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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철학

공생.합생.창발성(1998.12)

 

 

공생,합생,창발성

상호적대적 세계에서 협동의 진화는 어떻게 발생하는 것일까?

                       

 

  1. 자연선택만으로 충분한가?

 

 

지구의 역사에 있어서 최근 밝혀진 놀랄만한 사실은 생명이 생각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46억년전 태양계의 먼지로 부터 출생한 지구에 그로부터 약 10억년이 경과한 37억년전 최초의 생명의 씨앗이 떨어졌다.가장 단순한 형태를 가진 이 생물들은 핵이 없는 세포,즉 원핵생물들이었다.그후 약 20억년 후 핵을 가진 진핵생물들이 등장했다.또다시 10억년 후인 5억여년전 캄브리아기 대번성이라 불리는 생명의 대폭발이 일어났다.이 폭발의 근본원인은 지금까지의 단세포형 생물들이 상호 결합함으로써 다세포 생명태를 형성한데 있다.세포들 간의 다양한 조합이 가능해짐으로써 그 이전의 분자차원의 표현기법에 부가하여 새로운 세포차원의 표현기법이 주어졌기 때문이다.그럼으로써 표현의 자유가 크게 확대되었다.그후 불과 몇백만년 사이에 오늘날 지구상의 생물들을 대표하는 주요한 설계들,즉 동물분류상의 門들이 모두 창안되었다.이어 무척추동물에서 척추동물로,양서류와 포유류에서 마침내 우리 호모 사피엔스에 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무엇이 이러한 복잡화로의 추세를 낳았는가? 자연이 가진 이 창조성은 도대체 어디에서 연원하는 것인가? 다아윈은 자연선택을 그 답으로 제시하면서 이 문제에 대한 합리적 접근의 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다아윈은 이것을 위해 종의 진화가 발생하는 두가지 과정을 구분했다.

 

(1) 다양성을 낳는 생산자

 

(2) 다양성을 걸러내는 필터   

 

(1)은 무작위적으로 발생하는 (돌연)변이이고, (2)는 자연환경이다. 다아윈은 변이의 원인을 묻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특정 변이가 왜 보존되는가 하는 것이었고 이것이 그의 자연선택론의 핵심이다. 요컨대 (2)가 그의 중요한 관심사였다.그러나 정작 자연의 창조성에 관련된 것은 (1)이라 할 때 자연선택은 부분적인 해명 이상의 것일 수 없다.다아윈의 자연선택은 마치 자격시험과 같다.여기서는 문제를 잘 풀수록 좋은 성적을 받는다.사회가 필요로 하는 통상적 능력을 檢定하는데는 이 방법이 어느 정도는 쓸모가 있을 것이다.그러나 이 방법을 창조적 능력을 검정하는데 사용하고자 할 경우 전혀 무력해진다. 창조적 능력이란 문제를 만드는 능력이지 주어진 문제를 푸는 능력이 아니기 때문이다.이러한 자격시험은 기존 틀내에서 우수한 자를 선발하는데는 유용하지만 새로운 틀의 창출자의 선별에는 무력하다.(사실 창조성을 검정한다는 것 은 자기모순이다.검정될 수 있다면 이미 창조적인 것이 아닐 것이다.)

 

자연선택만이 작용했다고 한다면 자연은 박테리아 이상의 생명체는 진화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일단 박테리아적 구성이라는 기존질서가 정착하면 자연선택은 그 범주안에서  적합자를 선별할 뿐이기 때문에 그 틀을 깨는 일체의 변이들은 도태되고 만다. 캄브리아기의 대번성-다세포 생명체의 등장-과 같은 기존 생명체의 파라다임을 깨는 혁명적 변혁들은 자연선택에 의해서 설명될 수 없다.그것은 자연의 보다 심원한 창조성의 표현이다. 카우프만(S.Kauffman)은 이 창조성의 근원을 자연 자체에 내재한 자기조직화로 향한 '자생적 질서'(order for free)라고 보았다.

 

 

질서는 우연적인 것이 아니며 광범위한 자생적 질서가 현재에도 만들어지고 있다.복잡성의 법칙이 자연세계의 질서의 대부분을 자발적으로 생성했다.자연선택이 작용하게 되는 것은 단지 정교화의 국면에서이다.그러한 자생적 질서의 성격이 전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제 막 생명의 기원과 진화에 대한 새로운 단서로서 출현하고 있다.이제 우리 모두는 간단한 물리적 계가 자생적 질서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알고 있다.물방울은 구를 만들고 눈송이는 6각형의 대칭구조를 만들어 낸다.새로운 것은 자생적 질서의 범위가 훨씬 더 광범위하다는 것이다.심오한 질서가 명백히 무작위적인 계에서 발견되고 있다.나는 이러한 창발적 질서가 단지 생명의 기원의 근저가 되고 있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고 생명체 자체의 질서의 근원이라고 믿고 있다.

 

자생적 질서의 존재는 다아윈 이래 확립된 개념에 대한 놀라운 도전이다.대부분의 생물학자들은 자연선택만이 생물학에서 유일한 질서의 원천이라고 믿어왔다.자연선택은 장인들이 하는 것처럼 '땜장이'의 역할이다.그러나 그 형태들이 복잡성의 법칙에 의해서 생성된다면 자연선택은 부차적인 것인지 모른다.유기체라는 것은 땜질한 잡동사니들의 모임이 아니고 심오한 자연법칙의 표현일지 모른다.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다아윈의 세계관의 변화가 바로 우리 눈앞에 있다...

 

다아윈의 세계관의 수정은 쉽지 않을 것이다.생물학자들은 자기조직과 자연선택을 결합해서 진화적 과정을 연구할 개념적 틀을 아직 갖고 있지 않다.이미 생성된 자생적 질서에 어떻게 자연선택이 작동하는가?물리학은 심오한 자생적 질서를 발견하고 있지만 자연선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생물학자들은 무의식적으로 자생적 질서에 관해 알고 있지만 그것을 무시하고 오로지 자연선택에만 초점을 맞춘다.자기조직과 자연선택을 통합할 수 있는 틀이 없다면 자기조직은 게슈탈트상에 있어서 배경 처럼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우리는 새로운 그림을 그릴 필요가 있다.1)

 

   

이 새로운 그림의 밑그림은 화이트헤드(A.N.Whitehead)에 의해서 이미 시사되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는 그야말로 자연이 가진 창조성의 비밀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 철학자중의 한사람이 아니었던가 한다.문제는 그 밑그림을 어떻게 구체화하느냐인데 최근 논의되고 있는 새로운 생명과학의 여러 담론들을 그의 철학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 한다.

