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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유토피아,디스토피아

과학기술과 문명의 불안/최윤미(졸업논문선)

 <졸업논문 선작1>

과학기술과  현대문명의 불안

 

                                                                      최윤미(철학,4)

Ⅰ. 서론

 

 1. 1 현대 문명의 신앙

  

 신문은 그 시대의 거울이며, 역사이다.  우리 나라의 신문에는 어떤 기사가 많이 실리는가?정치·경제면에 실린 부정부패 관련기사나 공직자 비리관련기사는 하루라도 쉬면 안될 것만 같이 제 1면의 영광을 차지하고, 사회면에 실린 각종 범죄사건·사고 소식은 스포츠신문의 연재소설과 같은 자극적인 내용이 태반이다. 문화, 예술, 연예 등은 또 어떤가? 행사 관련 소식들을 제외하면 여기저기 쏟아지는 문제점들로 우리의 신문들은 메워져 있다.

  우리의 삶을 신문에 실린 기사가 다 제시하는 것은 아니며 항상 부정적인 면만 있다는 것도 아니지만 이러한 문제들은 우리가 자각하는 부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문제인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사건·사고나 부정부패를 비난하기는 하지만 자신의 그릇된 행동에 대해서는 얼마나 자각하며, 얼마나 의식적으로 고쳐나가고 있는지 의문조차 갖지 않는다.

  우리가 살아 숨쉬고 있는 동안, 특히 자기자신이 사회적으로 어느 위치에 있다고 느끼는 동안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할 수 있다고 믿으며 그 믿음은 자신의 생활 전반에 걸쳐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지배하고 있다. 현대인에게 있어 종교보다 더 큰 믿음은 바로 그들 자신에 대한 신념의 과신이다. 이러한 과신은 여러 측면에서 문젯거리의 원인이 된다. 타인뿐만 아니라, 자기자신마저도 자신만의 잣대로 가치평가하며 이러한 평가의 오류는 생명과 자연에까지도 크나큰 피해를 입히고 있다. 이에 대해 생태학자 칸젤바흐도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생태학적 위기의 극복과 해결책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내면적 세계의 위기 해결없이는 불가능하다"라고 했으며, 이유는 "생태학적 위기는 인간이 조성한 것이며, 따라서 생태학적 위기는 바로 인간의 위기"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문제의 시초가 과학이나 기술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으로부터라는 것이다.1) 이로 인한 우리 삶의 전반적인 면에서의 피해들을 뒤에서 하나하나 짚어보겠다.   그러한 논의에 앞서 우선 열린 사고로의 전환을 위해 우리 자신을 바로 알아야 할 것이다. 과신은 자기자신에 대한 지나친 믿음에서 출발한다. 때문에 자신을 바로 알아야 문제의 근본 원인을 알 수 있으며, 자신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자신의 사상과 믿음을 버리고 받아드릴 자세가 되어야 할 것이다.

 

 1.2 본원적 인간의 질문, '나는 누구인가'

 

  어떠한 믿음이건 한 사람의 인식 속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면 그 믿음은 어느새 울타리를 치고 침입자를 경계하며 그 믿음을 신봉할 수있는 것들에 한해서만 받아들이는 닫힌 사고로 자리잡게된다. 흔히들 이에 대해 좋지 못한 '편협한 생각'이라고 쉽게 말하지만 실제 자신이 그 입장에 처할 경우에는 굳건한 신앙이 되어 바꾸려하지 않는다.  폭풍 속에서 거대하고 튼튼한 나무는 부러지지만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는 쉬뽑히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우리의 의식체계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물렁한 사고, 이것도 저것도 받아들일 수 있는 아이들의 사고로 돌아가야 사고의 틀을 깰 수 있는 전환점이 마련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본원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필요가 있다.

  '나는 누구인가'

살아가면서 특히, 청소년기에 가장 많이 질문을 던지는 자신의 가치신념의 과제가 바로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인간은 태어나서 부모와 주변의 사람을 알고 그들을 통해 자기를 느끼며, 자아만을 고집하다가 사회의 언저리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타인을 의식하기 시작한다. 사회에 더 깊이 들어갈수록 그 관계와 영향력의 힘에 휩쓸려 타인과 자신, 그리고 사회를 다시금 가늠해보고 '나'에 대해 의문을 가진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각각의 개인은 주변과 자신의 관계를 통해 그 답안을 작성하며 그들만의 독특한 답안대로 생을 살아간다. 살아가는 도중 어떠한 외부압력이 있지 않는 이상 그 답안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때까지 각각의 인생을 좌우하게 된다. 때문에 인간의 인생 중 많은 부분이 잘못된 자기인식으로 인해 짧은 안목으로는 그의 생을, 좀 더 긴 안목으로는 생명의 의미에 있어 그릇된 과정들과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단지 사춘기의 혹은 가끔 삶의 회의 속에 찾아오는 충동적 욕구불만의 문제로만 간주할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또 내가 왜 이런 생각과 질문을 가지는지에 대해 끝없이 이어져 나오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인간의 탄생과 죽음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인생과정은 탄생과 죽음의 문제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며 주어진 환경에 따른 여러 변수요인을 고려하면 너무나 복잡하게 되므로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다.

  사람은 그 부모의 자식이며, 부모는 다시 그들의 부모의 자식이다. 인류 최초의 인간은 현대인의 조상인 것이다. 탄생의 시작을 알기 위해서는 인류의 탄생을 살펴봐야 하며, 인류의 탄생은 생명의 탄생으로 다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최초의 생명의 시작은 누구도 알지 못하지만 지구의 탄생으로부터 생명의 시작을 생각해 보자. 어떠한 시작이 되었든, 혹은 시작이 없었던 것이든 지구의 탄생은 생명 유기체의 탄생을 도울 수 있는 환경적 여건이 주어졌으며 여기서 원시 유전자가 탄생하였다고 본다. 이 유전자들의 조합은 조합하지 않은 유전자에 비해 우세하였고 능력이 되지 않으면 퇴화되었다. 이러한 유전자들간의 조합으로 생명체의 크기는 -주어진 환경에 좀 더 유리하다면- 커져갔고 진화되어 왔다. 그리고 하나의 생명체인 인간도 많은 생명체 중 하나로 자리잡게 되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인간만이 생명을 가진 것이 아니며 동식물과 같은 생명체만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이기 이전에 인간은 만물 중 하나이며, 그 많은 인간 중에서 하나가 나임을 인지해야 한다. 또한 이러한 나의 탄생은 내가 가지는 의문과 특별한 자의식의 믿음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졌으며, 내가 의미 있게 되는 것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렇다고 하나의 인간이 가벼운 존재라는 것은 아니다. 단지 하나의 종에 속하는 인간만이 중요한 존재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인간이 개미보다 못하다는 것도 아니지만 개미가 인간보다 덜 중요하다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물과 흙을 통해 생겨난 유전자의 오랜 조화와 경쟁 끝에 내가 태어났고 나는 이 모든 만물과 같은 유전자를 이어받고 약간의 다른 환경에서 차이를 가지며 각자 진화한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사회 속에서 같은 유전자를 이어받은 집단들이 각자의 주변 상황에서 차이를 가지면서 서로 다르게 성장한 것이다. 오랜 시간이 흐른 결과, 모습을 달리하고 특징을 달리할 뿐 만물과 나는 다를 것이 없다.

  어미와 새끼는 자궁을 사이로 하나로 존재한다. 아메바와 같은 단세포의 생명체는 자기 자신을 분화시켜 증식한다. 어떠한 것이 주체이고 어떠한 것이 객체라고 누가 단정할 수 있을까? 새로운 생명체의 탄생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무에서 유로 흐르는 것이 아니다. 모든 만물은 서로가 함께 피를 나눈 형제와 같은 것이며 나라는 존재는 그 만물 중  하나이다. 다른 나와 동일하되 약간의 차이를 가지고 차이를 가지되 서로 관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죽음이란 세상에서 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처음, 아니 생명의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또 다른 내가 탄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탄생과 죽음의 의미는 불교철학과 많은 연관성이 있으며 현대의 문제점의 시작은 이러한 생각과 정반대의 생각에서 나옴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제 현대의 문제점들을 위의 생명관, 자아관에 입각해 바라보고 그에 따라 대책이 강구될 것이다.

 

 Ⅱ.과학문명의 그릇된 발달

   

   2.1 신은 없다, 인간도 없다, 기계만 있다.

