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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철학

장회익교수의 온생명에 관하여(2000.5)

장회익교수의 "온생명"에 관하여

 

 

지난 5월 19일 철학과 주최 초청강연회에서 장회익 교수님을 모시고 "온생명"의 개념과 그 의미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장회익 교수님의 열정적인 강의와 장내 청중들의 진지한 관심이 어우러져 근래 보기드문 분위기를 연출했다.

 

어떤 개념의 창안은 개인의 몫이지만 그 개념이 활착하느냐의 여부는 사회의 몫이다.개념은 비판의 장속에서 그 비판을 이기고 살아남을 수 있어야 한다.이것은 마치 어떤 형질의 출현은 유전자의 몫이지만 그 형질이 자연의 장속에서 활착하느냐의 여부는 자연의 복잡한 네트워크상에서 작동하고 있는 자연선택의 테스트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하는 것과 비슷하다.이것을 성공적으로 통과했을 때 이것은 자연의 네트워크상에 받아들여지고 보존된다.마찬가지로 새로운 개념도 이 과정을 통과함으로써 개념들의 네트워크(지식체계)속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포퍼는 이것을 "세계3"-객관적 지식-이라고 불렀다.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암묵적인 전제가 있다.우리와 동시대의 우리 철학자나 우리 과학자들에 의해서 논의된 것은 철학의 주제가 아니라는 것이다.여기에는 아직 우리의 철학이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없으며 있다더라도 아직 미성숙 단계여서 연구의 대상이 되기는 시기상조라는 전제가 깔려있다.그러나 우리는 타성에 젖어 곳곳에서 발호하고 있는 우리의 생각들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김용옥 선생의 "기철학"이 학위논문의 주제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일까?내가 볼때는 이것은 우리의 의식의 문제이지 우리 학문의 수준의 문제는 아니다.그것이 학문의 장속에 들어오게 되면 비판의 장을 통과해 가는 과정에서 더욱 깊어지고 넓어지면서 본래의 창안자의 수준을 뛰어넘는 철학으로 발전해갈 수 있다.앞서 말했듯이 한 생각을 구체화하는 것은 개인이지만 이것을 성숙시키는 것은 사회이고 이때 그 생각은 세계3의 객관적 지식이 된다.이런 맥락에서 장회익 교수(이하 존칭생략)의 "온생명"의 개념을 공개적 토론의 장으로 가져와서 같이 검토해 보았으면 한다.

 

 단위의 문제

 

장회익교수의 기본적 출발점은 생명이 성립할 수 있는 최소단위를 찾는 일이다.그가 가이아를 그 단위로 보지 않는 것은 그것만으로는 생명현상을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생명은 태양으로부터 오는 자유에너지를 필요로 한다.그런 의미에서 단위를 찾는다면 태양을 포함하는 시스템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태양도 스스로 존립할 수 없다는 비판은 장회익교수의 본의도에 벗어나는 것이다.이것은 기원론이 아니다.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태양을 가진 시스템이 주어진다면 생명체는 당분간(아주 긴세월이겠지만) 자족적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이다.그러므로 태양계 자체를 하나의 고립계로 근사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1) 여기에 대해서 장회익 교수는 인상적인 비유를 동원하고 있다.지구상의 생명체가 다른곳으로 이주한다고 했을 때 생존하기 위해서 가져가야할 최소한의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지구 전체를 통체로 가져간다고 해서 생존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지구는 외부에서의 자유에너지의 유입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지구와 함께 태양을 가져간다면 우리는 큰 어려움없이 살아갈 수 있다.그러므로 최소단위(사실 엄청난 이삿짐이다!)는 지구-태양 시스템이다.

 

단위를 찾는 일은 학문적 작업에서 아주 중요한 일이다.복잡한 수준 모두를 고려할 수 없기 때문에 복합적이지만 마치 단일한 것으로 간주해도 좋은 단위를 찾는다.(이때 어떤 관점을 취하느냐에 따라 단위의 범주는 아주 달라질 것이지만 번쇄함을 피하기 위해서 여기서는 다루지 않는다.)단위가 확정되면 이제 단위들간의 관계를 다룰 수 있는데 이때 단위내부의 복잡한 관계는 고려할 필요가 없다.마치 그것들은 단일한 것처럼 외부와 관계한다.이것을 극단으로 단순화시킨 것의 한 예가 역학에서의 "質點"이다.이것은 사회과학에서도 흔한데 국제정치를 논하는 사람들은 마치 각각의 국가가 단일한 개체(단위)인 것처럼 다룬다.