 

 

    2.화이트헤드의 合生

 

 

화이트헤드에서 자연의 창조성의 비밀을 푸는 열쇠는 그의 '合生'(concrescence)의 개념인데 그에 따르면 이 말은 "더불어 성장한다"는 의미의 라틴어 동사에서 조어된 것이라고 한다.그는 합생을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합생이란 다수의 사물들로 구성된 우주가,그 多者의 각항을 새로운 一者의 구조속에 결정적으로 종속시킴으로써 개체적 통일성을 획득하게 되는 그런 과정을 일컫는 말이다.2)

 

 

우선 이것은 '合成'(synthesis)과는 다르다.합성의 과정속에서 각 요소들은 독립성과 자율성을 상실하고 전체속에 병합된다.이것은 우리의 代謝 과정속에서 일어난다.나의 체내에 들어온 영양물(그 이전에 독립성과 자율성을 가졌던 다른 생명체)은 분해되어 나의 몸을 구성하는 재료가 된다.이것은 원래 가졌던 자기동일성을 상실한다. 반면 합생은 각 요소들이 독립성과 자율성을 유지하면서 전체의 부분으로 통합되어 가는 과정이다.세포와 세포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세포소기관들(미토콘드리아,엽록체 등),몸과 몸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세포들 사이에 보여지는 전형적 관계들이 이러한 것들이다.물론 우리의 몸의 세포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다가 우리의 몸속에 통합된 것은 아니다.세포의 분화과정은 이미 발생의 과정이지 합생의 과정이 아니기 때문이다.그러나 이 합생의 과정이 지금 우리의 몸속에 일어나고 있지 않더라도 과거 단세포에서 다세포에로의 이행과정에서 일어났을 것으로 보인다.합성의 과정만 있었다면 다세포 생명체는 커녕 진핵생명체 조차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우리의 몸이 바로 아득한 과거에 일어났던 합생의 증거이다.3) 이것은 뒤에 자세히 검토해 보겠다.

 

화이트헤드는 합생의 과정을 '호응적 위상'(responsive phase),'보완적 위상'(supplement phase),'만족'(satisfaction)의 셋 단계로 나눈다.4) 호응적 위상은 현실세계를 감성적 종합을 위한 객체적 여건이라는 형태로 순수하게 수용하는 국면이다.그러나 이 단계는 요소들이 私的인 직접성-통일된 중심-으로 아직 흡수되지 않고 있는 단계이다.

 

그래서 이것들은 자기제한 없이는 새로운 일자로 통합될 수 없다.여기서 각 요소들의 주체성의 일부가 捨象되면서 점차 私的인 직접태가 작동하기 시작한다.이것이 보완적 위상이며 이것에 이어 요소들이 완전한 개체로 통합되는 만족의 위상이 따라온다.이 과정 자체는 상당히 복잡하고 논란의 여지도 많지만 여기서는 그 상세한 세부적 논의들로 들어갈 게제는 아니다.5) 화이트헤드의 의도의 대략적인 파악으로 만족하고자 하는데 그 의도는 요소들을 전체속에서 통합하면서 그 요소들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살리기위한 철학적 숙고라고 하겠다.

 

이 합생의 과정에 대한 간단한 모형이 물리학의 '同調'(correspondence)의 개념이다. 한 예로 레이저의 생성과정을 보자. 서로 마주보는 거울이 있는 상자속에 에너지를 부여하면 상자속의 원자의 일부는 이전보다 에너지 準位가 높은 勵起상태가 되어 광자를 방출한다. 광자는 여기된 다른 원자에 충돌하고 거듭 광자가 방출된다. 처음에는 광자들의 파가 서로 간섭하여 복잡한 파형을 만들어 내지만 서로 위상이 달라 상쇄되어버려 방출되는 빛은 약하다. 그러나 점차 에너지의 강도를 높혀 가면 갑자기 어느 시점에서 광자들이 동일한 위상으로 정렬되어 강력한 단일 진동수의 빛을 방출하는데 이것이 레이저 광선이다. 왜 이렇게 되는 것일까? 이것은 勵起상태에 있는 많은 분자들의 내부운동에 동조현상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동조현상이 전체의 질서를 만들어 내지만 또한 전체의 질서 없이는 이러한 동조현상이 생겨나지 않는다.이것은 완전히 순환적이다. a와 b가 관계맺음(호응적 위상)으로 a-b의 관계망(만족의 위상)이 생기고 이것이 역으로 a와 b를 한정한다. 그러나 이것이 a,b가 a-b에 선행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a,b로서의 개별성을 갖게 되는 것은 이 a-b의 관계망으로서이기 때문이다.요소는 전체를 전제하고 있고 전체는 요소를 전제하고 있다.6)

 

요소들의 호응이 가능한 것은 전체가 주어져 있기 때문이며 전체가 주어지는 것은 요소들의 호응이 있기 때문이다.그러므로 합생의 과정은 호응적 위상에서 보완적 위상을 거쳐 만족에 도달해가는 시간적,인과적 이행이 아니다.(그럴 경우 그것은 완전히 닭과 달걀식의 순환논법에 빠진다.) 그러므로 이것을 구태여 말로 표현하자면 '일거에'(all at once)에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합생은 인과적인 것이 아니고 '획기적'(epochal)인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합생은 한번으로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그것은 새로운 차원에서의 합생으로 진입해 들어가는데,그는 이것을 '이행'(transition)이라고 부른다.이 단계에서 전단계의 합생을 통해 만들어진 주체는 새로운 차원의 합생을 위한 객체(자기초월체,superject)7)가 된다. 화이트헤드는 이 객체를 '죽은 여건'(dead datum)이라고 하는데8) 왜냐하면 그 과정에 요소들의 주체성이 그대로 살아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군집이지 합생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 그 주체성은 새로운 합생을 통해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그것은 자기한정을 통해 객체적 불멸성을 획득한다.9)

 

이것은 약간 애매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그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바이츠체커(E.Weizsäcker)가 생명의 진화를 위해 가져온 '새로움'과 '확인'의 개념도 이러한 맥락에서이다.10) 보다 높은 의미론적 수준의 '새로움'을 끌어들이게 되면 하위수준에서의 '새로움'은 줄어들게 되고 규격화되는데 이것이 '확인'이다.이것은 생명의 진화에서 잘 드러난다.오늘날 지구에는 수백만 종의 '원핵생물'이 있지만,진핵세포 안에 형성된 세포소기관들(원시 원핵생물의 후손들)은 고도로 규격화되어 있다.이것은 원핵생물이 진핵생물속으로 유입됨에 따라 규격화의 과정을 밟았다는 것을 의미한다.보다 높은 수준으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낮은 수준의 새로움을 감소시켜야 한다.

 

테니스를 처음 배울 때 손목을 쓰지 말라고 가르친다.그러나 좋은 선수가 되었을 때는 그러한 것을 모두 잊어버렸을 때이다. 화이트헤드의 용어를 빌리면 그것이 '죽은 여건'-바이츠체커의 규격화-이 되었을 때이다.선수들의 끊임없는 단순반복 연습은 역설적으로 말해서 그것을 '잊어 버리기' 위한 것이며 그럼으로써 실제 시합에서 고차적 전략을 구사할 수 있다.그렇다면 그것은 소멸되었는가?그렇지 않다.그것은 하위차원에서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오히려 그것은 높은 수준의 새로움 속에서 '객체적 불멸성'을 획득한다.

