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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유토피아,디스토피아

자연을 해킹하기(2001.8)

 

 

자연을 해킹하기

 

 

한글이나 MS워드와 같은 일반 문서 편집기와 html의 언어를 사용하는 웹 문서편집기 간의 차이는 무엇일까?전자는 읽고 쓸 수 있는데 대해 후자는 "읽기" 기능과 "쓰기" 기능이 분리되어 있다.후자의 경우 쓰기 기능은 서버 운영자 또는 그 권한을 부여받은 자만이 갖고 있다.

hwp와 같은 워드의 언어는 누구나 읽고 쓸 수 있다.인터넷의 언어가 이런 형식으로 되어 있다면 온갖 사람들이 이리저리 바꿔놓아 조만간 그 사이트는 엉망이 되고 말 것이다.그것은 읽기만 하되 방명록과 같이 특별히 허가된 곳을 제외하고는 "쓰기"를 불허한다.이것은 그 사이트 운영자로 보아 아주 편리하다.TV도 얼핏보면 이와 같기는 하나 아주 다르다.TV의 모니터에서 그 내용을 바꾸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그것은 애당초 일방통행이다.그러나 html언어에서 쓰기는 원리적으로 가능하지만 단지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자물쇠로 잠그 놓았을 뿐이다.열쇠가 있으면 언제든지 열고 쓰기를 할 수 있다.

html언어가 hwp나 방송의 아날로그 신호와 구분되는 점은, 후자의 경우는 하나의 얼굴 밖에 없는데 대해 전자는 2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html이 인터넷 브라우저에서 나타내는 얼굴과 WebEdit나 Namo와 같은 웹에디트에 나타내는 얼굴은 다르다.전자는 보여주는 얼굴이며 후자는 그 얼굴을 조절할 수 있는 자신만의 얼굴이다.그러나 hwp 는 보여주는 얼굴이기도 하면서 자신의 얼굴이기도 하다.

로버트 폴락은 생명의 언어를 워드에 비유한다.그러나 더 정확한 비유는 html을 사용하는 웹 문서편집기이다.생명의 보여주는 얼굴이 "표현형"(phenotype)이며 그 이면의 얼굴이 "유전형"(genotype)이다.

멘델이 표현형의 이면에 있는 유전형을 완두콩을 통해서 추론하기 전까지 사람들은 생명이 hwp언어와 닮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것은 읽고 쓸 수 있다.획득형질이 유전된다는 것은 쓸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살아있는 동안 획득한 형질은 다음 세대에 전달된다.독일의 생물학자 바이스만(A.Weismann)은 쥐의 꼬리를 잘라도 다음 세대의 쥐가 온전한 꼬리를 갖고 태어남으로 획득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는 것을 설득력있게 보여 주었다.그는 여기서 생식세포의 핵은 부모의 몸,즉 체세포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에 의하여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추론하였다.그는 이것을 "생식질"(plasm)이라고 불렀다.이것이 표현형의 이면에 들어있는 유전형이다.

그뒤 생물학자들은 표현형의 변화는 유전형의 변화-교배에 의한 유전자의 재배열이나 돌연변이-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러나 그 역은 아니다.다시 html의 비유를 들면 브라우저 상의 내용이 바뀌었다면 그것은 브라우저 상의 편집에 의한 것이 아니고 html문서 편집기에 의한 것이다.그것의 변경은 그 사이트를 관리하고 있는 주인장의 권한이지 나와 같은 구경꾼의 권한이 아니다.나는 마음에 안든다고 그 내용을 임의로 고칠 수 없다.hwp문서라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고쳐 버릴 수 있지만..

생명에 대해서 말하자면 나는 나의 "몸"에 대해서 "읽기"권한은 있어도 "쓰기"권한은 없다.내가 운동을 통해서 내 몸을 아무리 근육질로 다져 놓아도 내 자식에게 그 몸을 전달할 수 없다.자연이 불합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이 얼마나 사려깊은 것인지 생각해 보라.나의 비겁함,나의 치졸함,나의 사악함이 내 자손에게 그대로 전달된다면..자연은 최선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최악을 피하는 것이다.살인마의 자식이라도 태어날 때는 그 아비의 모든 오욕을 지워 버리고 순전무구한 "천사"로서 태어난다.그것은 우리가 건들일 수 없도록 깊히 깊히 감추어져 있는 신의 영역이다.