 

단위의 기능은 2중적이다.내부적으로는 통합의 원리이고 외부적으로는 관계의 원리이다.이 둘이 모두 충족될 때 그 단위는 존재론적 지위를 획득한다.즉 그것은 자연스러운 단위로 기능할 수 있게 된다.그러나 단위가 관계의 원리로서만 제시되는 경우도 있다.볼츠만이 열역학에서 사용한 원자의 개념이 그러하다.이 경우는 조작적 지위(operational status)에 그치게 된다.

 

물론 새로운 발견이나 지식의 성장으로 해서 조작적 지위에서 존재론적 지위로 바뀌는 경우도 있다.19세기의 원자의 개념적 지위가 그 대표적 사례다.그것은 19세기 까지 조작적 성격이 강했지만 20세기에 들어와서 그 내부구조가 밝혀지면서 동시에 그것을 하나의 단위로 취급해도 좋은 원리적 근거(통합의 원리)를 알게 되었다.이제 원자의 실재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장회익 교수의 온생명이 하나의 단위라면 이것은 지구-태양을 하나로 묶을 수 밖에 없는 통합의 원리를 제시한다.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단위가 되려면 다른 것과의 관계의 문맥속에서 논의되어야 한다.사실 하나뿐인 단위 그것은 단위가 아닐 것이다.그러나 불행히도 우리가 아는 온생명의 단위는 지구-태양 하나 뿐이다.이 온생명의 개념이 실제적인 의미를 가지려면 다른 태양계의 생명체가 발견될 때이다.그 때 비로소 온생명의 의미가 정확히 드러날 것이다.개체생명이 다른 개체생명에 의해서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면 온생명은 다른 온생명에 의해 비로소 이해가능하다.

 

 우리가 지금 온생명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외계생물체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지구상의 구체적 생물체의 이해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관심의 초점은 단위가 아니라 그것이 생명의 이해에 어떤 시사를 던지는가 하는 것이다.이러한 관점에서 논의의 초점을 바꾸어서 온생명과 가이아를 비교해 보자.

 

  온생명과 가이아

 

생명론의 관점에서 온생명이 가이아에 비해 설득력이 떨어지는 점은 온생명에서 개체생명의 역할이 수동적인데 대해서 가이아에서는 능동적이라는 점이다.다시말해서 개체생명들 없이도 태양은 존재할 수 있지만 가이아는 존재불가능하다.가이아는 개체생명들의 장구한 기간동안의 활동의 산물이다.러브록은 대기의 조성에서 시작해서 지구의 온도조절에 이르기 까지 이것들이 지구상의 생명들의 활동의 결과로서 나타나는것임을 정치하게 밝히고 있다.개체생명들이 가이아를 만들고 이 가이아가 또 역으로 개체생명들을 만들어가는 순환구조속에 있다.

 

만일 온생명이 행성-태양을 포함하는 계이고 이것을 생명이라고 부를수 있을려고 한다면 이 조건을 만족시키는 곳에는 반드시 개체생명들이 있어야 한다.이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구태여 그것을 "생명"이라고 부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그러나 장회익교수는 생명이 없는 태양의 가능성을 기본적으로 전제하고 있다.그렇다면 온생명을 생명이라 부르지 말고 생명이 성립할 수 있는 여건(주어진 소여)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이에 반해 가이아는 개체생명을 그 정의상 전제하고 있다.개체생명체들이 없다면 그것은 가이아가 아니다.이것은 가이아가 개체생명체들이 만들어낸 결과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물론 온생명을 '생명이 존재하는 행성-태양'의 시스템으로 정의할 수 있다.그러나 이 경우 이것이 어드혹적(ad hoc) 설명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여러 다른 행성-태양계 시스템 가운데 어떤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 온생명이고 어떤 것이 그것이 아닌지를 독자적으로 테스트해볼 수 있는 방법이 주어져야 한다.러브록의 가이아는 행성의 대기상태를 분석함으로써 그 행성이 가이아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생명체가 행성자체를 변화시킴으로 가이아를 형성한 것처럼 생명체가 태양계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생명이 존재하는 구체적 행성을 모르는 상태에서 어떤 임의의 태양계들 자체만을 검사해서 그것이 온생명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생명체에 적합하도록 태양자체의 온도도 조절하는 강력한 생명활동이 저 어떤 은하계에 있을지 모르지만 이것은 아직 우리의 생명이해의 범위내에서는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생명의 정의와 관련되어 있다.생명의 기본적 조건은 그것이 열린계라는 것이다.밖에서 에너지가 유입되고 쓰레기를 배출함으로써 일정한 비평형상태를 유지해야 한다.개별생명체가 이러한 전형적 예이지만 가이아도 이 조건을 충족시킨다.그러나 온생명은 기본적으로 고립계로 가정되어 있다.그렇다면 온생명은 생명의 한 부분집합이 아니고 완전히 별도의 것인 셈이 된다.다시말해서 생명이라는 일반적 개념안에 온생명과 개체생명을 포괄할 수 없고 온생명과 생명이라는 두가지 형태가 있는 셈이다.그렇다면 이 둘을 포괄하는 어떤 개념의 정립이 또 요구된다.