 

그런데 합생에서 전이에로의 이행은 저절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합생은 그 자체 완성된 주체로서 자신의 동일성을 유지하고자 할 것이기 때문이다.스스로 새로운 합생을 위한 여건이 된다고 보기는 어렵다.화이트헤드는 이 과정에 대해 상세한 논의를 하고 있지 않지만 필자가 볼 때 이 단계가 바로 생존경쟁과 자연선택이 작용하는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합생은 합성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이다.이것은 생물들의 代謝 작용에서 잘 드러나는데 대사는 상대의 동일성을 해체시키고 자신의 재료로 바꾸는 합성의 과정이다.상호 상대방을 자신의 합성을 위한 재료로 사용하고자 하고 이것은 생존경쟁을 낳는다.그 과정에서 일방은 상대를 자신의 재료로 傳有(appropriation)함으로써 자신을 보전,확장시킬 수 있지만 상대는 소멸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그 결과 환경에 적합한 자만이 살아남게 된다.이 선택의 과정을 통해 생명체는 보다 정교한 형태로 개선되어 간다.그러나 그 개선은 어디까지나 기존의 틀내에서 이루어지는 지엽적 개선일 뿐이다.자연선택은 진화적 혁신의 조건을 제공하지만은 그 자신이 진화적 혁신을 이루어낼 수는 없다.

 

그런데 우리는 합성에서 일방의 타방에로의 일방통행적인 흡수,자연선택에서 일방의 타방에로의 일방통행적인 승리 등만을 고려해 왔다.그러나 이것은 이상적 단순화이다.우리는 승패가 결정나지 않는 지리한 지구전에 대해서 알고 있다.승부가 가려지지 않는 곳에는 타협이 이루어질 소지가 있다. 예컨대 삼킨 먹이가 소화되지 않고 그 생명체의 체내에서 자기동일성을 유지할 수가 있다.또 거꾸로 체내에 침투해 들어간 기생충이 숙주의 방어계의 강력한 저항을 받아 숙주의 몸을 이용하고자 했던 본래의 의도가 좌절될 수도 있다. 공격과 방어가 되풀이 되는 가운데 공존의 틀이 만들어질 수 있다. 이것이 합생이 개시되는 시점이며 진화적 혁신이 시발되는 시점이다. 이 견해를 제시하면서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라는 정통 다아윈주의에 도전하고 있는 자가 린 마굴리스(L.Margulis)이다.그녀의 견해를 살펴보자.

 

 

    3. 린마굴리스의 내공생과 진핵세포의 기원

 

 

합생이 합성과 다른 점은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의 개체로 통합되면서도 요소 각자가 독립성을 보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린 마굴리스의 '내공생'(endosymbiosis) 가설은 이러한 합생의 과정이 진화상에서 실제로 일어났으리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미토콘드리아는 우리의 세포내에 존재하는 중요한 세포소 기관이다.이것은 자신과 세포의 다른 부분들에 필요한 에너지(ATP)를 생산하는 중요한 기관이다.그녀는 이 미토콘드리아의 선조가 본래의 세포내의 존재가 아니고 외부에서 침투해 들어온 박테리아의 일종이라고 주장했다.11)

 

우선 그녀가 주목한 것은 미토콘드리아의 세포에 대한 상대적 독립성이었다.그들은 모세포와는 독립적으로 그들 고유의 DNA,전령RNA(messenger RNA),운반RNA(transfer RNA),리보솜 등을 포함하는 유전기구를 따로 갖고 있다.그리고 모세포의 DNA안에는 이 미토콘드리아를 합성하는 유전정보가 들어있지 않다.증식도 모세포와는 독립적으로 행해진다.

 

그런데 이 미토콘드리아의 행태는 모세포를 닮았다기 보다는 독립생활을 하는 박테리아와 닮았다.우선 증식방법이 진핵세포들의 복잡한 방식과는 달리 몸체가 가운데가 갈라져서 둘로 나뉘는 박테리아와 같은 원핵세포의 단순분열 방식을 취하고 있다. 또 모세포의 DNA는 히스톤(histone) 단백질을 실패처럼 이용해서 감고 있는데 미토콘드리아의 경우 이것도 발견되지 않는다.단백질을 합성하는 미토콘드리아의 리보솜도 모세포의 것을 닮지 않고 박테리아의 것을 닮았다.

 

미토콘드리아는 모세포와는 다른 체계로 되어 있다는 것,그리고 그 체계가 박테리아의 그것을 닮았다는데 근거해서 린 마굴리스는 미토콘드리아가 과거의 어느때 자신들 보다 큰 세포의 내부로 들어가서 궁극적으로 공생생활을 영위하게 된 박테리아의 일원일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침입당한 숙주세포들은 처음에는 거의 생존할 수 없었다.그러나 숙주세포가 사멸하게 되면 침입자도 역시 죽을 수 밖에 없었으므로 궁극적으로는 협력자들만이 살아남았다.협력자라는 말이 약간 거슬린다면 다음과 같이 표현해도 무방할 것이다.숙주세포를 감염시킨 박테리아 가운데 비교적 독성이 약한 놈만이 자신의 자손을 퍼뜨릴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침략을 당한 숙주와 공격성을 잃은 미토콘드리아는 마침내 적대적 관계를 청산했으며 그후 역동적 협력관계로 들어갔다.합생이 개시된 것이다.

 

 

치명적인 질병을 유발시키는 미생물들 처럼 지극히 공격적인 박테리아들은 그들의 숙주세포를 사멸시킴으로써 결국 자신도 죽게 된다.따라서 自制的인 공격-숙주세포에 치명적이 아니거나 만성적으로 죽음을 유발시키는-이 진화의 역사에서 보다 빈번히 나타난다.침략근성을 소유하였던 미토콘드리아의 선조들은 그들의 숙주세포를 유린하였지만 일부 숙주 박테리아들은 살아 남게 되었다.미토콘드리아의 선조들은 숙주 박테리아의 전부를 탐하는 대신 숙주로 부터 취하여도 좋은 부분(즉 그 부산물)만을 얻도록 적응되면서 숙주세포를 죽이지 않고도 자신을 증식시킬 수 있게 되었다.이 둘사이의 적대관계는 오랜 기간을 지나면서 서서히 청산되었다.증오는 연민이 되었다.12)

 

 

침입자는 숙주세포의 내부의 생활에 적응하면서 점차 자신의 DNA와 RNA의 일부를 소실하게 되었다.일단 공생관계가 성립하게 되면 열등한 쪽의 기능은 도태되게 된다.예컨대 두 생물체가 필요한 영양소를 합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더라도 효율이 떨어지는 쪽이 점차적으로 그 기능을 상실함으로써 그 두 생물체 사이의 상호의존도를 더욱 높히게 된다.이 단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미토콘드리아는 세포의 나머지 부분에 그 자신을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었다.그들은 숙주세포의 유전인자를 이용하여 그들 자신의 DNA와 RNA의 복제에 필요한 효소를 포함하는 대부분의 단백질들을 합성하였다.세포는 미토콘드리아가 생산한 에너지를 사용하고 미토콘드리아는 세포의 부산물인 유기산을 사용하게 되었다.  