  

 현대과학 기술은 생명 연구에 한참 빠져 있다.해부하고 벗겨보면 볼수록 이처럼 신비롭고 아름다운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과학의 몸부림도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 과학의 획일적이고 독단적인 문제점들이 과학분야뿐만 아니라 영향을 미쳤던 모든 분야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 시작은 앞서 살펴본 자아관과 생명관을 지양하고 나와 자연, 나와 타인, 그리고 나 자신마저 육체와 정신을 분리시킴으로부터라 볼 수 있겠다. 이에 대해 한스 요나스는 "자연은 인간과 분리되어 있는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인간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며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인간 존재의 부분이며, 인간 자신의 실존적 완전성의 한 요소이다."라고 저술했다.2) 인간은 자연과 분리가 될 수 없으며, 그것은 육체적·생태적 문제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영역에서도 하나임을 뜻한다. 진교훈도 그의 저서『환경윤리』에서 "인간이 마음을 사로잡는 경치를 감상하고 나서 누리는 풍요함은 값으로 따질 수 없다. 이것은 마치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나 반가사유상과 같은 예술품의 가치는 그들에 투자한 재료의 값과 비례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순전히 이용도만을 따지는 사람은 자연은 말없고 언제나 교환하고 대치할 수 있고, 근본적으로는 가치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자연을 기술·산업적인 시각으로만 관찰하는 자는 자연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며 자연을 멸시하고 평가절하한다. 그러한 자는 자기 자신의 영혼까지도 산업화한다."고 말하고 있다.3) 이 또한,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정신적인 영역까지 하나됨을 의미한다.

  하지만 데카르트로 시작된 이분법적인 사고체계는 인간이나 자연을 이용하기에 편리하도록 구성물질로 간주한다. 이러한 사고의 사회적 응용은 더욱 광범위해진다. 이를 잘 보여주는 철학자가 바로 존 로크이다. 그의 사상에 의하면, "인간들은 더 높은 지성에 의해 이끌려지는 신성한 존재가 아니라, 차갑고 기계적인 우주의 물질계와 반응하는 단순한 물리적 현상에 불과한 존재"였다. 그는 또한 "자연을 부정하는 것이 행복으로 향하는 길이며, 사람들은 자연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까지 주장했다. 그는 자연을 인간과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속박하는 존재로 취급했다.4) 따라서 자연과 사회, 정확히는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을 바라보면서 인식의 주체와 객체를 분리시키게 되고 이는 개인주의의 바탕으로 '나'라는 주체 외에는 모두 '타'라는 것이다. 여기서 '타'란 '나'의 관계와는 상관없이 내 의지에 의해 관계될 수도 있고, 아니면 아예 있는지조차 모를 수도 있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때 의지력은 '나'라는 인간의 권리요, 자유인 것이다. 신이란 나를 구속하는 존재이며 전지전능하지만, 강한 내 의지만 있다면 신의 속박에서 풀려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신은 없다. 단지 '나'라는 인간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신이 거부되고, 신의 능력에서의 자연법은 무시된다. 신의 능력에 대한 도전은 바로 자연을 이용하고 인간의 의지대로 휘두르는 것이었다. 자연의 순리가 곧 신의 계시였으므로 순리를 거스르는 것이 당시의 과학자들에게는 성취감과 해방감의 충족이었을 것이다.

  또한 육체와 정신의 분리는 신과 자연, 그리고 타인을 분리시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육체와 정신도 분리했으며 더 나아가 육체는 속속들이 시계와 같이 분해되었다.

  이러한 이론이 문제의 원인이 된 것은 당시의 전반적 사회흐름으로 정착했기 때문이다. 서구의 신의 거부는 진리와 지식의 추구로 인간의식혁명이라 불리어졌으며 이는 베이컨의 '아는 것이 힘이다'와 같은 말속에 뿌리 박힌 자연의 이용을 촉구했다. 이를 머레이 북친은 다음과 같이 비난한다. "서구에서 가장 굳어진 생각 중 하나가 자연은 필연성의 냉혹한 영역이며 무자비한 법칙성과 강제성이 지배하는 영역이라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다른 자연 개체들과는 달리 기술적이고 합리적인 기민함을 가지고 있으니 이를 수단으로 자연을 정복해야만 한다는 것으로 이러한 태도는 자연적인 필연성이라는 강제로부터 모든 인간을 해방시킨다는 프로젝트를 공유하고 있다....... 이는 인간은 자연에 대해 명령하는 자세를 견지한다."5) 하지만 사회적 흐름에 의해, 자연은 단지 도구일 뿐이라는 기계론적 관점은 인간의 몸도 기계로써 모두 분해하고 다시 조림할 수 있는 것이라는 야릇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당시 과학이나 의학계에서는 이러한 이론의 발전에 힘입어 여러 가지 실험이 행해졌으며, 불행 중 다행인지 불행의 악순환인지 그러한 실험의 몇 가지는 성공하게 된다.

  기계론에 대한 사상을 크게 발전시키는데 존 로크의 힘도 컸다. 그는 인간은 전지전능한 신적인 힘에 의해 이끌려지는 존재가 아니라, 기계적인 우주의 물질계와 반응하는 단순한 물리적 현상에 불과한 존재라 여겼다. 즉, 인간이란 정해진 현상에 대해 반응하는 기계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행복을 정의함에 있어 자연을 부정하고 지배하는 것이라 믿었다. 당시 이들에게 있어서 신의 존재는 논할 가치도 없는 것이었으며 자연과 인간은 기계덩어리의 부속품이었을 뿐이었다.

  이러한 모든 사고전환이 서로 합치되어 그 파괴적인 영향력은 더욱 광범위하고 깊숙하게 전파되었다. 이는 서구에선 인간의 이상향인 신의 존재에 대한 거부를 의미하며 동양에선 서구 열강의 물질적 힘에 짓밟힌 동양적 가치관의 불신을 의미한다.

 

 2. 2 자본주의와 과학의 결탁

 

 1) 자본주의의 비뚤어진 시작

  17세기 서구의 전반적 사상 흐름은 산업혁명과 합세해 더 큰 폭탄을 준비하게 된다. 인간은 기계이며 하나의 도구나 부속품과 다를 바 없다는 사상적 기반에 힘입어 산업혁명은 그 도구를 좀 더 쉽게 사용·폐기 가능하게 된 것이다. 특히 당시 식량의 대량 생산에 힘입어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산업혁명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러한 값싼 노동 인구의 증가와 인간의 도구화로 이루어졌다. 자연을 파괴하면서 재료를 공급했고 인간을 기계처럼 취급하여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생산력이 높으면 쓰고 떨어지면 쓰레기처럼 폐기 처분하였다.

  산업혁명은 자본주의라는 기회의 균등과 사유재산을 인정해 준다는 기치를 내세워 사람들을 현혹시켰다. 이러한 사회 흐름은 대중을 노동인력으로 동원시켰고 수많은 공장에서는 대량의 생산품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많은 수의 노동자들은 임금을 하락시켰고, 이에 노동력의 착취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자유시장 경제체제는 생산비의 최소화를 위해 노동자뿐만 아니라 자연환경과 더불어 소비자까지 희생시키게 된다.

  희생된 것들로부터 자본가는 더 많은 이윤을, 노동자는 더 많은 일을 가지게 되었고, 이런 경제 구조는 개인을 생산수단으로서의 가치를 지니는 존재로 간주하도록 만들었다. 때문에 개인간에는 서로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경쟁이 시작되었고, 인간적인 유대관계보다는 경쟁자로 타인을 의식하게 되어 인간적이거나 윤리적인 것은 필요 없게되었다. 그들은 단지 법적인 관계만을 생각하게 되었다.

 

  2) 상업적 과학

  부를 축적한 자본가는 더 큰 자본을 원했고, 이는 자본이 기술을 사기 위해 과학과 손을 잡은 계기가 된다. 자본은 과학이 가진 그 자체의 가치가 불필요했으며 단지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이윤에만 관심이 있었다. 당시 '과학적'이라는 대부분의 연구나 논문은 사실 '상업적'에 더 가까웠다.

  이는 자본가만의 노력에 의해서만 이루어지기에는 과학의 세력은 너무도 광대했다. 초기 과학의 연구는 그다지 자본에 기댈 필요가 없었지만, 사회가 복잡화, 세련화되면서 과학 역시 기구와 장치의 고급화가 수반되었다. 이러한 기구나 기계 등은 모두 값비싼 물품이었고 과학은 자본가들에게 기대어 그들의 비위를 맞추며 연구를 행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원인은 과학자들에게는 당시의 사상관이 자연을 유기체가 아닌 기계로 간주되고 있었기에 연구라는 가치성을 스스로 무시하고 있었다. 이들에겐 과학연구의 정열보다는 연구를 통한 자본획득이 더욱 중요했다. 자본가의 생산성을 높여 이윤의 증가가 목적이라면 과학자들에게는 생산성을 높이는 장치개발 연구를 통해 과학을 상품화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 때문에 자본과 과학의 결탁은 더욱 치밀해지면서 광범위하게 이뤄질 수 있었으며, 그 속도 또한 더욱 가속화되었다.

