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층적 존재론과 華嚴의 세계
單子
우리는 앞서 크기가 달라지면 그 세계가 달라진다는 것을 보았다. 크기가 다르면 시간 조차도 달라진다.이것은 사실 당연한 것인데 시간과 공간은 원래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이 우주는 각기 독자적인 우주속에 살고 있는 상호소통 불가능한 존재자들의 집합인 것처럼 보인다.그러나 다른 한편 모든 존재는 다른 존재에 의존해 있다.모든 생명체는 다른 생명체를 먹이로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독자적 세계속에 살고 있으면서 상호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이 세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우선 손쉬운 방법은 이 독자성을 부정하고 세계를 하나의 단일한 차원 또는 층위(layer)로 환원하는 것이다.이것이 근대과학이 취해온 방법이기도 하다.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것만큼 주관적 접근도 없다.인간 특유의 사이즈에 의해서 투사된 세계를 진짜 존재하는 세계로 보고 여기에 모든 이질적 세계들을 맞춰 재단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세계들은 여기서 그 특유의 색깔을 잃어버리고 무색무취의 대상으로 변화된다.세계는 이제 우리앞에 주어진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이 과학적 환원앞에 모든 것은 그 생명을 잃고 죽어버린다.
이 방법의 위험성을 예민하게 지각한 철학자가 라이프니쯔이다.그는 데카르트와 뉴턴에 의해 추상화되어버린 이 세계의 실재를 복원할려고 시도했고 그 논리적 귀결이 "單子"(monad)였다.이 세계는 단자들의 집합이며 이들간에는 상호소통이 불가능하다.이 단자는 창이 없다.이 단자로서의 세계는 우리가 지금까지 복원해본 존재의 실상과 일치한다.모든 생명체는 다른 시간과 다른 공간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보아왔다.내가 보고 있는 타자로서의 생명체는 나의 관점(크기)에서 해석된 나의 상이며 그자체의 실상은 아니다.그렇다면 이 고립된 우주들간에 어떻게 교섭이 생겨날 수 있겠는가?그의 고심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예정조화"(preestablished harmony)를 주장할 때 절정에 이른다.필자는 이 논의자체가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단지 그는 이 예정조화의 주체를 초월적 신에서 찾음으로써 자연의 진정한 실상을 파악하는데 실패하고 있다.이것은 라이프니쯔가 관계자로서의 세계를 그 당시 시대의 사조였던 실체로서의 세계속에 정립하고자 하는한 어쩔수 없는 한계였다.
事事無碍
여기에 대한 보다 나은 대안을 우리는 불교의 華嚴의 세계에서 찾을 수 있다.새앙쥐의 세계와 코끼리의 세계는 다르다.모두 다른 세계(Umwelt)속에 있다. 그러나 각각의 세계들이 다른 세계를 자신속에 품으면서 相互融攝하고 있다.나는 하루살이의 우주의 일부이다.이것이 화엄철학이 우리에게 전할려고 하는 존재의 메시지이다.
사물과 사물이 아무 거침없이 서로 융섭하는 단계를 화엄철학은 최고의 경지로 보며 이것을 "事事無碍"라고 한다.화엄종의 4대조사인 澄觀은 『華嚴法界玄鏡』에서 法界에는 事法界·理法界·理事無碍法界·事事無碍法界의 四法界가 있다고 한다. 事法界는 우주의 현상계, 理法界는 우주의 본체계, 理事無碍法界는 현상계와 본체계가 둘이 아닌 것, 事事無碍法界는 모든 현상 그자체가 相卽相入하여 거침없이 융섭하는 단계로 최고의 경지이다.
화엄에서는 이것을 相入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아래 세가지 특징으로 요약될 수 있다.