 

 

   4. 죄수의 딜레마와 협동의 논리

 

 

합생은 타협에 의한 자기억제를 전제한다.이것은 거꾸로 이야기 하면 합생중의 일방이 타방을 배반함으로써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응적 위상이 안정적일 수 있겠는가? 화이트헤드는 여기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없지만 악셀로드(R.Axelrod)의 '죄수의 딜레마'가 여기에 대한 좋은 해명을 제시해 준다.

 

각각 상대방의 범행을 알고 있는 두 범인 있다고 하자.이들은 구속되기 전에 서로의 범행에 대해 입을 다물기로 합의했다. 범인들은 다른 증거가 없기 때문에 상대의 범행에 대해 입을 꾹 다물고 있으면 둘다 무죄석방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경찰은 이들이 입을 다물고 있자 상황타개용으로 하나의 미끼를 던진다. 경찰은 상대의 범죄를 증언하는 자에게 포상금을 약속한다. 범인은 침묵(협동),자백(배반) 중 어떤 행동을 취하게 될까? 약간 복잡하기 때문에 여기에 점수를 부여해서 상황을 단순화 시키자. 둘이 같이 침묵을 지켰을 때는 무죄방면되는데 여기에는 각자 3점을 부여한다.둘이 같이 상대의 범행을 증언했을 때는 둘다 구속된다.그러나 포상금을 받을 수 있으므로 약간의 이익이 있다고 보고 여기에 1점을 준다. 한 사람이 침묵하고 다른 사람이 증언했을 때는 증언한 사람은 (상대가 증언하지 않았으므로) 무죄방면되고 포상금도 받게 되어 5점의 최고점수를 얻게 되는데 대해 침묵한 사람은 (상대방의 증언으로 인해) 구속되기 때문에 최악의 점수 0점을 받는다. 각 전략에 대한 점수는 두 범인의 점수의 합으로 한다. 이것을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A
   B

협력

배반

협력

A(3),B(3)

A(0),B(5)

배반

A(5),B(0)

A(1),B(1)

 

 

범인들은 협동,배반중 과연 어떤 것을 선택할까? 가장 높은 점수는 둘다 협동해서 침묵을 지키는 것이다.이 때 둘다 자유를 얻고 합 6점을 득점한다.그러나 이것은 일어나기 어렵다.왜 그럴까?

 

내가 협동 카드를 내는데 상대방이 배반 카드를 낸다면 나는 구속되고(0점) 상대는 자유를 얻으면서 보상금 까지 받게 될 것이다(5점). 내가 배반 카드를 내는데 상대가 협동 카드를 낸다면 이번에는 내가 자유와 보상금을 받게되고(5점) 상대는 구속된다(0점). 상대가 나와 같이 배반 카드를 낸다면 둘다 1점을 얻게된다.내가 협동할 경우 최고 3점,최저 0점이고 내가 배반할 경우 최고 5점,최저 1점을 얻을 수 있다.나는 나무랄 수 없는 논리로 배반 카드를 내게 된다.결국 상호배반으로 치닫는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되어 전체계의 득점은 최하인 2점에 그친다.

 

이것이 자연의 논리라면 합생의 과정은 생겨날 여지가 없는 것 처럼 보인다.그러나 장기적으로 이것이 협동을 유도하는 시발점이 된다는데 자연의 심오성이 있다.악셀로드는 이것을 보여주기위해 '반복적 죄수의 딜레마'게임을 개발했다.이제 이 게임을 1회에 그치지 않고 반복한다.그래서 나는 상대가 나를 배반한데 대해 다음번에 통쾌하게 복수할 수도 있고(협동→배반→배반),너그럽게 용서할 수도 있다(협동→배반→협동).물론 상대도 마찬가지로 여러 전략을 선택할 수 있다.

 

몇가지 전략이 있을까? 이 게임은 '메모리1'게임이다. 즉 상대방의 바로 앞의 수만을 바탕으로 자신의 수를 결정한다. 이 경우 각 당사자는 협동,배반의 2개의 선택가능한 행동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경우는 모두 4가지이다. 상대방의 과거의 두 수에 기초해 나의 수를 결정한다면 이것은 메모리2 게임이다. 각 경우에 대해 4가지의 전략이 가능하기 때문에 4×4×4=16개의 메모리2 전략이 있다. 메모리3은 16×16=256개의 전략이 있다.일반적으로

개의 전략이 가능하다.13) 이 가운데 메모리1 전략만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여기에는 다음 4가지가 있다.

  

 

1. 항상 배반하라(All Defect)→배반파

 

2. 우선 협조하라.그 다음은 상대방의 전략을 따라하라.(TIT-for-TAT)→정의파

 

3. 일단 배반하라.그 다음은 상대방의 전략을 따라하라.(TAT-for-TIT)→불신파

 

4. 항상 협조하라(All Cooperate)→선심파

 

 

정의파는 자기가 먼저 상대방을 배반하지 않지만 일단 상대가 배반하면 용서하지 않는다.14)그러나 상대가 다시 협조로 돌아오면 자신도 다시 협조로 복귀한다.불신파(mistrust)는 상대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일단은 배반카드를 낸다.상대가 그럼에도 협조카드를 내면 그는 믿을만하다고 보고 협조로 돌아선다.배반파는 무조건 배반하고 선심파는 무조건 협조한다.

 

둘은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에 일방적 이익을 취하는 것은 앞서 범인들의 예에서 보았듯이 계전체의 득점을 낮추어 결국은 자신에게 손해가 된다.그러므로 자신의 이익과 계전체의 이익간의 균형을 유지해야만 최대득점을 할 수 있고 그것이 결국 자신의 이익으로 돌아온다. 그러므로 전략의 핵심은 계전체의 득점을 최대화할 수 있는 전략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가능한 전략은 배반파-배반파,정의파-정의파,불신파-불신파,선심파-선심파,배반파-정의파,정의파-불신파,불신파-선심파,배반파-불신파,배반파-선심파,정의파-선심파 등 10가지가 있다. 각 전략을 10회 시행했을 때의 득점은 각 20,60,20,60,23,50(59),50,59,20,50,60이다.(여섯번째의 정의파-불신파의 경우는 어느 파가 先手를 두느냐에 따라 값이 달라지는데 정의파가 선수인 경우는 50점,불신파가 선수인 경우는 59점이다.다른 경우는 선수 여부에 관계없이 값이 같다.) 가장 좋은 득점은  정의파↔정의파,선심파↔선심파 또는 정의파↔선심파인 경우이고(60점),낮은 득점은 배반파↔배반파,불신파↔불신파 또는 배반↔불신파일 경우이다.(20점) 또 내가 어떤 파이든 선심파는 나의 최고의 파트너이고(평균득점은 56.3(59+50+60/3)),배반파는  나의 최악의 파트너이다(평균득점은 31(23+20+50/3)).15)

 