 

 2.3  기계론적 의학의 한계

 

 1) 닫힌 사고와 열린 사고

  과학의 이러한 행적은 사회, 경제뿐만 아니라 의학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당시 기계론적 구조사상은 신체기관을 공장화 시켰고, 대량생산 가능한 공장은 생산품을 많이 만들고 강해야 좋은 것이었다. 따라서, 질병은 신체기관의 낡음이나 약함에서 온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조와 맞불려 파스퇴르의 '질병세균설'이 학계에서 인정을 받게된다. 파스퇴르의 질병 세균설은 한가지 질병에는 한가지 바이러스로 인해 생기며, 그 바이러스를 없애면 질병도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당시의 기계론적 관념에서는 부속품인 인체에 고장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바이러스가 침투해 부품을 마모시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바이러스를 없애고, 쓸 수 없는 부품은 빼내어 버리면서 그 자리에는 새 부품으로 교체하면 모두 해결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바이러스를 한번에 모두 전멸시킬 수 있는 '마술적 탄환'을 목표로 삼게 된다.6)  당시 여건에 힘입어 여러 가지 의학기술이 탄생하였고 이것들은 작은 수의 성공률이지만 상대적으로 성공률이 눈에 보이지 않았던 민간요법에 타격을 주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하지만 생명은 위와 같이 하나만이 통하는 닫힌 체계가 아니며, 모든 것이 공존하면서도 하나로 느껴지는 열린 체계이다. 이는 김용욱의 『동의수세보원』에 있는 '도랑과 파이프'를 인용한 글에서 쉽게 이해할 수가 있다. 그는 한의학을 도랑으로, 서양의학을 파이프로 바라본다. 원리는 간단하다. 서양의학은 질병이 생기면 그 발생부분만을 치료하고 그 부분을 강화시킨다. 따라서 이를 외부세계와 단절된 상태로 하나로만 연결되는 파이프로 비유한 것이다. 이에 비해 한의학은 질병이 발생한 부분과 그것과 연관이 있는 모든 부위를 다 치료한다. 또한 질병은 약하다고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강해서 다른 부위의 기능을 제대로 못함에서 오기도 한다고 본다. 이것이 도랑으로 표현된 것이다. 도랑은 하늘로부터 열려있다. 하늘에서 비가 오면 비를 받아들이고, 눈이 오면 눈을 받는다. 온도가 추우면 얼고, 따뜻해지면 녹는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물이 넘치면 도랑가를 파헤쳐 물을 빼줄 수도 있다. 하지만 파이프는 물이 너무 많아지면 터지게 되고 너무 추워도 터지게 된다. 이것이 도랑과 파이프의 차이이며 사람을 자연과 분리시키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른 차이이다.7)

  이러한 열린 체계의 생명적 패턴은 진화과정을 통해 다시 살펴 볼 수가 있다. 진화가 돌연변이에 의한다는 기계론적 관점에서는 돌연변이가 상대적으로 강하다 하더라도 유전을 통해 점점 사라지게 된다. 따라서 진화를 그 개체의 변화로 바라볼 문제가 아님을 알 수가 있다. 진화는 기생자와 숙주간의 타협을 통해 이뤄진다. 이들간의 협상은 더욱 큰 힘을 발산하게 되고 이 힘은 자연선택을 가능하게 한다. 숙주 안에 기생자가 침범하여 서로를 적대시하면 그것은 '질병'을 일으키지만, 만약 서로가 서로를 통해 이득이 생긴다면 이로운 관계로의 체제개선이 이뤄진다. 이를 통해 두 개체간의 합의가 우수한 한 개체의 진화로 발전하는 것이다.

 

  2)박테리아의 반란

  데카르트적 세계관을 통해 질병을 바라본다면 질병은 어떤 투약물이나 기관의 교체를 통해 치료 가능한 것이다. 이들은 A라는 질병엔 a의 약을, B라는 질병엔 b라는 약을 투약한다. 그리고는 박테리아가 전멸될 것이라는 승리감에 도취하였다. 하지만 요즈음에도 말라리아, 페스트 등의 각종 후진국형 전염병이라 불리어지는 급성 전염병이 후진국에서뿐만 아니라 선진국에서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눈부신 현대 의학의 힘으로 전멸된 줄 알았던 여러 가지 급성질병들은 자신들의 종족 보존을 위해 숨어있었다.

  어떠한 생명체든 자신의 생명이 위태롭다고 느낄 경우,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만 있지는 않는다. 위험으로 벗어날 때까지 그들은 숨죽이고 지낼 것이다. 그리고 환경적 요건이 맞는 때가 되면 다시금 번식을 시작하는 것이다. 유전자는 자신의 영속적 능력에 압력을 느끼면 새로운 조합을 만든다. 생명은 유기적이다. 딱딱하고 빈틈없는 시멘트벽이 아니다. 물렁하고 빈틈 투성이인 스펀지와 같다.

  받아들이고 내뱉는 우리의 호흡방식처럼 모두 흡수하고 필요한 것을 필요한 양만큼만 거른 후, 다시 내보내는 것이 생명과정이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며 모든 계절은 순환한다. 생명의 자연스러움을 기계론적 방식으로 해석하여 바이러스에게 강력한 공격체계를 갖추어준 것이다.

  박테리아는 아주 미세한 크기로 모든 만물과 접촉할 수 있으며, 숙주의 몸에서 기생의 방식으로 자신을 증식시킨다. 박테리아의 가장 큰 장점은 가진 것이 없으므로 쉽게 자신을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하나의 크기를 가질 때 많은 것을 움켜쥐면 그 한계성에 부딪히므로 모양과 성질의 변화는 기대하기 힘든 것과 같은 맥락이다. 박테리아는 공격해 오는 인간으로부터 자신들의 숨겨진 재능을 펼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끊임없는 공격의 강화에 힘입어 현대에는 질병의 근절이 아닌 유지나 예방으로 시선을 돌리도록 하는데 한 몫 하였다. 여기서 더 큰 문제는 우리 인체의 많은 장내균총 또한 외부 박테리아였었으며 항생체로 인해 장내균총도 죽이고 있었다. 이에 장내균총과 인체의 길고 긴 타협은 무너지고 장내균총의 반란도 시작된 것이다. 지금까지 무해하던 장내의 대장균이 독성의 병원균으로 발견된 사례들이 그 증거사례이다.

 

  3) 현대 의학의 돌이키기 힘든 과거

  무균실에서 자라난 동식물은 허약하기 그지없으며 비정상적 발육을 한다.8)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란 동식물이 강한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현대 의학의 실수와 그 영향력은 실로 막대하다. 세계의 무균실화를 꿈꿔왔던 의학계가 질병의 종식을 위해 투여한 약물은 인간의 세포의 조합들에게도 피해를 입혀 인체내의  또 다른 질병을 유발시켰다. 세포내의 미토콘드리아도 먼 옛날엔 세포 내의 조직이 아니었으며 바이러스처럼 침투했다가 서로의 필요와 이익에 의해 새로운 無機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생명은 항상 경쟁을 하는 것도 아니고, 항상 조화로운 것도 아니다. 유동성을 지닌 이러한 생명을 기계로 간주한 과학적, 의학적 실수로 우리는 현재까지도 잘못된 교육과 사회 속에서 그로 인한 피해를 직접적·간접적으로 받고 있다.

  우리가 질병을 하나의 생명 유기체의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면 이제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벗어나 휴전을 할 수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전환은 질병을 새롭게 정의할 수 있음을 뜻한다. 숙주가 건강하다면 기생자인 바이러스는 숙주와 서로 공생관계로 정착하던지 아니면 숙주의 몸 속에서 나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건강하지 못하다면 숙주와 공생하지 않고도 착취할 수 있다. 질병은 이때 발생하는 것이다.

  육체적 건강만을 최고로 생각한 기계론적 의학은 정신적이고 환경에 의한 상태변화의 힘을 인식하면서도 무시하고 있다. 병이 발병하기 전을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현대의학은 이제 새로운 발상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민간 의학요법 등에서는 병이 발생하기 전에 주변 환경의 건강성을 고려하며 환자 상태의 호전만 아니라 주위환경의 치료도 뒤따름을 인식하고 항상 주의를 기울인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하는 것이라는 말은 건강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 보기에 좋은 문구라 여겨진다. 환자의 정신적 치유가 병을 이길 수 있는 '자기 치유'를 가능하게 한다.9)

  하지만 현대의학은 환자의 정신적 믿음을 너무도 무시하고 있다. 의학계는 환자의 몸을 기계덩어리로, 의사를 수리공으로, 병원을 공장으로 만들어 왔다. 때문에 정신과 환경은 무시되어졌고, 단지 이윤을 위한 수리를 행하는 것이다. 또한, 사회 속에 뿌리내린 기계적 사관은 이러한 의학계를 깊게 이해하지 못한 채 단지 상품으로 취급되는 자신들에 대한 서비스 강화만을 논하고 있다.