1)동시돈기(同時頓起)
2)동시호입(同時互入)
3)동시호섭(同時互攝)
모든 萬象은 일방적 인과적 생성이 아니라 동시에 발생하고 발현하며(동시돈기) 각각이 서로에 침투해 들어가 있으며(동시호입) 타자를 자신속에 포섭하고 있다.(동시호섭) 여기서 크기의 절대적 의미는 소멸한다.왜냐하면 티끌조차도 자신을 포함한 전 우주를 자신속에 포섭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래서 법장은 "十方은 실체가 없고 인과관계에 의해 티끌속에 완전하게 나타나게 되는바 ,이것이 수축이다.수축할 때 일체의 사물이 한 티끌속에 드러나고 ,확장될 때는 한 개의 티끌은 모든 것에 널리 침투한다."고 말한다.나아가 모든 티끌은 공간적 의미에서 상입하고 이로인해 시방이 하나의 원자속에 내재할 뿐 아니라 시간적 의미에서도 상호융섭하여 수백수천의 무한한 영겁이 한 생각의 찰나에 내재한다고 말한다.1)
법장은 "金獅子像"이란 그의 논서에서 이것의 의미를 금사자상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하나하나의 모든 티끌에 이르기 까지 사자의 각 눈과 귀와 수족 각각에 금사자가 있다.일체의 털에 의해 포용된 모든 사자는 동시에 그리고 즉시 하나의 털 속으로 들어간다.따라서 일체의 털 속에는 무한히 많은 사자들이 들어있다.2)
나아가 법장은 모든 티끌입자는 공간적 입장에서 상입하고 이로인해 시방이 하나의 원자속에 내재할 뿐 아니라 시간적 의미에서도 상호융섭하여 수백 수천의 무한한 영겁이 한 생각,한 찰나에 내재한다고 말한다.
티끌을 지각할 때 그것은 한순간 마음의 현현이다.한순간 마음의 현현은 수백 수천의 무한히 긴 시간과 완전히 같다....한 순간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그것은 무한히 긴 시간에 진입한다.그리고 시간들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한 순간속에 완전히 포함된다...따라서 한순간의 생각속에 3세(과거,현재,미래)의 모든 사실과 사물들이 분명하게 보인다.3)
이 논의는 생명체에서 보여지는 딜레마적 상황에 대한 좋은 설명가설로 보인다.각각의 생명체는 크기가 달라짐에 따라 살아가는 시간과 공간이 달라진다.그것을 동일한 하나의 세계로 환원하고자 하는 것은 잘못이다.세계는 다층적 우주들의 집합으로 되어 있다.
이 금사자상은 사사무애법계를 설명하는 좋은 비유이기는 하지만(더 근사한 비유로 필자는 만델브로트의 프랙탈우주를 추천한다.여기를 클릭하세요) 그 비유의 힘은 아주 제한적인 것으로 보인다.자신을 포함하는 전체를 어떻게 자신속에 압축할 수 있는가?사실은 전체와 부분이라는 것 자체가 사사무애법계를 설명하기 위한 일종의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전체와 부분은 상대적인 것이다.이것까지 포함하는 좀더 나은 비유는 징관이나 법장 등 화엄의 조사들이 가져온 거울의 비유이다.
법장은 금사장상의 비유에 이어서 같은곳에서 인다라망의 비유를 가져온다.인다라궁의 궁전은 그물로 덮혀 있고 각 그물의 눈마다 보석이 달려 있다.이 하나하나의 보석은 그 자신의 관점에서 망속의 다른 모든 보석을 반영하고 있다.각 보석속에 전체가 들어있는 것이다.그런점에서 그것은 전체이다.그러나 그것 역시 다른 보석의 관점에서 그 보석속에 들어있는 부분이다.이것은 상호반영과 重重無盡의 화엄의 통찰을 잘 보여주고 있는 압권이라고 하겠다.
징관은 거울의 비유를 통해 事事無碍法界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동일한 理의 전체를 포함하고 있는 개개의 事가 서로 구별을 유지하면서도, 서로 타자를 포함하고 타자에 포함되는 것을 말한다. 즉 一切가 一切를 포함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하나의 거울이 아홉개의 거울에 遍滿한 것과 같다. 또 아홉개의 거울을 攝受하여 하나의 거울 속으로 들어간다.....만일 하나의 거울이 많은 거울을 비출 때, 포용할 수 있는 하나의 거울은 오히려 포용되는 많은 거울의 영상 속에 두루 할 수 있다.4)
하나의 거울에는 다른 거울의 영상이 전부 들어있다. 거기에는 다른 거울에 비친 자기의 영상도 포함되어 있다. 각각의 다른 거울들도 마찬가지이다. 한마디로 一卽多, 多卽一이라고 할 수 있다. 華嚴思想에서 설하는 우주법계는 이렇게 부분이 전체를 포함하고, 다시 전체가 부분을 포함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즉 개개의 事와 事가 서로서로 무한히 상호작용을 하면서 重重無盡하게 전개되어 나가는 것이다.