이것은 요소들의 집합체에 있어서 요소들이 상호협력적일 때 최대의 적합성을 획득하며 또 협력적 요소의 존재가 그렇지 않을 때 보다 적합성을 올리게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렇게 성급히 결론내릴 수는 없는데  이것은 상대방의 직전수만을 참고로 하는 극히 단순화된 메모리1 게임이기 때문이다. 사실 약간 긴 장기기억을 부여하면(메모리2,3..으로 진행하면) 전략의 효율성의 우선순위가 바뀐다. 선심파는 배반파의 유형을 만나면 적합성이 감소하는데 이것은 상대의 배반을 효율적으로 응징할 수 없기 때문이다.그러므로 관용을 기본전략으로 하면서 배반에 대해 응징할 수 있는 전략이 적합성이 가장 높다.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 정의파의 유형들이다.그렇다면 배반에 대한 응징은 어느 정도가 적합한가? 가장 강도 높은 응징은 '원한파'(spite)라 불리는 것이다.이것은 자기가 先手일 때 협조카드를 내고(협조),後手일 경우에는 상대방이 협조카드를 내면 같이 협조카드를 내지만 상대방이 배반카드를 내면 이 이후에는 상대방이 어떤 카드를 내든 관계없이 배반카드를 낸다(응징). 이것은 응징의 정도가 너무 강경한데 불신파의 유형과 대결할 때 그 약점이 드러난다. 불신파가 시험적으로 던진 배반카드에 대해서 가차없이 계속 배반카드를 던짐으로써 같이 파멸하고 말기 때문이다.(피가 피를 부르는 '복수혈전'이라고나 할까) 이 전략은 배반에 대해 너무 강경하게 대처함으로써 적합성을 떨어 뜨린다. 원한파에 비해 응징의 정도를 약화시킨 것이 정의파의 유형이다. 불신파와의 대결에서 정의파는 불신파의 배반카드에 대해 일단은 협조카드를 내기 때문에 불신파를 안심시켜 이후 상호협조체계를 만들 수 있다.원한파는 상대의 배반에 대해 일체 용서하지 않지만 정의파는 배반에 대해 한번의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관용적이다.이 전략은 선심파 보다 강경하기 때문에 배반파의 응징에 효율적이면서도 원한파의 전략 보다는 온건하기 때문에 불신파와의 대결국면을 피할 수 있다.

 

정의파를 기본유형으로 한 여러가지 장기기억형 전략들이 개발되었다.元祖 정의파 보다 좀더 관용적인 것으로 '신중한 정의파'(tf2t)가 있다. 이것은 상대가 연속 2번 배반할 때만 배반카드를 내고 그외에는 협조카드를 낸다.이것은 좀체로 대결국면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지만 배반파 유형의 교묘한 전략에 대처하기에는 너무 관용적이다. 이것보다 좀더 엄격한 것으로 '훈계파'(slow-tft)가 있다.이것은 상대가 두번연속 배반할 때만 배반카드를 낸다는 점에서는 신중한 정의파와 같지만 상대가 두번 연속 협조카드를 내어 후회하고 있음을 보여줄 때만 자신의 배반카드를 철회한다는 점에서 좀 더 강경하다.

 

그외 여러가지 전략들이 제출되었지만 가장 높은 적합성을 보여준 것은 관용형의 전략들이었고 그중 높은 적합성은 예외로 메모리1 단위에서 만들어진 바로 '정의파'전략이었다.

 

 

'정의파' 전략은 첫번째 선택에서 협동으로 부터 출발하며 그 후로 부터는 정확히 상대방의 프로그램이 바로 전번에 했던 대로 선택했다.즉 정의파 전략은 당근과 채찍의 본질을 공유하고 있다.결코 먼저 배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것은 '착했다'.좋은 행동에 대해서 다음번에 협조함으로써 보상한다는 점에서,그것은 관대했다.그러나 비협력적 행동에 대해서는 다음번에 배반함으로써 응징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강인했다'. 더구나 그 전략이 너무도 간단해서 상대프로그램이 쉽게 그 전략을 알아낼 수 있다는 점에서,그것은 '투명했다'..

 

불신으로 가득찬 세계에서 조차 번창하기 위해서는 공진화(co-evolution)의 과정에 '정의파'형의 협동이 있어야 한다.그런 세계에 돌연변이에 의해 몇개의 '정의파'의 개체들이 생겨났다고 가정해 보자.그 개체들이 충분히 자주 만나게 되어 미래의 만남에 대한 이해관계가 생긴다면,그들은 작은 협동체계를 형성하기 시작할 것이다.일단 그러한 협동체계가 생기면 그들의 주위에 있는,등뒤에서 칼을 찌르는 식의 비열한 무리들 보다 훨씬 일을 잘 수행할 것이며,따라서 그들의 수는 신속하게 증가할 것이다.정말로 '정의파'식의 협동이 급기야 전체를 관장하게 될 것이다.그리고 일단 이것이 정착되면,협동하는 개체들은 거기에 머무를 것이다.만일 덜 협동적인 종류가 침략해서 그들의 '착한 점'들을 이용해 먹을려고 하면 '정의파'의 강인한 정책이 그들을 철저하게 응징할 것이며 따라서 그들은 퍼져 나갈수 없다. 이리하여 진화의 톱늬바퀴는 상향톱늬장치를 갖추게 된다.16)

 

            

이 분석에서 이러한 '도덕적' 특징을 연역하는데 의도적인 '의식'을 전제하지 않았다.그럼에도 그것은 저절로 출현하였다.이것은 화이트헤드의 호응적 위상이 계가 합생의 단계에 진입함에 따라 왜 저절로 출현하는가를 설명해준다.

 

 

    5.해밀턴의 혈연선택과 이타성의 진화

 

 

랭턴(C.Langton)은 '죄수의 딜레마'가 보여주는 생물학적 함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유기체에 작용하는 환경은 다른 유기체,그것과 자신과의 상호작용,그리고 물리적 환경으로 되어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진화상에서 어떤 개체들의 집합이 그 집합속의 모든 개체들에게 이익이 되는 집합적 행위를 산출한다면 진화상의 기회를 잡게 될 것이다.여기서 진화는 더 복잡한 개체들을 생산할 필요없이 한 수준에서의 개체들의 집합이 더 높은 수준에서 개체를 형성하도록 작동함으로써 생물학적 복잡성에서의 중요한 도약을 이룰 수 있다.

 

이것이 다세포생명체의 기원이며 7억년전의 캠브리아기의 다양성의 폭발의 원인이다. 그후 이 전략은 7번에 걸쳐서 독자적으로 재발견되었다.(말벌,벌,개미,흰개미)17)

 

 

그러나 '죄수의 딜레마'의 논법만을 가지고 개체의 출현-합생-을 설명하기는 아직 무엇인가 부족하다.이것은 어디까지나 타협의 산물이며 따라서 항상 돌발적 요인에 의해 전체의 안정성이 와해될 수 있는 여지가 남아있다.요컨대 이것은 개체가 갖고 있는 그 완벽한 협동체제를 완전히 설명해주지 못한다.

 

여기에 대한 도킨스의 가설은 우리의 문제에 대한 통찰을 던지는데 多者18)가 자기재생산 루트를 공유하는데서 '개체'(individuals)의 진화가 완성된다는 것이다.개미나 꿀벌과 같은 벌목류(Hymenptera)의 생태는 이 문제에 대한 중요한 시사를 준다.이 계통의 뚜렷한 특징은 완벽한 사회성과 특이한 자기재생산 방식이다.우선 눈에 띄는 것은 거의 전설적인 자기희생적 이타성이다.꿀벌은 침입자를 침으로 쏘고나면 죽고 만다.그러나 꿀벌이 침쏘기를 망설이는 일은 없다.