  차별화된 의학의 엘리트화를 현대사회는 맹신하고 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핵심을 파악하지 못한 대중들에게는 수박 겉핥기식의 의료행위의 변화가 우리의 과제이다. 현대 의학계는 자신들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인식하고 있지만 자신들이 쌓아올린 성과 아닌 성과가 사라져버림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이를 바꾸고자 하는 혁명적 의료행위자들에겐 거대한 의학계가 방해할 뿐만 아니라 기계론에 세뇌된 대중에 의해 그 변화는 더욱 힘들어지고 있다.

  

Ⅲ. 위기에 선 다양성

 

   3.1  최고이어야만 최선인가?

  

현대인의 신앙인 기계론적 사관은 그 단계가 있다. 첫째 단계가 사고의 기계식 정렬이다. 서구세력이 힘을 쓰지 못하던 시대에는 우리 전통문화에선 결과보다 목표를 향해 열심히 정진하고 수행하는 과정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을 평가했었다. 덕망있고 인격수양이 된 사람이 빈곤하게 살더라도 그를 백성의 신임을 잃은 임금보다 공경하였다. 이는 최고의 결과나 눈에 보이는 최고의 위치보다는 최선을 다한 자에 대한 인정을 의미한다. 숫자로 나타낼 수 없는 인내와 노력의 결과물은 인정될 수 있었던 시대가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현대의 기계론적 사상의 흐름은 인간을 생산도구로써 가치평가의 등급을 나누고 1등만을 인정하고 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라"라는 말속에는 우리의 시대상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과정은 무시되고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기계론적 관념은 효율성만을 고집한다. 정해진 양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이용해야 많은 잉여물이 만들어지는 지만을 고려할 뿐이다. 생산품은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의 생태적 문제들도 효율성만을 중시한다. 그 예로 다이어트의 경우, 며칠간 급격한 단식을 통해 실제적 수치는 줄지만, 이에 따른 신체 생리의 변화가 일어나 요요현상이 생긴다.

  앞서 살펴본 의학과 질병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죄수의 딜레마'10)에서처럼 나쁜 종족이 없는 집단에서는 서로가 최고의 이익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집단에 기생자가 한 명이라도 생기면 이 집단에서, 그리고 다른 조건 경우의 기생자중에서도 가장 큰 이익을 얻게 된다. 즉, 모두 선하다는 조건에 한 명의 배반자는 어떤 경우에 있는 개인보다 훨씬 많은 이득을 얻게 된다. 때문에 가장 선한 자들의 집단에는 배신자들의 수가 늘어나게 되고, 천국은 잠시간의 이데아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기생자만 있는 사회가 이익이 높은 것도 아니다. 서로 불신하는 집단에서는 개인들의 이익만을 챙기기 때문에 협동에 의한 이익의 증가곡선이 통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생명체를 다루기 위해선 각각의 유기체가 항상 나에게 아군도, 적도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많은 수가 숙주로 존재하면서 서로 유기적 관계를 맺는 가운데, 적은 수의 기생자를 내포하고 있으므로 해서 숙주와 기생자간의 공생적이지는 않더라도 서로 경계하면서 진화하는 것이 생명의 패턴이다. 그 수의 비율은 항상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 또 하나의 생명특성이다. 그 비율은 작은 폭의 흔들림을 통해 생명이 살아있음을, 그리고 그 생명이 살아가는 사회 또한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숙주만의 사회는 기계론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이데아적 사고체계이다. 기계적 사고체계에서는 이데아를 최고로 평가하지만, 그것은 이뤄질 수도 없으며 이뤄진다고 하더라도 한 순간에 터질 물거품인 것이다. 생명은 완벽을 추구하려는 움직임 속에서 이론적인 완벽함을 초월하는 신비로움을 가진다. 완벽이란 최고가 아닌 최선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3.2 교육의 획일화

  

 100점의 성적표를 가질 수 있는 아이들은 많다. 그 아이들의 집단은 누가 1등인가에만 급급하며, 아무리 노력해도 1등은 없다. 더 이상의 발전은 기대할 수조차 없다. 0점의 성적표를 가질 수 있는 아이들도 많다. 하지만 이들은 최선을 다해 100점을 목표로 정진한다. 회고를 고집하는 사회에서의 노력은 그 가치가 클 수가 없다. 하지만 최선을 추구하는 사회에서는 유전자의 다양성을 가진 생명체의 특성을 존중하므로 타인과의 비교우위가 아닌, 개인의 발전에 그 가치를 두며 이는 같은 종끼리의 경쟁보다는 서로 다른 특성을 인정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게 된다.

  생명의 특성을 이해하는 사회란 기계마저도 생명체의 원리로 바라볼 수 있는 사회일 것이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교육도 인성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며 사회생활에 밀접한 경험이 교육과정의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기계적인 현대사상의 흐름을 추종하는 이들에겐 최고의 사상을 자신의 아이들에게도 강요한다. 물질적이고 기계적인 사고는 각 민족, 인종, 성, 나이 등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으므로 다른 성향의 생명체를 획일적으로 나누어 버린다. 이것은 사고의 전환이 쉬운 아이들에게부터 철저히 교육되어 사고의 틀이 굳어지는 순간부터 교육은 정지되며, 이들은 기계적, 물질적 사회에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을 팔기 시작한다. 그러한 교육을 받은 아이들은 사회에 적응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이들을 똑같은 방식의 교육으로 가르치도록 선도한다.

  우리는 미국이나 유럽, 혹은 소련과는 색다른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한민족이라는 유대감, 한의 역사와 백의 민족이라는 민족성, 그리고 가부장제와 장유유서를 지닌 민족이다. 유교가 좋고 나쁜지를 따지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싫다고 거부해도 우리의 사상 기반에 깔린 피와 문화이다. 미국의 개방성, 유럽의 다민족성, 서구와는 다른 노인 공경이 아직도 존재하는 사회이다. 유럽의 구름이 낀 하늘과 축축한 날씨에 걸맞는 의식주와 우리 나라와 같이 사계절이 뚜렷하고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하는 의식주는 너무도 다르다. 자기가 태어난 지역의 땅을 밟고, 그곳에서 자란 음식을 먹고, 그에 따른 문화에 어울리다가 그 땅에 묻히는 자연스러움을 인간의 정신기반인 교육이 이를 경시하고 있다.

  모든 환경이 다르다 못해 정신의 기반인 언어가 다름은 당연하다. 북극의 에스키모인들이 '눈'을 표현하는 단어는 수십 가지이다. 그들에게 그 언어들은 모두 다르게 느껴지며 차이를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 단어들은 유사어에 속할 뿐이다. 반면, 우리 나라는 사계절을 가지는 환경요인으로 자연의 색 변화에 민감하여 색을 나타내는 단어가 발달하였다. 노란 색은 노랗다, 노르스름하다, 누렇다, 샛노랗다, 누리끼리하다 등 약간의 음운 장단에 따라서도 그 의미가 다 다르며 한국인이라면-혹은 그 언어와 환경을 이해한다면- 그 차이를 모두 알고 있다. 이러한 언어 차이는 그 언어를 쓰는 문화권의 사람들의 정신적 영역까지 통일성을 갖게 한다. 이는 정신의 영역은 언어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사물을 떠올리는 것도 언어를 통해 이뤄지며 현상으로 존재하지 않는 부분도 언어로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에 정신의 영역은 언어와 관련이 되는 것이다. 때문에 언어 이해의 차이와 문화권의 차이는 불가분의 문제인 것이다.

  또한 민족적 종교의식도 마찬가지이다. 환경에 따라 각 민족은 각자에 맞는 종교적 의식이 있으며 이는 민간요법과도 일맥상통한다. 고대시대의 부락의 족장은 종교 의식과 치유자의 몫을 함께 해왔다. 이러한 민족의 차이를 거부한 기계론적 사관에서 그 민족의 우수성과 특별함은 무시되었다. 단지 힘으로 지배할 수 있는 것만이 우수했고, 1등이 최고인 것이다.   이들은 획일적인 교육을 통해 전세계의 아이들을 등급화시키고 IQ를 따진다.