 

필자는 생명에 온생명이라는 별도의 형태를 도입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온생명을 생명의 한 특수한 경우로 포섭할 수 있다고 본다.예컨대 우리의 몸도 외부에너지의 유입이 없는 상태(죽음직후의 상태)에서 일시적으로 비평형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이 때 이 몸의 내부상태는 근사적으로 외부와 독립되어 있다.요컨대 생명의 죽음직후의 상태가 온생명의 상태(자족적 상태)이다.어쩌면 지구상의 생명은 태양이 죽어가는 과정에서 잠깐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장구한 시간이지만) 구현되는 현상일지도 모른다.규모의 문제를 논외로 한다면 이 두 고립계간의 차이가 무엇인지 필자로서는 알기 어렵다.물론 태양계는 죽음 직후의 몸에 비해서 훨씬 더 근사한 고립계이다.그러나 어쨌든이 몸이 곧 평형상태에 도달하듯이 태양계도 언젠가 평형상태에 도달할 것이다.그러나 은하 저편에 외부에너지 유입이 일어나고 있는 "태양계"를 상상해 볼 수 있다.여기에도 생명은 출현할 수 있다.그러므로 생명은 그 자체 개방계이지 않으면 안되지만 자신을 품고 있는 시스템-태양계-은 고립계이든 개방계이든 상관없다.요컨대 생명의 이해에 있어서 꼭 그 계가 자족적 고립계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이것은 우리 태양계의 우연한 사건일지 모른다.이러한 관점에서 가이아는 자족적 단위가 아니기 때문에 불충분하다는 장회익교수의 지적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생명은 살아있다는 본성상 자족적인 것일 수 없다.(조용현,2000.5.20)

 

 

 

(주)

1)장회익교수의 이 발상은 토인비가 『역사의 연구』에서 전개한 발상과 아주 유사하다. 그는 역사의 연구 단위가 국가가 아니고 문명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국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국가의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에 자족적 단위가 아니라는 것이다.그는 다음과 같은 물음으로 시작한다.(A.Toynbee,『역사의 연구』(Study of History),서머빌 축쇄본1권.정성호 역(오늘,1993),2-3면)

 

영국의 역사를 단독으로 취급하여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영국 국내사를 그 대외관계와 연결시키지 않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일까? 연결시키지 않을 수 있다면 그 밖의 대외관계는 2차적인 중요성 밖에 없는 것일까? 그리고 다시 이런 모든 대외관계를 자세히 검토한다면 그 밖의 모든 대외관계는 2차적인 중요성 밖에 없는 것일까? ..이런 물음에 대한 답변이 긍정적이라면 외국의 역사는 영국과 연결시키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지만 영국의 역사는 세계의 다른 부분을 끌어들이지 않아도 대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결론지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영국사의 주요한 흐름인 봉건제,종교개혁,해외진출,의회제도,산업혁명 등을 차례로 고찰하면서 영국사는 유럽의 여타국가와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자족적 단위가 될 수 없다고 결론내린다.그렇다면 영국사를 이해하기 위한 최소의 단위는 무엇인가? 영국의 역사속에 발생한 여러사건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중국의 역사나 한국의 역사를 알아야할 필요는 없다.(물론 엄밀한 의미에서 연관없는 것은 없겠지만 그것을 모른다고 해서 영국역사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그러나 프랑스나 독일의 역사를 모르고서는 영국의 역사의 주요한 사건을 이해하기는 어렵다.그래서 그는 서구사회를 역사연구의 최소단위라 보고 이것을 문명에 대한 정의로 가져온다.물론 한국은 영국과는 다른 단위에 속한다.토인비는 이런 방식에 따라서 역사속에 나타나는 20개의 단위를 확정한다.(한국은 중국,일본과 함께 극동문명에 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