그러나 1954년 왓슨과 크릭이라는 두 젊은이가 감추어진 신의 암호를 해독했다.순전히 브라우저만을 연구해서 그 이면에 있는 html언어를 알아낸 천재들이다.이런 면에서 왓슨과 크릭은 신의 서버에 접근해서 그 암호를 풀고 내부로 침입한 희대의 해커들이다.이제 이 기법을 전수받은 생물학자들에게 생물은 hwp화일이나 다름없다.이제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쓸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런데 막상 빗장을 열고 들어가 보니 벌써 "다녀가신" 솜씨좋은 해커들이 있었다.그리고 보니 우리의 몸에도 우리 모르게 해커들이 번질나게 들낙거린 흔적이 역력했다.해커들이 어지렵혀 놓은 그 스와프 파일을 우리는 Junk DNA(쓰레기 DNA)라 부르는데 우리 30억쌍의 게놈의 95%이상이 이런 파일로 가득차 있다.

이 해커들은 누구인가? 바로 바이러스였다.바이러스는 은밀히 세포의 방화벽을 뚫고 들어가 그 세포를 자기의 입맛에 맞도록 바꾸어 놓는다.바이러스의 지령을 받은 세포는 자신의 단백질(표현형)을 만들지 않고 바이러스의 DNA와 단백질을 만든다.그것은 졸지에 바이러스를 위해서 봉사하는 좀비가 되어 버린다.

그림 1 가위와 풀을 이용한 유전자 편집하기

 

이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과학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생물학을 생물공학으로 전환시키는 낭보였다.우리 대신 서버로 들어가 입맛대로 유전자를 바꿔치기 해줄 운반체(vector)로서 이 바이러스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뒤에 박테리아내에 있는 플라스미드라는 더 다루기 좋은 운반체가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

문제는 이 바이러스에 우리가 원하는 유전자를 어떻게 끼워넣느냐 하는 것이었다.끼워 넣을려면 바이러스의 게놈 사이의 적당한 곳을 일단 자르고 그 사이에 넣고 다시 붙이면 된다.붙이는 것은 유전자 교정시에 다시 붙여 주는 "리가제"라는 말하자면 접착제 효소가 이미 알려져 있기 때문에 문제가 안된다.문제는 그 사이를 째는 가위가 필요한데 그 가위도 이미 자연에 있었다! 바이러스에 시달린 박테리아가 개발해 낸 분자 "가위"였다.대장균은 침투한 바이러스의 게놈의 특정 부위를 잘라서 기능하지 못하게 하는 "제한 효소"라고 불리는 가위를 가지고 있다.그 뒤 자르는 특정부위에 따라 여러 가지 가위들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자르기","붙이기","복사하기"가 가능하다면 이제 유전자의 편집이 가능하다. 자,이제 브라우저를 바꿀 수 있는 웹에디트를 가진 것이다.(그림1)

        

그림 2 대장균내의 플라스미드

인터페론은 바이러스 감염에 대단히 중요한 기능을 하는 단백질이지만 인간의 몸속에서 극히 소량 밖에 얻을 수 없다.우선 대장균(E.coli)의 플라스미드(그림2)의 어떤 부위를 가위로 자르고(자르기) 인터페론의 합성을 지령하는 인간의 유전자를 거기에 끼워넣는다. 그것을 풀로 다시 붙인 다음(붙이기) 이것을 대장균에 도로 집어 넣는다.대장균은 30분에 한번 꼴로 분열함으로 짧은 시간에 대량의 인터페론 복사본을 얻을 수 있다.(복사하기)  이 대장균은 인간의 DNA를 자신의 유전자로 생각하여 그것을 주형으로 인간의 단백질을 합성할 것이다.이것을 수집하면 인터페론을 대량으로 얻을 수 있다.(물론 운반자로서 플라스미드 대신 바이러스를 사용할 수도 있다.약간 복잡해지겠지만..)(그림3)

 

 

그림 3 플라스미드를 이용한 인간 유전자의 대량 복사

 

이 기법을 이용하면 이제 우리는 그 게놈으로 들어가 삽입하고 수정하고 지움으로써 생물체를 재설계할 수 있다.유전공학의 탄생이다.신의 작업에 대한 희대의 해커로서 쓰기권한을 탈취한 인간은 이제 세상을 자신의 입맛에 맛도록 바꿀려고 한다.

인류가 선사시대에 최초의 포유동물을 길들인 후,인류는 동물들을 선택적으로 도태시키는 과정을 반복하여 동물의 어떤 형질을 강화하거나 제거함으로써 동물의 품종개량을 해왔다.그러나 이것은 표현형에 입각한 "바깥"에서의 변형이며 여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교배가능한 집단인 종내에서만 개량이 가능하다.그러나 이제 유전형에 직접 개입하는 "안"에서의 변형이 가능해졌다.적어도 공학적 의미에서는 종의 실질적 경계는 무너져 버렸다.