  1+1=2 라는 기계적인 발상을 지금도 전세계의 아이들이 암기하고 있다. 하지만 물방울 하나와 물방울 하나가 합쳐지면 좀 더 큰 물방울 하나라는 사실은 우스운 말장난이 되었다. 한 사람의 능력과 한 사람의 능력이 합해지면 세 사람의 능력이 될 수 있음을 알지도 못한다. 아이들의 머릿속에는 점이 하나의 연결된 집합이 선분이고, 한 점에서 같은 거리의 점들의 집합이 원임이 기억되어 있다. 하지만 1차원의 점을 확대하면 3차원의 면이고 끝없이 학대되는 순간 점은 하나의 거대한 우주와 같음을 알지 못한다. 또한 우리 나라의 아이들의 경우, 사계절은 모두 3개월을 주기라고 생각하며 우리 나라에만 살고 있는 토종 물고기나 식물군에 대해서는 하나도 아는 것이 없다. 또한 겨울에 김장김치를 담는 것은 알아도 그 겨울이 날짜라는 수치로 나타나야 이해를 한다. 하지만 윤구병 선생의 말처럼 김장은 감나무 꽃이 질 때 하는 것이 좋다는 얘기처럼 그 지역의 환경에 따른다.11) 교육은 그 지역의 특성을 대대로 경험했던 선조의 지혜를 가르쳐야 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기계식 교육은 우리에게 최고가 이 세상의 핵심이라는 것을 가르쳐 왔다. 영웅주의, 우월주의 등 엘리트식 교육을 통해 기계론적 사상은 그 기반을 더욱 튼튼하게 다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도퇴되는 것들은 모두 폐기 처분되는 것이다. 우리의 아이가 폐기 처분될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등급이 생기면 일등이 있듯 꼴등도 생긴다. 기계적 발상은 나를 제외하고 타인을 바라본다. 나쁘다고 생각되는 일에 대해서 자신은 관찰자의 입장으로만 존재한다고 믿는다. 생명은 귀중하다고 말하면서 쓰레기취급을 받는 자신의 아이를 조용히 바라볼 수 있는 부모가 몇이나 될까? 교육은 모두에게 공통된다. 인생을 살기 위한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생활터전에서 필요한 진정한 산교육 대신에 우리 나라의 형편과 맞지 않는 선진국의 교육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3. 2 가치의 획일화

 

 지금까지 과학적, 사회적, 교육적 측면들 모두가 기계론적 사고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이 모든 것의 지배적인 원인이 데카르트의 이원론에만 속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시작은 이원론이지만 진행과정에서 이원론을 통한 '부'의 축적이 그 핵심적 원인이다. 앞서 논의했던 과학도 자본과의 관계를 통해 기계적 발상을 현실로 옮기게 되었고, 사회문화도 부의 축적을 위해 화폐경제가 지배하게 되었으며, 교육마저 인성과 정신교육을 버리고 부의 지배논리를 이해시키는 기반을 닦는 하나의 도구로 전락하였다. 정신문화라는 예술이나 문학도 돈을 떠나서는 가치를 평가할 수가 없는 사회이다. 액수가 큰 예술품일수록 그 예술가는 찬양받으며 그의 풋내기 작품도 화폐가치가 상승하게 된다. 그것이 예술적 면모를 지니건, 미완성이건, 장난으로 행하건 그것은 상관없는 것이 된 것이다. 정신적 기반의 가치조차 돈으로 환산되어지는 사회 속에서 우리의 생활이나 인간, 환경 등은 당연하게 돈을 제외하고는 그 가치를 측정할 길이 없다.

  똑같은 기능을 가진 시계라 할지라도 메이커라면 그 가격은 수십 배가 오르며 시계를 판매하는 사람이나 구매자, 그리고 구매자를 바라보는 사람 모두가 구매자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며 사회적으로 그를 인정한다. 그 사람이 거리에 쓰레기를 버렸는지, 성격이 괴팍한지는 상관없는 일이 되었다. 사람과 자연처럼 국가도 돈으로 가치가 정해진다. 그 나라의 물이 얼마나 맑은지, 국민들의 인간적 유대감이 얼마나 깊은지는 가치없는 질문이다. 우리의 세계 사회는 그 나라의 자원의 사용가능성이나 등급이 우수한 인간들이 얼마나 있고 자본을 많이 모은 거대 기업은 얼마나 있는가에만 관심이 쏠리며, 그러한 등급을 나누고 등급의 순위대로 국가의 힘이 정해진다. 그리고 1등의 국가를 추종하고 쫓아가기에 여념이 없다. 세계화란 다름 아닌 돈으로 환산 가능한 가치척도의 지구통일을 의미하는 것과 다를 바 없게 된 것이고, 소위 선진국이라는 국가들의 사회문화와 정치경제 등을 통일시켜 하나의 지구국가를 건설하자는 것이다.

 

 Ⅳ. 불안정한 사회

 

    4.1  못할 것 없는 사회

  

  가치관 확립은 그 개체가 속한 사회의 영향을 받으며, 이는 곧 개인의 성향과 사상을 지배한다. 현대의 기계적, 몰인간적 가치관으로 개인은 급수가 매겨지고 상품처럼 판매된다. 임금은 기본 생활의 수단인 노동의 축적 가능한 보상으로써의 의미와 노동자의 등급을 환산해주는 수치라는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현대 사회의 노동자는 전자에 비해 후자에 속해 있으며 노동 자체의 가치나 보람보다는 노동에 따른 임금의 양으로 노동을 택한다. 따라서 인간은 임금이라는 몸값이 정해지는 것이다.

  인간은 상품이다. 이러한 사회사상이 전반적으로 대두된 상황에 개인들은 다른  개인을 경쟁자로 인식하고, 그 경쟁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다른 개인을 밟고 올라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최고는 상위 몇%에 한하는 자만을 뜻하고 이는 대부분이 최고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다수는 최고의 소수들을 위한 들러리이며 그들 사이에서는 또다시 경쟁이 발생한다. 그들의 목표는 최고가 아니라 사회에서 버림받지 않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것이다. 최고를 바라보고 사는 사회 속에서 낙오자들은 사회에서 무시당하게 되고 경제적이고 정신적인 면 모두에서 인정받지 못한다. 이러한 사회 환경은 집단을 구성하는 개체에게 있어서 커다란 위압감을 조장한다.

  "1등이 되어야 한다." "낙오자는 필요 없다."

우리 사회의 분위기는 최고를 위해 달리고 있으며 시대에 뒤떨어지는 사람을 무시한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많은 사람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 성공한 삶이며, 그렇지 못한 이는 누구하나 거들떠보지 않는다. 이 때문에 모든 사람은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인정을 받기 위해 발버둥친다. 그 인정이란 사회적 결함으로 인해 후덕함이나 지혜로움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비싼 부동산을 가지고 있는지, 대기업의 주식을 어느 정도 가졌는지를 따지고 많이 가진 자에 대한 인정이다. 즉 돈으로 환산해서 많이 소유하거나, 환산이 불가능한 지적 소유에 대해서는 그 지식을 이용해 돈을 얼마나 벌어들일 수 있는지 가늠하여 돈이 많은 순서로 부를 측정하고 인정한다.

  현대사회에서는 행복도 돈이 지배한다고 믿고있다. 돈이 있어야 행복하다고 믿는 이 사고는 자본주의의 행복 만들기란 소비하는 형태로 나타나야 함을 그 기반으로 한다. 대량생산은 대량소비로 이어지고 소비자는 필요한 물품을 소비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산자의 부추김에 이끌려 필요없는 물품도 소비하게 된다. 또한 복잡한 사회 속에서도 기술발달이라는 편리성의 추구로 인간들 중 돈이 많은 자는 노동을 할 이유가 없게된다. 따라서 노동과의 단절만이 이 사회에선 지상최대의 목표로 떠오르고 인간들의 나태함은 계속 증가되었다. 많은 여가시간과 노동의 부족은 사회적·의학적 문제를 일으켰다. 운동부족과 여가활용의 계급화 등이 그것이다. 노동을 통한 에너지 소비는 인간의 생명유지임에도 기계적 사고에선 빈곤의 상징이 되었다. 돈 많은 자본가 세력들은 특권의식을 느끼고 거기에서 행복을 찾게 되었다. 따라서 돈의 소유는 인간의 행복과도 관련이 생긴다. 이런 사회적 차별성은 각 개인에게 생명유지를 위한 노동활동보다는 유흥을 위한 노동과 소비를 위한 노동으로 노동의 가치를 전락시킨다.

  노동의 가치가 하락된 이상 사람들은 노동을 원하지 않게 되며 돈을 위한 경쟁만을 택하게 된다. 이는 범죄의 증가를 의미하기도 한다. 돈만 있으면 인정받는 사회, 방법과 과정을 무시하는 사회에서 돈을 어떻게 벌었는지는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아니다. 방법이야 어떻든 돈을 구해 쓰기만 하면 쾌락이 생기는 세상이다. 돈을 훔치든, 남의 정보를 빼내든, 남을 속이든, 지나친 경우 사람을 죽이든 모두 돈을 구하는데 혈안이 되어버렸다. 한낱 종이에 불과한 돈은 어느 순간 권력도, 생명도 살 수 있는 만능키가 되었다.

