도 태양은 존재할 수 있지만 가이아는 존재불가능하다. 가이아는 개체생명들의 장구한 기간동안의 활동의 산물이다. 러브록은 대기의 조성에서 시작해서 지구의 온도조절에 이르기까지 이것들이 지구상의 생명들의 활동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임을 정치하게 밝히고 있다. 개체생명들이 가이아를 만들고 이 가이아가 또 역으로 개체생명들을 만들어 가는 순환구조 속에 있다.
이런 면에서 낱생명과 가이아의 관계는 다와 일의 형이상학적 원리에 잘 부합하고 있다. 그래서 가이아는 낱생명들의 생명활동의 결과이지만 이제 낱생명들과 독립적인 속성을 갖고 낱생명들을 규정할 수 있는 독립적 주체로서의 자격을 갖는다. 이제 그것은 자연적 단위라고 할만하다. 온생명이 낱생명과 다르다면, 그리고 가이아와도 다르다면 그 온생명을 온생명으로 만드는 독립적 속성은 무엇이며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그것을 규정할 수 없다면 그것에 온생명이라는 독자적 실체성을 부여하기 보다 낱생명 또는 가이아의 필수조건 또는 여건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김남두 교수도 이런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들이 개체생명의 유지를 위해 필수 조건이 된다는 점을 넘어, 이것을 포함하는 계 전체를 하나의 독립된 실체적 단위로 설정하는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생명체들이 상호의존하여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면, 이렇게 이루어지는 상호의존체계는 그 자체가 생명의 단위라기 보다는 개체생명들의 생명유지를 위한 생명단위라고 하는 것이 보다 적합한 표현이 될 것이다.17)
4. 맺는 말
지금까지 필자는 "온생명"을 비판적 관점에서 검토해 왔다. 물론 온생명에는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긍정적 측면이 더 많이 있다. 그러나 그것의 확장은 이미 소흥렬 교수에 의해 시도되었기 때문에 따로 다루지 않았다.18) 그러나 그 의의가 결코 과소평가 되어서는 안되리라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온생명의 개념을 통해서 모든 낱생명체들이 그 자체 우주적 성격을 갖는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하잘 것 없어 보이는 미물의 생명이라도 우주의 무게 만큼이나 무거운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환경을 나와는 무관한 주어진 소여로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온생명의 개념을 통해서 모든 것이 다른 것의 여건이 되며 그런 의미에서 "환경"이라고 부르기 보다 "보생명"이라고 불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것은 오늘날 환경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한 중요한 시사를 제공한다. 김남두 교수는 "온생명"의 개념이 현대사회에 던지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주적 차원에서의 생명과 개체생명 간의 관계에 대한 장회익 교수의 이같은 대규모의 사변은 위에 지적된 개념 구성의 논리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그 삶이 우주내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거시적이고도 심오한 시각을 열어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생명에 대한 35억 년을 거쳐 형성, 진화되어온 생명의 역사가 담겨 있으며 지구상의 수많은 생명체가 이 역시 하나의 생명체로부터 이같은 장구한 생명진화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결과라는 사실, 그리고 나아가 현재 존재하는 생명체들이 그들의 생명유지를 위해 상호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우리에게 생명과 생명체들의 상호연관을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듯 개별생명이나 종의 단위를 넘어서 그 전체적인 면모에서 파악하기를 요구한다. 장교수의 이론은 생명의 이런 거시적 지평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나아가 인간의식의 우주적 확대를 통한 온생명의 주체의식의 형성을 이야기하는 매력적인 논변이나 인간 문명을 생명의 전 역사에서 점검하는 그의 논의에서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통상적으로 만나는 전문화된 글에서 접하기 어려운 통찰의 깊이와 사유의 모험을 경험하게 된다.19)
어떤 개념을 창안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개념을 발전시키고 정교화시켜 가는 것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생명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해준 이 온생명의 개념을 좀더 체계적이고 정교하게 발전시켜 가는 것은 우리들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이 글은 잡기장 18번을 보완 확충한 것으로 『과학과 철학』,2003 에 게재될 예정임)
(주)
1) 장회익, 『삶과 온생명』(솔, 1998), 201-208면
2) 같은 책, 208-209면
3) 같은 책, 같은 곳
4) 法藏,『華嚴學體系』,379면
5) 여럿을 하나로 묶고 다시 이것을 새로운 하나의 계기로 만들어 가는 과정을 화이트헤드는 "합생"(concrescence)이라고 부른다. "합생이란 다수의 사물들로 구성된 우주가, 그 다자(多者)의 각항을 새로운 일자(一者)의 구조 속에 결정적으로 종속시킴으로써 개체적 통일성을 획득하게 되는 그런 과정을 일컫는 말이다."(A.N.Whitehead, 『과정과 실재』, 오영환 역(민음사,1991), 387면.)