 

이러한 완벽한 사회성이 구현되고 있는 다른 예를 들라면 바로 세포들의 사회인 우리의 몸일 것이다.그래서 개미나 꿀벌들은 개체 하나하나가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는 세포들이고 그 집단 전체가 일종의 '개체'인 초유기체에 곧잘 비유되어 왔다.

 

 

개미,꿀벌이나 흰개미의 사회는 더 높은 수준에서 한 종의 개체성을 달성하고 있다.먹이의 분배가 잘 진행되고 있어서 '공동의 위'라고 표현된다.화학적 신호와 꿀벌에서 유명한 '춤'등에 의해 정보도 극히 효율적으로 공유되어 있어 그 사회는 마치 신경계와 감각기관을 가진 단위 처럼 행동한다.외부로 부터의 침입자는 몸의 면역반응계가 나타내는 것과 같은 정확도로 식별되고 배제된다.개개의 꿀벌은 온혈동물이 아니지만 꿀벌의 집내부는 꼭 인간의 체온만큼의 비교적 높은 온도로 조절되어 있다.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유추가 번식에 까지 미치게 된다는 것이다.사회성 곤충의 집단내의 대부분의 개체는 불임의 일벌레들이다.생식계열의 세포는 극히 소수의 번식능력을 가진 개체의 몸속을 흐르고 있다.번식능력을 가진 소수의 개체는 정소나 난소 중에 들어 있는 우리의 생식세포와 유사하다.불임의 일벌레들은 우리의 간,근육 그리고 신경세포에 해당된다.19)

 

 

공생의 단계를 넘어서는 이러한 완벽한 합생은 어떻게 달성되는 것일까? 이것이 이 곤충들의 특이한 생식방식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에 처음 주목한 사람은 다아윈이었다.그러나 여기에 대한 정합적 설명은 1963년 해밀턴(W.Hamilton)의 독창적 분석에 의해 가능해졌는데 이것이 '혈연선택설'(kin selection)이다.

 

이 혈연선택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유전적 近椽度'를 이해해야 한다.이 개념은 우리에게 그렇게 낯선 것이 아닌데 寸數가 바로 이것을 측정하는 것이다.유전적 근연도를 계산하는 공식은 다음과 같다.

 

  K = ( ½ )n        (n;촌수)

 

형제간은 2촌이므로 형 또는 동생과 나와의 근연도는 ½ 이다.20) 삼촌 아저씨와 나와의 근연도는 ¼ 이고,사촌과의 근연도는 ⅛ 이다.해밀턴에 의하면 이타적 특성이 진화되기 위해서는 근연자에게 돌아가는 이익이 근연도의 역수값을 상회해야 한다.나와 나의 형제간의 근연도는 ½ 이므로 나의 희생이 나의 형제를 셋이상 구할 수 있어야만 의미가 있다.조카의 경우는 다섯 이상,사촌의 경우는 아홉 이상을 구할 수 있어야만 의미가 있다.이타성은 근연도가 작을수록 줄어든다.그렇다면 이타성을 최대화하는 것은 근연도를 최대화하는데 있다.이것이 벌이나 개미 같은 벌목류의 전략이며 이것을 통해 가히 초개체라할 수 있는 합생체계를 만들어 내었다.그렇다면 벌목류는 이 전략을 어떻게 구체화시켰을까?

 

벌목류의 자기재생산 구조의 특이한 점은 생식능력이 여왕벌(또는 여왕개미)에게 집중되어 있으며 일벌에게는 그 능력이 없다는 점이다.이것은 모든 개체가 생식능력을 갖게 되면 세대가 지남에 따라 근연도가 지수적으로 떨어지는데 이것을 막기위한 가히 천재적인 수법이라 하겠다.

 

벌목의 전형적인 집에는 성숙한 여왕이 한마리 밖에 없다.여왕은 일생에 한번 결혼비행을 하고 그 때 저장한 정자로 일생동안 새끼를 낳는다.이 기간에 여왕벌은 정자를 일정량씩 방출하여 수란관을 통과하는 알을 수정시킨다.

 

그러나 모든 알이 수정되는 것은아니다.미수정난이 발육하면 수펄이 된다.그러므로 수펄은 아버지 없이 어머니의 처녀생식을 통해 출산된 것이다.그래서 수펄은 모계와 부계로 부터 받는 2조의 염색체를 갖는 통상의 수정난과는 달리 모계로 부터 오는 한조의 염색체 밖에 갖고 있지 않다. 반면 일벌은 수정난에서 나오므로 2조의 염색체를 모두 갖고 있다.그래서 그것들은 모두 여왕벌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단지 양육과정에서 어떤 먹이를 먹느냐(로얄제리)에 따라 일벌이 되기도하고 여왕벌이 되기도 한다.  

 

이 시스템에서 유전자의 배분방식을 간략히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ac,bc는 수정난에서 만들어진 일벌이고 a,b는 미수정난에서 만들어진 수펄이다.이것을 가지고 일벌의 입장에서 유전자의 배분확률을 간단히 계산해 보자.

 

 

일벌의 언니와 동생간의 유전자 공유율은 최대 100%,최소 50%로서 평균 75%이다.인간 형제,남매의 50%에 비해서 상당히 높은 비율이다.어머니(여왕벌)와의 공유율 50% 보다 높고,남동생(수펄)과의 공유율 25% 보다 훨씬 높다.

 

여왕벌은 일벌들이 자신의 유전자를 미래로 실어나를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여왕벌에 의해서 자신들의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에 여왕벌과 자기자신의 여동생(일벌)들에 대한 이타성은 바로 자기자신의 이기성의 변형된 형태이다.

 

악셀로드의 계내에서 우리는 이타성의 진화를 보아왔지만 그렇다고 배반의 유형이 그 계내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집단내에서 배반이 주는 단기이익이 너무 크기 때문에(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사회에서 거짓말하는 별종이 생겨난다면 그것이 누릴 수 있는 단기이익이 얼마나 엄청날 것인가를 생각해 보라.) 끊이없이 계전체를 위협할 수 있다.

 

도킨스에 의하면 이러한 위험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은 자기지속에 필요한 미래를 향한 통로를 단일화시키는 것이다.거꾸로 말하면 자기재생산의 통로를 단일화시킨 진화적 전략이 개체들간의 공생을 합생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고 보아진다.이것이 바로 몸이 자기자신을 재생산하기 위해서 하나의 알로 돌아가는 방식-얼핏보면 비경제적이고,불합리한 방식-을 취하는 이유이다.이 알에 모든 유전자들이 모여 미래로 진출할 선수들을 선발한다.유전자의 반만이 그 선발된 기쁨(?)을 맛보게 되는데(감수분열) 그러나 그 선발이 철저한 룰렛게임의 무작위방식으로 행해지기 때문에 공평하다고 하겠다.