  더 큰 문제는 시비를 가릴 수 있는 성인도 범죄를 택하는데 가치관 확립이 되지 않은 청소년이 범죄를 안 저지르라는 법칙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범죄사건을 보며 사회가 썩었다라고 말한다. 아담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의 파괴력은 사회뿐만 아니라, 사회 구성체의 파괴도 서슴치 않았다. 우리 사회가 썩었다면 자신이 썩지 않았다고 자신있게 대답할 사람이 얼마나 될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4.2 왕따를 만드는 사회

  

 인간이 단세포 생물체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더라도 살아가는 과정에서 복잡한 구조로 말미암아 복잡하고 다양한 환경이 주어져야 살아갈 수 있는 전제조건이 생긴다. 복잡한 신체구조와 정신수준은 환경여건에 많은 제한성을 가진다. 따라서 인간이 그 집단인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육체적, 정신적인 공감대형성이 필요하다. 즉, 인간은 살기 위해 의식주를 갖추어야 하되 자기가 속한 집단에서 정신적 친밀감인 유대감을 가져야 한다. 유대감은 가치관 성립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사회환경적 요인중 하나이다. 현대인들간의 유대감이란 대부분 돈에 의한 것이다. 가정과 종교를 제외한-종교도 세속화되어버려 집단 이기주의의 표상으로 떠오르고 있으며, 가정에서도 돈에 의해 반인륜적인 범죄행위가 속출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집단은 돈을 벌기 위해서 이루어졌거나, 간접적으로 돈을 이용하는 형태로 존속하고 있다.

  이는 앞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사회범죄인 법적인 문제를 일으키며, 더 심각한 문제로 비도덕적 행위를 보편화시켜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 실례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왕따'를 들어보겠다. '왕따'라는 의미는 집단 속에서 어떤 특정한 개인을 무시하는 행위로 그 개인을 제외한 다른 개인들이 집단적으로 따돌리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속한 집단에게 인정을 받음으로써 유대감을 형성하는데, 집단군에서 따돌림을 당하면 당연히 그 사람은 심한 외로움과 이질감으로 그 집단과의 관계를 제대로 이룰 수가 없게 된다.

  우리 현대인은 대량이라는 말을 싫어하는 반작용으로 개성을 중시했다. 그러한 시대적 배경이 우리의 청소년에게 개성을 강조했고, 그 결과는 '튀는 세대' '버릇없는 문제아'로 나타났다. 이는 사회전반이 돈으로 움직이는 가운데 개성만을 강조한 나머지 물질적으로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는 세대를 만들어 냈다. 소위 X세대라는 세대적 차별성을 지닌 또래집단을 기점으로 해가 지날수록 청소년을 한 세대로 지정하고 차별화를 시키고 있다. 현대의 그러한 청소년 또래집단은 다른 세대에 비해 생각이건 외모건 남다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네들 집단 속에서는 절대 남달라서는 안된다. 즉 그 집단 속에서의 룰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것을 어길 경우 바로 '왕따'가 되는 것이다. 요즘의 여자 중고등학생들은 교복을 입되 입는 방식이 있다. 몸에 딱 달라붙도록 맞춰 입고, 깻잎머리와 상투머리에 비슷한 분위기를 가진 메이커 가방과 신발을 착용하며 그들만의 은어를 사영하면서 그들간의 유대감을 형성한다. 그런 유대감을 가지지 못한 '왕따'는 모든 사회활동 전반에서 제외되며 집단 구성원들의 관심을 끌 수가 없다. 오히려 미움과 박대를 받으며 심지어는 욕설과 심한 모멸감을 받기도 한다.

  X세대 등의 언어는 우리의 청소년이 만든 것이 아니다. 그러한 신종 사회언어는 사회 속에서 어느 정도 타인에게 영향력을 끼친다는 지식층이나 언론인이 만들고 퍼뜨렸다. X세대에 속한 나이를 가진 청소년은 모두 그러하며 모두 그렇게 해야한다는 듯 매체를 통해 사람들을 세뇌시켰다. 이들은 단지 사회에서 청소년이라 지칭되는 사람들일 뿐이다. 과거의 인간적인 집단에선 '장유유서'라 하여 어른과 아이 사이엔 순서가 있다고 했다. 우리는 이것을 해석할 때 나이로 어른과 아이라는 두개의 집단을 나눈 뒤에 그 두 집단의 사이에는 차례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거의 '장유유서'란 절대적 집단으로 나누지 않고 상대적인 개념으로 두 사람간에는 예절을 지킬 순서가 있다는 의미였다. 또한 이것은 상대의 나이에 국한된 개념이 아니라, 나이 많은 조카가 꼬마 삼촌에게 절을 하며 높임말을 쓴 것을 보고 알 수 있겠다. 이것은 나이별로 나누어 그 또래집단을 묶은 뒤, 그 성향을 따지는 기계론적 사상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나이별로 사회구성원을 나누고 그 구성원의 성향을 수치로 나타낸 후 보편화시키고, 다시 그 수치를 구성원들에게 강요시키는 기계적이고 물질적인 사회의 문제점은 필수불가결한 결과일 것이다.

  이러한 영향이 더욱 심각해져 모든 세대층에선 '왕따'가 되지 않기 위해 미리 '왕따'를 만들어 자신의 안정을 도모하는 경우가 생기기까지 하고 있다. 사회로부터의 격리는 곧 인간으로부터의 격리이다. 때문에 '왕따'가 하나의 사회적 이슈로 자리잡았음은 속한 집단 구성원 모두가 자신의 일이 될까 두려워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고와 가치관의 차이는 '왕따'를 만들어 버리는 사회가 되었다.

 

   4. 3  보장되지 않은 내일

 

  개인은 하나의 우주에, 생태계에, 인간에, 그리고 사회집단에 속해있다. 그 개인의 우주의 흐름에 따라 탄생하고 살아가다가 죽는다. 탄생과 죽음은 자연에 힘이며 그 시간을 인간의 힘으로 늘이고 줄이고는 할 수 있으되 그것은 기껏 며칠이라는 시간에 불과하며 결국 모든 인간은 죽는다. 어찌되었든 개인이 생을 살아가는 이유는 바이러스가 종족번식을 하듯 번식의 이유라고 할 수도 있지만, 정신의 고도진화로 인해 그 이유는 복잡해 졌다. 이에 따라 삶의 가치와 중요성도 복잡 다양해졌으며, 각각의 사회들은 이런 복잡한 사회를 효율적으로 다루기 위해 개인들을 상품처럼 여러 종류의 집단으로 나누어 분류하고 그들을 분석한 뒤 수치로 나타내고 평가한다. 그것이 현대 전 세계적 흐름이며 이것이 자본주의의 변질된 모습일 것이다.

  사회주의가 생태적인 인간의 욕구를 무시한 이상적 목표의식에 치우친 사상이었기 때문에 그 막을 빨리 내렸다고 하지만, 자본주의 역시 생태적인 인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마침표를 찍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이다. 인간의 욕구 충족을 이해한다는 기치로 대중을 현혹시키고는 대중을 기계화시켰다. 기계화 상태에서는 욕구라는 의식도 정해졌으며 예상 가능하여 미리 예방할 수 있다. 지금까지 자본주의가 싹튼 이래로 그 사회들은 인간을 기계처럼 어떻게 하면 더 효율적으로 사용이 가능한지에 대해 연구하고 이용하였다. 실제로 그들은 크나큰 성과를 얻었고, 자본주의란 부를 보장해 주고 인권을 보호하며 모든 자의 평등과 자유를 인정한다고 믿게끔 만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보장되었다고 하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총기 사건·사고나 많은 범죄율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왜인가? 그것은 사회도 생태계이기 때문이다. 사회는 인간군의 생태계이다. 따라서 범죄가 뿌리뽑히길 바라는 것은 사회생태론적 입장에선 인간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다.

  지금 현대를 방건웅은 "모두가 핑핑 도는 소용돌이 속에 빠져 있어 자신의 위치를 짚어볼 여유가 없는 상태에서,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처럼 엄청난 폭발이 도사리고 있는 한가운데를 향해 돌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라고 표현했다.12) 이는 현대의 불안정한 사회체계를 뜻한다. 또한 여기에 속한 사회구성원 대부분이 심각한 스트레스로 정신병이나 만성질병을 가지고 있다. 사회구성원의 대부분이 정신적으로 혹은 정신적 강박증세에 따른 육체적 질병으로 건강하지 못한 이유는 자본주의 체제와 전혀 상관없는 문제들인가? 범죄로부터 대중을 보호하기 이전에 개인을 인간적으로 대하는 사회를 만들어 범죄자를 만들지 않는 것이 더 올바른 것이 아닐까?