이제 다른 종의 유전자를 서로 결합시킴으로써 정상적 쥐 보다 2배나 큰 슈퍼쥐를 만들 수 있고,양과 염소를 교배시켜 반은 염소이고 반은 양인 키메라 같은 geep(sheep와 goat의 합성어)를 만들 수 있다.이것은 진화의 역사와 종래의 품종개량행위로부터 근본적으로 일탈하여 있는 것이다.역사상 과거에는 과학자들이 종의 경계를 완전히 무시하고 각종 생물들의 이질적 유전정보들을 조합함으로써 새로운 생물을 창조할 수 있는 수단을 갖지 못하였다.그러나 이제 생물학자들은 자신들이 처음으로 진화과정 그 자체를 제어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인간은 그 자체로서 진화 과정에 참여하고 있다.이 말의 의미는,선택적 도태과정에 의한 품종 개량 기술과 좀 더 최근의 DNA 재조합 기술에 의해 게놈을 조작하는 우리의 능력은,진화과정을 통해 취득한 것으로서 진화 그 자체의 필수적 구성요소이며,과거에 주장되었던 것처럼 "진화과정을 어설프게 조작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정말로 그것은 진화인 것이다.(제레미 리프킨,『바이오테크 시대』,189면)

 

 생명의 암호를 풀므로써 우리는 생명의 언어가 '하나'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그것이 다 달라 보였던 것은 그 유전형을 우리가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그러므로 종의 본질적 차이를 주장하는 것은 유전형을 모르고 표현형에만 한정될 수 밖에 없었던 우리들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이제 연구실의 분자생물학자들은 새소리를 녹취하기 위해서 모기에 뜯기며 밤을 새우는 원병오와 같은 현장 생물학자들을 측은한 눈초리로 바라본다.

생명의 언어에 비하면 우리의 언어는 지리멸멸하게 보인다.얼마나 많은 언어들이 있는가? 보편의 DNA언어처럼 에스페란토어 같은 것을 모든 세계인들이 공통으로 사용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외국어를 배우고 익히는데 소모하는 많은 시간들을 절약할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언어의 장벽에서 생기는 오해도 줄여줄 것이다.정보도 신속하게 유통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생명의 언어 DNA는 이상적으로 보인다.바이러스에서 인간 까지 동일한 알파벳을 사용하며 그 해석(단백질 합성)도 대동소이하다.생명의 보편어가 있는 셈이다.그러나 이것도 자세히 보면 겉보기만 그럴 뿐이다.어렵사리 보편어를 만들어 놓고서는 자연은 다시 그것을 가르고 자르고 분리하는데 여념이 없는 것 같다.종간의 언어(게놈)의 소통을 분리시킴으로 원리적으로 같은 것을 사실상 다르게 만들고 있다.언어가 다르면 의사소통이 안되듯이 종이 다르면 유전자의 교환이 불가능하다.유전형과 표현형을 분리함으로써 종간에 높은 장벽을 치고 있다.

생명의 언어는 유전형에 있어서는 같은 언어이나 표현형에 각기 다  다르다.우리 인간의 언어도 그럴지 모른다.우리가 알고 있는 다양한 언어들은  유전형으로서의 母語(mother tongue)의 상이한 표현형들일지 모른다. 촘스키는 이것을 "보편문법"(universal grammar)라고 불렀다.생명에 유전형과 표현형이 있듯이 그는 언어에 심층문법과 표층문법을 구분했다.

그런 면에서 자연의 언어와 인간의 언어는 별로 다르지 않다.모두 그 표현형에 있어서는 국지적인 방언들로 되어 있다.생명의 언어든 인간의 언어든 하나의 언어가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왜 번거로운 방언들을 남발하고 있는 것일까? 설마 구식 생물학자들에게 일거리를 주기 위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겠지. 왜 그랬을까? 성서의 바벨탑에 관한 설화를 읽으면서 가진 그 의문도 이런 것이다.

 

온 땅의 구음이 하나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서로 말하되 자,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흝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자,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하여 그들을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어신 고로 그들이 성쌓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게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어셨더라.(창세기,11장)

 

유전형에서 볼 때 모든 언어는 하나이다.종과 종사이의 구분은 표층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인간과 박테리아의 교배를 금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옥수수에 토양박테리아 Bt를 삽입시키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그들은 자신이 변경시킬 수 없는 브라우저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변경시킬 권한을 갖고 있는 웹편집기를 보고 있다.이 논리에 잘못이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바벨탑을 쌓고 있는 사람들이다.왜 심층에서 하나인 것이 표층에서 여럿이고 그들 사이에 높은 장막을 쳐 놓았는지 우리는 고민해 보아야 한다.그것은 자연의 단순한 불합리한 양상으로 돌려버리기 어려운 깊은 측면이 있다.우선 우리의 언어부터 검토함으로써 그 의미를 반추해 보자.