 

사회적 곤충들의 그 방식은 단세포 생물체가 다세포 생물체로 합생되는 과정에서 발견한 그 전략의 한차원 높은 차원에서의 창조적 재발견인지 모른다.그로인해서 사회적 곤충들의 집단이 마치 하나의 개체 처럼 보이고 그 집단의 구성원들이 개체를 구성하고 있는 세포처럼 우리의 눈에 비치는지 모른다.그렇다면 개미와 벌의 사회를 유기체에 비유하는 것은 비유이상의 것일지도 모른다.

 

 

   6. 개체-겹겹히 포개진 다자들의 우주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해 보자.숙주와 기생자가 동일한 시간적,공간적 틀 속에 묶임에 따라 그 길항적 대립관계는 악셀로드 게임을 통해서 합생의 위상으로 진입한다.합생은 합성과 달라 요소들의 개체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그것은 다른 차원에서 생동하고 있는 현실이다.이것이 생명이 가진 창조성의 원천지만 또한 붕괴의 씨앗일 수 있다.여기서 자기재생산 구조의 통합은 그 계에 대한 원천적 안정자로서 작용한다.이것은 화이트헤드의 합생에 있어서 '만족'의 위상에 해당하며 이것을 통해 다세포집단에 '개체성'이 출현한다.도킨스의 다음말은 이러한 통찰을 잘 보여준다.

 

 

어떠한 기생자에 관해서도 묻지 않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물음은 다음과 같다.즉,"그 유전자는 숙주의 유전자와 같은 운반자를 통하여 미래의 세대로 전해지는가?"라는 물음이다.만일 "아니오"라면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숙주에게 손해를 끼친다고 예측할 수 있다.만일 "예"라면 기생자는 숙주가 단순히 생존 뿐만 아니라 번식도 할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하여 도와줄 것이다.긴 진화적 시간이 흐르면 그것은 기생자라는 것을 멈추고 숙주와 협력하여 최종적으로 숙주의 조직에 합세하여 이미 기생자라고 인정받을 수 없게 되어 버릴 것이다...우리의 세포도 이 진화적 스펙트럼에서 생겨난 것인지도 모른다.즉 우리 모두는 태고의 기생자들이 합쳐진 역사적 유물이라는 것이다.22)

 

 

합생이 완료되었을 때 그것의 구성요소들이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각 단계는 일정한 자율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자신 고유의 시간과 공간속에서 삶을 영위한다.

 

이것을 투박하기는 하지만 다음과 같이 비유해 보면 어떨까 한다.세포는 그 구성부분들의 합생이다.몸은 다시 세포들의 합생이다.그러나 몸을 이루기 위해 모인 세포들은 그것이 몸을 이루고자 한다면 더 이상 합생의 신분이어서는 안된다.그것은 몸에 대한 객관적 여건으로 자신의 신분을 바꾸어야 한다.몸들의 모임은 다시 새로운 합생으로 전이되어 간다. 그러나 세포소기관들이 세포가 되고 세포가 몸이 되었다고 해서 세포소기관이 세포소기관으로서,세포가 세포로서의 특성을 잃는 것은 아니다.이것을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23)

 

 

 

 합생2로 이행해 갔을 때 합생1에서의 a1,a2,a3는 더 이상 합생의 단위가 아니고 그 셋을 묶은 A(그리고 다른 경로를 통해 들어온 B,C)가 단위가 되고 있다.여기서 a1,a2,a3의 현실은 A의 현실과 다르다.A의 현실은 오히려 B,C와 공통으로 묶여 있다.합생과 전이의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차원의 현실이 계속 창조되고 있다.그렇다고 그 하위 차원의 현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궁극적 형이상학적 원리는 이접적으로 주어진 존재들과는 다른 또 하나의 새로운 존재를 창출해내는,離接(disjunction)에서 連接(conjunction)에로의 전진이다.이 새로운 존재는 그것이 찾아내는 '多者'의 共在性(togetherness)인 동시에,또한 그것이 뒤에 남겨놓은 이접적인 다자속의 '一者'이기도 하다.즉 그것은 그 자신이 조합하는 많은 존재 가운데 이접적으로 존재하게 되는 새로운 존재인 것이다.다자가 일자가 되며 그래서 다자는 하나만큼 증가된다.존재들은 그 본성상 접합적 통일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이접적인 다자인 것이다.24)

 

 

이것이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현실적 존재를 규정하고 있는 궁극적인 범주다. 얀치(E.Jantsch)는 생명의 진화에 대한 사색 과정에서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다.

 

 

거시세계와 미시세계가 공진화과정에서 분화하는 것은 이 단계에서 저 단계에로의 '도약'이 아니다.각 단계는 그대로 남아 한층 더 진화하기 때문에 진화과정들의 수준들은 각 수준만이 아니라 그 수준들의 위계적인 성층화과정(stratification)에서 그 수효와 복합성이 다같이 증가한다.그 수준들은 재편되기는 하지만 그 어느하나도 사라지지 않는다.25)

 

 

합생된 현실적 존재는 겹겹히 포개진 수많은 합생들의 산물이고 각 수준의 합생들은 합생의 과정에서 소멸하는 것이 아니고 각 수준에서 여전히 살아있다. 얀치는 비슷한 논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다수준적이고 역동적인 실재안에서는 새로운 수준 하나하나가 새로운 진화과정들을 작용하게 하고,그것이 상대적으로 낮은 계층수준들의 과정들을 특정한 방법으로 조정하고,강화한다.따라서 오직 한개의 수준으로 환원하기란 절대로 불가능하다.자기조직,특히 생명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수준들을 인정해야 할 뿐 아니라 그들간의 관계를 이해해야 한다.26)

 

 

이러한 논의들은 우리에게 그렇게 낯설게 들리지 않는다. 실재의 층들이 겹겹히 겹쳐 있고 각각이 각각의 세계를 구현하고 있는 重重無盡의 세계,그러면서 서로 상충하지 않는 事事無碍의 華嚴의 세계가 바로 이런 것이기 때문이다.

 

 

   7.창조성의 근원과 자생적 질서

 

 

이러한 창조성의 근원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논의된 복잡화와 조직화로 향한 진화는 열역학의 제 2법칙과 모순되는 것 처럼 보인다.제 2법칙에 의하면 닫힌계(환경과 에너지를 교환할 수 없는 계)는 최대의 무질서로 향하는 경향이 있으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구조는 와해되고,질서는 파괴된다.

 

그러나 이것이 생명의 진화와 양립불가능한 것은 아니다.우주 전체가 닫힌계라 하더라도 우주내에 국지적으로는 열린계가 형성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이 계는 외부로 부터 에너지를 받아들이면서 엔트로피,즉 무질서를 밖으로 배출한다.여기서 국지적으로 질서가 형성될 수 있다.프리고진(I.Prigogine)은 이 과정에서 끊임없이 엔트로피를 산출하고,그것을 밖으로 배출시킨다는 의미에서 이러한 열린계를 '消散구조'(dissipative structure)라고 불렀다.

 

프리고진의 이론속에 이미 함의되어 있지만 자연의 창조성의 근원에 대한 심도있는 논의가 최근 카우프만에 의해서 행해졌다. 카우프만은 캘빈(M.Calvin)과 아이겐(M.Eigen)의 초기작업에 기초해서 생명의 기원은 화학분자들의 일련의 자기촉매과정-어떤 종류의 분자가 다른 종류의 분자의 출현확률을 높이고,또 그것은 또 다른 종류의 분자의 출현을 촉진하는 자기되먹임-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정연한 가설을 제시했다. 그는 이것을 '자생적 질서'(order for free)라고 불렀다.