  현대사회는 무언가를 보장해주는 듯한 분위기를 제시하고, 이에 대해 의문을 품는 자와 반발하는 자를 사회적으로 적응하지 못하는 자로 취급해 버리고 이들을 경멸한다. 보장해 준다는 믿음은 서로를 믿을 수 없는 외로운 현대인에게 커다란 지주이며 신앙이다. 하지만 현대 의학, 사회, 경제, 정치 등 모든 측면에서 진정 우리 스스로가 해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이 사회에서 손을 떼고 고립된다면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으로는 아무 것도 혼자서 해낼 수 없는 고철덩어리가 아닐 수가 있을까? 보장없는 하루하루를 현대인은 의식적으로 자신의 삶과 미래가 보장되었다고 되뇌인다. 하지만 많은 수의 현대인이 적어도 1, 2개의 보험을 들고 있는 상반된 행동의 모순을 보면 현대인의 불안정한 심리상태를 엿볼 수 있다.

 

 Ⅴ. 자연 보호의 허상

   

    5.1 경제와 환경의 관계

 

  지금까지 다뤘던 기계론적 이원론과 산업혁명은 인간의 사회문화 속에서의 피해만 준 것이 아니다. 자연과 인간의 분리는 인간과 자연 모두를 기계적 이용도구를 전락시켰다. 자연은 생산을 위한 수단과 원료를 제공하는 도구적 가치만을 지니게 되었다. 1차 산업의 원동력인 자연은 경제구조의 가장 중요한 기반임과 동시에 모든 자원이 다 사용된 뒤 그것을 처리하는 곳도 자연의 몫이다. 경제가 아무리 발전하다 하더라도 음식물을 섭취하는 인간의 생태학적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우리는 자연의 도움없이는 살 수 없다. 또한 2차 산업도 1차 산업을 모태로 한다. 서비스업도 다를 것이 없고, 관광산업은 두말할 나이도 없다. 원류는 모두 자연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이는 물리적인 도움뿐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서도 인간적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연이 함께 해야한다는 것이다. 이에 더불어 마이어-아비히는 "인간은 인간의 인위적인 사회에서가 아니라 동식물과 공기, 물, 하늘과 땅과 더불어 사는 자연스러운 공동체에서만 비로소 참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13) 때문에 산업혁명은 경제적 혁명이긴 해도 자연적 측면에서 볼 경우 혁명의 단어를 쓸만한 가치도 없다. 게다가 자연의 힘을 빌어서 발전한 산업은 생산 과정에서 생기는 폐기물과, 생산물을 소비한 뒤 생기는 쓰레기를 처리하지 않고 그대로 자연에 방치해 두었다.

  자본주의는 대량생산으로 원가 절감을 생각하고 기계설비의 도입으로 인건비를 줄이는 것만을 따지면서 이를 효율적이라 여긴다. 생산과정시 산출되는 공장하수와 폐기물, 그리고 대기오염에 대한 조치는 물론 소비후의 쓰레기에 대한 재활용은 더더욱 생각치 않았다. 생산비 절감은 환경파괴로 이어졌고, 현대 자연환경은 심각한 생태문제로 치달았다. 과거의 그릇된 사상이 현대인에게 새로운 과제와 고민을 안겨준 것이다. 그러한 심각성의 대두가 요즈음 들어서야 환경오염에 의해 피드백되어 인간에게 피해사례가 생기자 오염에 관한 법적 규제를 실시하고 있다.

  런던 스모그사건은 대기오염 중 가장 큰 피해사례일 것이다. 산업혁명의 핵심이었던 영국의 런던에선 수많은 공장에서 대량 생산물을 쏟아냄과 동시에 엄청난 유독가스를 방출했고 런던은 유독가스로 뒤덮인 스모그 도시가 되었다. 1952년 12월 스모그 도시 런던은 1개월간 1만 2천여 명이 사망했으며, 그 이후 스모그가 사라질 때까지 사망자는 계속 발생했다.

  이러한 환경오염의 사례는 선진국이라거나 후진국이거나 할 것 없이 발생하고 있으며 후진국의 경우 현대에 들어 더욱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선진국은 이미 환경오염의 문제점을 직접 실감했다. 많은 생산품들은 생산과정에서 많은 유해물질이 발생하여 더 이상 생산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생활품들은 계속 소비가 있었고 이 소비를 맞추기 위해 기업들은 후진국에 하청을 하여 생산하였다. 때문에 선진국은 대부분의 산업공장을 자신의 나라에서가 아니라 후진국에서 생산하게 된다. 즉, 돈으로 후진국의 자연환경을 사들인 셈이다. 또한 후진국의 경우, 자본과 기술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자연환경을 이용해서 그 나라 경제를 꾸려 가는 방법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하청을 받거나 자연환경을 파괴하면서 그들은 그 나라의 경제를 지탱하는 것이다. 석유나, 나무, 물 등을 무차별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지구 산소의 대부분은 아마존에서 공급되고 있는 실정이지만 그 강을 소유한 브라질은 GMP를 올리기 위해 우림 지역의 나무를 베어내고 있다. 1초에 축구 운동장 2개의 면적으로 우림 지역은 사라지고 있으며 지구의 산소공급량도 줄어가고 있다.14) 이에 선진국과 자연보호단체들은 후진국의 자연훼손에 대해 질책하고 있다. 하지만 후진국의 입장에선 어쩌면 당연한 일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인 것이다. 후진국에게는 생산품의 수입을 강요하면서 후진국에게 기술이전은 해주지 않는다. 후진국은 전자기계에서 그 나라의 주식인 곡물까지 수입을 해야하는 상태에 놓인다. 기술도 없으며 대량으로 키워진 값싼 곡물을 수입하게 된다. 그들의 수출품목은 공해가 많이 생기는 생산품이나 자연자원, 그리고 인력이 전부이다. 이들이 세계경제구조를 따라가는 한 그들은 후진국의 자리를 면할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선진국의 기득권에 의해 이루어진다. 기득권을 빼앗기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에겐 도덕성이나 인도주의란 가치없는 얘기인 것이다.

  이를 여실히 보여주는 예가 세계 환경법이다. 세계경제 측면에서 선진국은 아주 이상한 제도를 합법화시켰다. 갑자기-그들에겐 계산된 시간이었을 것이다.- 오존층 파괴의 주범이 프레온 가스이며 이를 방출하는 원인이 되는 산업에 대해서 법적 규제를 선언한다. 하지만 선진국에선 이를 법적 규제로 강령하기 전에 상당량을 이미 방출한 상태였고, 이로 인해 오존층이 구멍이 난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법적 규제 후, 이를 처리하는 비용에 대해선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더욱 이상한 점은 그 법의 내용이다. "프레온 가스의 기준치를 각 나라의 전년도 발생량"으로 잡았다는 점이다. 이는 엄청난 양을 발생시키는 선진국에게는 계속 그만큼의 양을 쓰도록 하는 것이며, 동시에 이제 프레온 가스를 사용하기 시작한 후진국에겐 아예 쓰지 못하도록 힘으로써 강요한 것이다. 또한 대체품을 연구하여 발명한 선진국은 그것을 상업화하여 판매하기에 급급하다. 그들은 세계의 오존층이 구멍이 뚫리는 것은 상관이 없다. 돈을 모으는 것이 급선무이다. 이들 선진국은 이미 인간적 인류애는 없다. 단지 자신들의 기득권 획득을 위한 세계평화와 안녕을 도모한다. 지구의 자연 생태계가 파괴되는 것은 자신들의 책임도 아니며 따라서 죄책감도 없다.

 

   5.2  자연보호, 누구를 위한 것인가?

  

  "자연은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보존해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TV속에 나오는 공익광고는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해 온 자연보호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자연환경을 인위적으로 아끼고 가꾸는 것이 진정으로 자연을 위한 것이 아님을 이제 깨달은 듯하다. 자연은 스스로 그렇게 되고, 그렇게 될 것이다. 우리 인간이 꾸며주고 사랑해 주는 것이 아니다. 그저 바라만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 자연이다. 하지만 극적인 기계론의 대응으로 많은 사람들이 "도구적·분석적 이성, 즉 비감성적이고 느낌없는 유형의 이성을 혐오하면서 이에 대한 대안으로 우리는 애매한 직관에 호소하거나 신비주의적인 신념은 도구·분석 이성과 달리 자연 세계와의 상호 연관성이란 호혜적인 느낌, 나아가 자연을 돌보려는 태도 등을 만들어 낸다."15) 인간이 생태계 변화에 악영향을 미쳤다고 깨달은 사람들이 섣불리 그 생태계에 손을 데고 말았다. 멸종위기의 초식동물의 수를 늘리기 위해 육식 동물을 살생하자, 곧 초식동물의 대대적 번식이 이루어지고 그 일대의 초원은 모두 사막화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사례는 자연을 아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의 기계적 이론에 의한 결과이다.