언어가 무엇인가? 그것을 단순한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생각한다면 하나의 언어로 통일시키는 것이 지당할 것이다.여러 방언들을 허용한다는 것은 바보같은 짓에 지나지 않는다.그러나 언어는 그 언어사용자들이 세상을 보는 눈이다.그것은 "나는 누구이며,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나는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그 민족의 원형적 형이상학이다.그 언어를 통해서 생각하고 그 언어를 통해서 판단한다.그리고 그 언어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한 민족의 소멸은 생물학적 소멸이 아니라 언어의 소멸에서 온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그래서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지 않았는가? 각 언어는 다른 언어로서 포착되지 않는 그 독특한 뉘앙스들을 갖고 있다.각기 고유한 독특한 세계들이 모여서 풍요한 인류의 문명을 구성한다.그것은 단순한 하나도 단순한 여럿도 아닌 "하나인 여럿"이다.서정주가 없고 세익스피어만 있는 세계는 결코 아름답다고 할 수 없다.하나의 언어가 없어지면 하나의 세계가 없어진다.언어가 하나로 통일되면 우리는 대부분의 세계들을 잃게 된다.이 경우 인류가 일단 쇠퇴기에 들어가면 다시는 그 창조성을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자신의 모국어를 지키고 가꾸는 것은 인류의 창조적 잠재성을 보존하는 가장 핵심적 사업이다.언어를 단순한 언어소통의 수단으로 보는 기능주의자들은 이 말을 절대 이해못하겠지만...특히 복거일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종은 차이를 보증한다.물론 그 차이는 절대적 차별성이 아니다.본래 하나였으므로 "하나의 여럿들"인 셈이다.그 차이들이 모여 우리의 세상을 구성한다. 그 차이는 사라지기도 하고 다시 분화되기도 하면서 온갖 차이들로 만들어진 앙상블을 만들어낸다.그러나 그 차이는 우리가 구분하지 못할 만큼 주관적인 것이 아니다.오랜 진화의 과정을 통해서 숙성되어온 자연의 실체들이다.그것이 종(species)이다.그 경계를 지금 유전공학은 서슴없이 무너뜨리려고 하고 있다.그들은 그것이 "하나"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여럿"임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 종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이 바로 바벨탑이며 "그 경영하는 일"(무슨 일일까? 바로 오늘날 유전공학이 하고 있는 그 일이 아닐까?)을 금지하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아예 "차이"를 분명히 하셨다.그리고 신은 "차이"를 무너뜨리지 못하게 그 상호 교잡을 막았다. 이 경계를 무너뜨리면 생태학적 재앙이 온다.그러나 지금 그 바벨탑 쌓기를 막아줄 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생태학적 안정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차이"이다.이것을 생태학자들은 종의 다양성이라고 한다.논밭이나 삼림에서 극성을 부리는 병충해는 우리가 바로 이 차이들을 없앴기 때문이다.단일 작물로 논밭을 채우고 단일 수목으로 삼림을 채운다면 거기에 적응한 해충이 급격하게 증식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닌가? 다양성,차이는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면서 일방의 일방적인 폭증을 막아준다.차이들이 사라지면 그 생태계는 극도로 불안정해진다.

나는 이런 공상을 해 본다.범세계적으로 연결된 인터넷 네트워크를 타고 컴퓨터 바이러스가 극성을 부리고 있다.지금 현재도 레드코드 바이러스가 변종을 만들어내면서 퍼지고 있다.만일 다양한 컴퓨터 운영체계가 있고 다양한 컴퓨터 언어들이 있다면 이 바이러스는 국지적 현상에 한정될 것이다.지나친 통일성이 시스템의 위기를 낳고 있는 것이다.그래서 바이러스의 독성이 강해지면 컴퓨터 운영체계의 분화가 일어나지 않을까 생각한다.독성 강한 세균들이 종의 분화와 분지를 가져왔듯이 말이다.그렇게 되면 바이러스의 창궐은 막을 수 있지만 그 대가로 상호 호환이 어려워지면서 우리가 오늘날 외국어로해서 겪는 그 번거로움을 겪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최선을 찾는 것 보다 최악을 피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번거로움은 불가피하다.

그것이 잊혀질 때 쯤이면 우리는 다시 하나의 언어로된 "바벨탑"을 동경하게 될지 모른다.그리고 그런 시스템을 만들어내지 못한 조상들의 어리석음을 탓할지 모른다. 그 조상들이 자신들이 세운 바벨탑을 스스로 무너 뜨린 사람들(나의 희망사항이지만)인 줄은 모른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