 

열역학 제2법칙에 의하면 사물은 질서에서 무질서로 흐르며 그래서 생명체와 같은 고도한 질서는 거의 기적에 가깝다.이러한 통설에 대항해 카우프만은  질서는 결코 기적과 같이 확률상 거의 불가능한 사건이 아니고 흔한 사건이며(그래서 '귀하다'는 의미의 반대로 '공짜로'),별 특별한 조건없이도(그래서 '저절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입증하고자 했다.

 

이 무슨 진부한 자연발생설인가하고 의아해 할지 모르겠다. 물론 카우프만의 '질서'는 자연발생설 처럼 아무곳에서나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그것은 카우프만에 의하면 초임계점(supracritical)과 임계이하점(subcritical)의 경계27),랭턴에 의하면 '카오스의 가장자리'(the edge of chaos)에서만 생성된다.28) 카우프만도 이 뉘앙스상의 오독을 피하기 위해 'spontaneous order'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구태여 'order for free'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필자는 창조성의 근원이 이 '자생적 질서'에 있다는 카우프만의 견해가 생명의 창조적 본성에 대한 어떤 단서를 제공해 주지 않을까한다.29)

 

 

 <주>

1.S.Kauffman,At Home in the Universe(Oxford Univ.Press,1995),pp.8-9

 

2.A.N.Whitehead,『과정과 실재』,오영환 역(민음사,1991),387면.

 

3.물론 이것은 화이트헤드가 말하고자 한 정확한 의미에서의 '합생'은 아니다.화이트헤드가 합생을 가지고 설명하고자한 것은 1차적으로 전자,양성자,에너지 양자같은 물리적 존재인것을 보인다.반면 단세포에서 다세포로의 이행 같은 것은 '결합체'(nexus) 또는 '사회'라 불러서 구분한다.그리고 이 합생을 통해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가 출현하는데 이것은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궁극적인 실재적 사물로서 우주의 궁극적 '단위'이다.그러나 필자는 '절대적' 의미에서의 어떤 단위 -그것이 사물이든 사상이든- 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그러한 의미에서 세포는 양자나 전자만큼 현실적 존재이다.이런 관점에서 '합생'을 넓게 해석해서 결합체도 합생의 범주에 포함시켰다.사실 화이트헤드의 합생의 개념이 정작 잘 들어맞는 곳은 물리적 과정이 아니라 생명의 진화과정이기 때문이다.

 

4.whitehead,앞의 책,389면 이하 참조.

 

5.여기에 대한 상세한 해석은 문창옥,"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과 명제이론"(연세대,박사학위논문,1994) 3장 참조.

 

6.졸고,"프랙탈?관계?생명"(『오늘의 문예비평』,97.가을),155-170면 참조.

 

7.화이트헤드가 객체라고 하지 않고 구태여 '자기초월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이것을 그냥 객체라고 하면 그것이 주체와의 대립된 뉘앙스를 주기 때문이다. 그에 있어서 주체와 객체는 현실적 존재의 다른 국면들에 지나지 않는다.

 

8.Whitehead,앞의 책,313면

 

9.같은 책,406면.

 

10.E.Jantsch,『자기조직하는 우주』,홍동선 역(범양사,1989),311-312참조.

 

11.L.Margulis & D.Sagan,『마이크로 코스모스』,홍욱희 역(범양사,1987),8장 참조.

 

12.Margulis,앞의책,135면.

 

13.C.G.Langton,"Artificial Life",Langton(ed) Philosophy of Artificial Life,(Addison-Wesley Pub.,1992),p.83

 

14.필자가 TIT-for-TAT를 '정의파'라 부른 것은 그 행태가 정의에 대한 우리의 관념과 대체로 잘 부합하기 때문이다.

 

15.단순화하기위해 두 파만 대결시켰으나 이것은 비현실적이다.넷 파가 동시에 경쟁할 수도 있다.이것자체로도 엄청난 계산이어서 이미 사람의 손을 떠난다.여기에 대한 간단한 소프트웨어로 "winpri"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http://alife.santafe.edu/alife에 접속하면 다운받을 수 있다.

 

16.M.Waldrop,『카오스에서 인공생명으로』,김기식,박형규 역(범양사,1995),371-373면.또한 '죄수의 딜레마에 대한 재미있는 생물학적 해설에 대해서는 R.Dawkins,『이기적 유전자』,홍영남 역(을유문화사,1995),12장 참조.

 

17.Langton,"Artificial Life", p.85.

 

18.도킨슨의 견해를 충실히 따르자면 '多者'를 '유전자'로 바꿔야 겠지만 필자는 여기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앞서 논의했듯이 실재는 다원적 차원들의 집합체이기 때문에 어떤 단일한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다.유전자도 실재인 것은 분명하지만 세포도 또한 새로운 차원의 실재이다.유전자의 현실은 세포의 현실과 다르므로 일방이 타방을 일방적으로 조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그것이 '이기성'의 특성을 갖는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이것은 비단 유전자의 특성이라기 보다 독립성과 자율성을 갖는 단위들-유전자든,세포이든,개체이든,사회든-의 특성이다.몸은 세포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세포의 현실은 몸의 현실과 다르고 그러므로 상호 상충된 이해관계를 가질 수 있다.암세포가 그 한 예이다.이기적인 '단위'를 이렇게 넓게 해석하면 도킨슨의 '이기적 유전자' 가설 속에는 건질만한 것이 많이 있다.

 

19.Dawkins,앞의 책,259면.

 

20.여기에 2를 곱한 것은 형제간에 부계와 모계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래서 이복형제의 경우는 부계만을 나와 공유하므로 근연도는 ¼ 이다.그래서 촌수로 치면 2촌이 아니고 3촌인 셈이다

 

21.Dawkins,앞의 책,262-265 참조.

 

22.같은책,362면

 

23.이것은 다음 도표를 참조해서 재구성했다.

N.A.Bass,"Emergency,Hierarchies,and Hyperstructure",C.Langton(ed),Artificial Life   Ⅲ,(Addison-Wesley,1994),p.524.

 

24.Whitehead,앞의 책,78-79면

 

25.Jantsch,앞의책,,328면.

 

26.같은책,332면.

 

27.Kauffman,앞의 책,6장참조.보다 전문적인 논의는 Kauffman,The Origin of Order,(oxford Univ.,1993) 참조.

 

28.C.Langton,"Life at the edge of Chaos",Langton(ed) Artificial lifeⅡ,(Addison-Wesley,1991),p.41이하 참조.

 

29.여기에 대해 졸고,"세포자동자와 생명의 논리(1)"(『과학사상』,1998 여름호) 참조.이것은 예비적 논의이며 본격적 논의는 연속된 논문으로써 가을호에서 다루어질 예정이다.

 

 출전:조용현,"합생,공생,그리고 창발성"『화이트헤드 연구』1호(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