6) 물론 장회익 교수도 이것을 생명의 특성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것이 장회익 교수가 호혜성의 조건 또는 협동체계 형성의 조건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실제 생명현상 안에서 호혜성의 조건이 지니는 결정적인 중요성은 이러한 협동으로 인해 "상위개체"가 형성된다는 데 있다. 예를 들자면 기본적인 개체들인 세포들이 모여 상위개체인 다세포 생물 즉 "유기체"(organism)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렇게 형성된 상위개체들은 일반적으로 하위개체들과는 다른, 그러면서도 여전히 개체적인 성격을 강하게 지니는, 새로운 형태의 개체들이 되는 것이다."( 장회익, 「생명이해의 논리」;『과학철학』(1999), 2권 2호,104면)
7)『中論』,257면
8) A.Toynbee,『역사의 연구』, 서머빌 축쇄본 1권, 정성호 역(오늘, 1993), 2-3면
9) 장회익, 『삶과 온생명』,182-187면
10) 가이아 개념에는 주로 지구물리 및 지구화학적 측면이 강조되고 있어서 인간의 정신세계에 대한 함축은 빠져 있다는 것이 장회익 교수가 지적하는 온생명과 가이아의 두 번째 차이점이다. (『삶과 온생명』,187면) 장회익 교수는 나아가 인간의 의식이 온생명의 중추신경계에 해당한다는 가설을 펴고 있다.
인간은 온생명 내의 한 개체로서 단순히 온생명에 의존하여 그 생존이나 유지해가는 존재가 아니다. 의식과 지능을 지닌 존재로서의 인간은 최초로 자기자신에 대한 반성적 사고를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가 지니게 된 집합적 지식을 활용하여 자신이 속한 생명의 전모, 즉 온생명을 파악해내는 존재가 된 것이다. 온생명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내부로부터 자신을 파악하는 존재가 생겨났다는 것은 곧 자기 스스로를 의식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결국 온생명은 35억년이란 성장과정을 거쳐 비로소 스스로를 의식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으며 이것이 바로 온생명의 한 부분을 이루는 인간을 통해서 가능해진 것이다. 인간은 곧 온생명의 의식적 주체로서 온생명안에서 마치 신체내에서 중추신경계가 지니는 것과 같은 위상을 지니게 되었으며, 이는 생명의 역사 전체를 통해서 볼 때 생명의 출현만큼이나 중요한 의의를 지니는 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다.(『삶과 온생명』,195면)
온생명의 존립에 의식의 존재는 본질적인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이것이 가이아와의 차이일 수가 있다. 그러나 의식 없이도 온생명의 존립이 가능하다면 의식을 둘 간의 차이로 가져오기 어렵다. 가이아의 개념 안에서도 가이아의 의식을 전개할 수 있다. 실제 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보면 가이아의 개념에서 가이아의 영성을 꺼집어 내고 있는 많은 주장들이 있다. 러브록도 가이아의 영성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J.Lovelock, 『가이아의 시대』,홍욱희 역(범양사,1992) ,9장 참조) 그러나 영성에 대한 그의 생각이 불교의 범신론적 취향을 풍긴다면 장회익 교수의 것은 오히려 절대 정신의 자기전개라는 헤겔의 『정신 현상학』적 취향을 풍긴다.
11) Whitehead, 앞의 책, 78-79면
12) J.Lovelock, 『가이아』,홍욱희 역(범양사,1990), 27면
13) 같은 책, 75면
14) 37억년전 쯤 시생대가 시작될 무렵에 비해 지금 태양의 방열량은 25%가량 많다. 그런데 지구의 온도는 큰 변화가 없다. 이것은 우리가 바깥 온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하듯이 온도를 유지하는 어떤 메카니즘이 작동하고 있다고 보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이 작용이 없었다면 지금쯤 지구는 생명이 없는 행성으로 변해 있을 것이다. 러브록은 이 메카니즘이 바로 생명들의 협동적 작업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그는 의식없이 일어나는 이러한 지구규모의 협동작용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보이기 위해서 "데이지" 모델이라는 조그마한 모델을 도입하고 있다.(러브록, 『가이아의 시대』, 3장) 이 데이지 모델을 실행해 볼수 있는 소프트웨어는 아래 주소에서 다운 받을 수 있다.
http://www.gingerbooth.com/courseware/pages/demos.html#daisy
그리고 이 소프트웨어의 설명은 필자의 http://chaos.inje.ac.kr/Alife/gaia&daisy_model.htm을 참조할 수 있다.
15) 단위의 기능은 2중적이다. 내부적으로는 통합의 원리(자족성)이고 외부적으로는 관계의 원리(의존성)이다. 이 둘이 모두 충족될 때 그 단위는 존재론적 지위를 획득한다. 즉 그것은 자연스러운 단위로 기능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단위가 관계의 원리로서만 제시되는 경우도 있다. 볼츠만이 열역학에서 사용한 원자의 개념이 그러하다. 이 경우는 조작적 지위(operational status)에 그치게 된다. 물론 새로운 발견이나 지식의 성장으로 해서 조작적 지위에서 존재론적 지위로 바뀌는 경우도 있다. 19세기의 원자의 개념적 지위가 그 대표적 사례다. 그것은 19세기까지 조작적 성격이 강했지만 20세기에 들어와서 그 내부구조가 밝혀지면서 동시에 그것을 하나의 단위로 취급해도 좋은 원리적 근거(통합의 원리)를 알게 되었다. 이제 원자의 실재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16) 토인비에서도 국가나 민족의 단위에서가 아닌 문명 단위에서 보여지는 독특한 현상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종교이다.
17) 김남두, 「온생명과 생명의 단위」;『과학사상』(1995), 13호, 122면
18) 소흥렬, 「온생명과 온정신」;『과학철학』(1999), 2권 1호
19) 김남두, 앞의 글, 123-12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