  자연은 인간이 어떠한 목적-개인의 기본적 생존 목적을 제외하고-을 가지고 손을 데면 생태적 반응을 일으킨다. 우리가 자연환경을 위해 무언가 하려고 한다면 자연에 직접 손 델 필요가 없다. 지금까지 자연의 힘을 빌어 만들었던 것들을 모두 제자리에 돌려놓고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우리는 이제껏 너무 많은 시간동안, 그리고 너무 많은 부분을 인간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연은 거대하기도 하고, 미세하기도 하다. 환경보호는 인간의 측면에서 이루어져서는 이뤄질 수 없는 것이다. 환경기준치는 인간에게 해롭지 않은 정도로 맞추어서는 안 된다. 인간에게는 해롭지 않은 극소량의 유독 물질이 크기가 작은 생명체에게는 목숨을 위협하고도 남을 수 있는 양이 될 수 있다. 자연은 인간위주의 자연이 아닌 모든 생태계를 위한 보존으로의 목표가 있어야 하며, 이 길만이 자연과 그 안에 포함된 나를 위한 길이다.

  이에 방건웅은 이렇게 저술했다. "민간 차원의 환경보호운동도 공해를 줄여서 자연을 보호하여 사람들에게 더 살기 좋고 쾌적한 환경을 제공한다는 인간위주의 단순논리에서 벗어나, 자연이 인간과 대등한 존재로서 서로 주고받는 관계라는 근본적 발상의 전환이 절실하다. 한마디로 인간 중심의 환경보호운동에서 벗어나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인간과 자연의 분리가 아닌 합일의 개념이 도입되어야 할 것이다."16)

  자연환경은 도구로 간주되던 시대는 이제 지양해야 한다. 자연은 우리의 일부이며, 우리 몸의 치료는 주사가 아니라 질병을 직접 이겨 낼 수 있도록 환경적 요인을 제거해야 한다. 자연에게 보태줄 수 있는 것은 없다. 단지 우리가 어질러놓은 쓰레기만 치워주면 된다. 많은 것을 빼앗았다고 보태어 주려고 한다면 그것은 기계론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우리가 메뚜기를 돕는 일은 메뚜기에게 먹이를 주는 일이 아니다. 농사할 때 농약을 뿌리지 않는 것이 메뚜기를 구하는 길이다.

  

Ⅵ.결론

  

 현대인의 가장 큰 과오는 자신과 자연, 인간 그리고 자신의 분리이다. 육체적, 정신적 분리에 대한 집착은 육체와 정신의 분리에서 이 세상에 모든 것의 분리를 도모하게 되었다. 여기서 파생된 몰가치주의는 자연환경과 인간 사회, 그리고 자기 자신의 파괴로 이어졌다.

  현대인의 절대적 믿음의 과학 기술이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는 시점이 바로 지금이다. 특히 현대인의 가장 큰 믿음은 의학일 것이다. 하지만 의학도 현대에 많은 문제점들이 불거져 나오고 있다. 의학이 말하는 인간의 건강에 대한 시각의 변화가 필요함을 의학계도 서서히 인정하고 있다. 그들이 전문가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전문성은 인간 신체의 모든 면에 있어서의 전문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전문성은 인간 신체의 종합적 시스템은 이해를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부분적 시스템을 이해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시스템의 구조만을 몇 가지 파악했을 뿐이다.

  그 예로, 라다크인의 식생활을 들 수 있겠다. "서구의 기준에 따르면 라다크의 전형적인 식사는 전혀 균형 잡힌 것이 아니다. 푸른 채소와 과일은 아주 조금밖에 없고, 버터와 소금의 소비는 우리의 기준으로는 위험할 만큼 높다. 그러나 그런 불균형의 결과로 서구에서 흔히 보는 건강문제들은 거의 없다."17)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는 그 이유를 두 가지 제시한다. "첫째로 우리가 점차로 깨닫고 있는 것처럼 절대적으로 옳거나 그른 영향이라는 것은 없으며, 오히려 영양은 운동이나 스트레스 같은 다양한 요인들에 달려있다는 사실이다. 둘째로 사람들에게 어떤 영양이 필요한가라는 것은 상당한 정도로 사람이 살고 있는 환경에 따라 진화해왔기 때문에 신체의 요구는 그 땅이 제공할 수 있는 것과 일치하게 되는 것 같다는 점이다."18)

  이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신봉해 왔던 과학과 의학이 인간의 기초적 건강조차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생명을 기계처럼 다룬 과학 사상이 사회 전반적 문제로 전파되면서 사회는 인간과 인간을, 인간과 자연을 분리시켰다. 자본경제 속에 인간의 의학에서처럼 도구화되었고, 자연도 그 생명성을 잃어버린 채 파괴되었다. 도구화된 인간은 넘쳐나는 인간 사회 속에서 소외되었다.

  라다크인들은 그들의 종교로 생명을 중하게 여기되 인간만을 중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생명에 대한 마음가짐만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관심도 특별하다. 이들은 서로의 이름을 알고, 서로를 아낀다. 현대의 인간존중이 아니라, 사람 하나 하나를 아끼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명사를 아끼는 것이 아니라, 그 개인 한 명, 한 명을 아끼는 것이다. 인간소외란 있을 수가 없다. 범죄가 일어날 수도 없다. 모두가 아는 사람이고 친구이기 때문이다. 종속관계나 수직관계가 아니다.

  성선설에 따르면 환경적 요인이 범죄자를 만든다. 성악설에 의하면 주위의 관심과 사랑이 사람을 만든다. 이 상반되는 두 가지 인간 성향의 시각도 결국 공통된 얘기를 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은 주위 사람들과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에서 인간다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현대인이 믿고 따르던 과학이 이제 그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과거의 과오는 그런 문제점들이 나올 때마다 덮어두기에 바빴던 것이 원인이다. 한번 믿고 따른 신앙은 버리기가 힘들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받친 만큼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틀린 것을 알지만 현대인들은 그것을 놓으려 하지 않고 있다.

  이제 우리가 가야할 길은 두 가지의 길로 나뉜다. 우리는 지금 악마의 늪 속에 빠져 있고 늪을 나가려고 발버둥치고 있다. 그 옆에 우리의 자식이 있고, 반대편에는 황금이 있다. 어느 하나를 고를지가 우리 손에 달려있는 것이다. 소외된 나와 우리의 자식들이 돈의 가치보다 가벼운 존재로 남을지, 아니면 지금까지 가꿔놓은 신앙을 버릴지의 갈림길에 놓여있는 것이다. 어느 길을 택할지 고민한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모두의 생각을 바꾸고 삶을 바라봐야 한다. 자연을 인간을, 그리고 나 자신을 사랑하고 아껴야 한다. 과학이 발달해서 유전자 조작을 하고 거기에서 풍성한 열매를 얻을 수가 있다고 하여도 우리는 큰 열매보다 자연이 주는 열매의 소중함을 깨달아야 한다. 탄생이 그러하듯이 죽음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 물길을 따라가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거스르게 되면 쓸데없는 에너지 소비가 뒤따른다. 인간은 자연의 하나로 그 위치를 지키고 살아야 한다. 경험만큼 위대한 재산은 없다. 우리의 선조들이 살아온 방식이 현대인들의 지식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지식인이야말로 진정한 지식인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할 수 있어도 안 하는 지혜의 아름다움이 필요한 것이다.

 

 

(주)

 

1) 진교훈, 환경윤리, 민음사, 1998, 228쪽 재인용

2) H. 요나스, 책임의 원칙: 기술시대의 생태학적 윤리, 이진우, 서광, 1994

3) 진교훈, 같은책, 118쪽

4) 방건웅, 신과학이 세상을 바꾼다, 정신세계사, 1997, 43쪽 재인용

5) 머레이 북친, 사회 생태론의 철학, 문순홍, 솔, 1997, 107쪽

6) F. 카프라,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 이성범·구윤서, 범양사 출판, 1982, 105쪽

7) 조용현, 몸의 철학, 강의록, 2000, 46-50쪽 : 김용옥, 동의수세보원, 강의록, 강론 9회 참고

8) F. 카프라, 같은책, 144쪽 재인용

9) F. 카프라, 같은책, 148쪽

10) Prisoner's Dilemma  악셀로드에 의해서 제시된 공진화의 메커니즘. ESS(진화적 안전 전략)의 법칙에 일반성의 결합.

11) 윤규병, 잡초는 없다, 보리출판사, 1998

12) 방건웅, 같은책, 70쪽

13) 진교훈, 같은책, 94쪽

14) 레스터 브라운, 지구환경보고서, 따님, 1994

15) 머레이 북친, 같은책, 31쪽

16) 방건웅, 같은책, 64-65쪽

17)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오래된 미래, 김종철·김태언, 녹색 평론사, 1992, 45쪽

18)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같은책, 4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