이 거울의 비유는 금사자상의 비유에 비해 훨씬 사사무애법계에 대한 훨씬 근사한 모델로 보인다.우선 여기서는 전체가 부분속에 들어오는데 무리가 없다.그 이유는 이 비유에서는 전체와 부분의 개념이 해소되고 있기 때문이다.거울속에 자신을 포함한 세계가 반영되고 있지만 전체가 부분속으로 들어온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하지 않는다.그러면서도 전체가 부분속으로 들어오는듯한 거울상의 외양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전체가 부분속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아주 투박한 비유이며 좀더 근사한 비유는 각 事는 우주를 자신속에 반영하고 있다는 것일 것이다.이것이 거울의 비유이다.
이 비유에 입각한다면 화엄종의 초대조사인 두순의 "事는 事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일체를 포용한다."5)는 말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사사무애와 자기언급의 역설
그러나 필자가 볼 때는 이 비유에도 결정적인 취약점이 있다.자신이 자신을 반영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거울이 자신을 반영할수는 없기 때문이다.눈은 보는 기관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눈은 눈을 볼 수 없다.그러나 사사무애의 법계가 진정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자신을 포함한 우주가 자신속에 들어와 융섭한다는 것이다.그래서 눈이 눈을 볼 수 있어야 한다.이것이 실재의 진정한 실상이지만 이것은 럿셀이 잘 보여주었듯이 자기언급의 역설에 빠지고 만다.크레타사람이 "크레타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다"고 했을 때 자신 역시 크레타사람임으로 자신의 말도 거짓이고 크레타사람은 거짓말쟁이가 아닌 것이 된다.이것은 실재가 역설이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언어가 실재의 이 진상을 그리는 효과적인 도구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언어는 그것이 어떤 언어든 실체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이것 때문에 관계를 표현하는데 제한적이든지 아니면 자기관계 또는 자기언급과 같은 경우는 전적으로 무력하다.
다음 그림은 그 역설을 잘 보여준다.
화가는 화폭속에 그려놓고자 하는 것은 자신을 포함한 전 우주이다.그러나 화가가 전지전능한 능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자신만은 화폭안에 집어 넣을 수 없다.그것을 집어넣고자하는 가망없는 작업은 위 그림이 보여주듯이 무한퇴행에 빠진다.6)그러나 실재의 진정한 모습은 자신을 포함한 전체가 자신속에 반영되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다.실재의 이 당혹스러운 모습은 우주의 비밀스러운 자기모습이며 이것은 고대로부터 인간에게는 우주의 경이스러운 모습이었다.다음 그림을 보자.
우로보로스(Ouroboros)는 연금술사의 생명의 상징으로서 뱀이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형상이다.(우로보로스적 상징은 전세계에 널리 퍼져 있다.다른 유형을 보기위해서는 여기를 클릭하세요)
뱀이 자신의 꼬리부터 먹어들어가고 있다고 하자.뱀은 자신을 완전히 먹어치울 수 있을까?그럴 수는 없다.다먹기 전에 아마 죽고 말 것이라는 그러한 사실상의 문제를 논외로 하더라도 불가능하다.이것은 논리적 문제인 바 결국 자신의 입이 자신의 입을 먹어야하는 역설에 빠지기 때문이다.이것은 눈으로 눈을 볼 수 없는 역설이고 화가가 화가자신을 포함한 세계를 그려낼 수 없는 바로 그 역설 때문이다.그러나 생명의 실상은 이러한 역설들로 가득차 있다.자신이 자신을 포함한 세계를 자신속에 포함하는 것은 역설이기는 하지만 자연의 사실이다.
우리가 만든 인공물은 어떤가? 컴퓨터안에 delete프로그램이 있다.이 delete프로그램을 사용하여 이 delete프로그램을 지울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하다.그것을 지우고자 한다면 그 프로그램에서 나와서 다른 프로그램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사실 컴퓨터내의 전체를 지워버리는 것은 소프트웨어적으로는 불가능하고 하드적으로 포맷하는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자연에는 이것이 가능하며 이것이 바로 사사무애의 세계이다.
이러한 역설적 사실은 예술가들을 매료시켜 왔는바 그 대표적 화가가 에셔(Escher)이다.이 곤혹이 에셔의 일생을 관통해온 화두였으며 우리가 이 에셔의 그림에 매료되는 것은 이 곤혹을 예술가적 날카로움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그것을 구상화하고 있다는 점이다.그는 역설적 방식을 통해서 그릴 수 없는 것을 그려내고 있다.다음 그림은 앞서 화가의 역설을 좀더 예리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한 청년이 화랑안에서 어떤 그림을 감상하고 있다.그런데 그 그림이란 다름아닌 청년이 화랑안에서 그림을 감상하고 있는 모습이다.이 청년이 그림안에 있다고 생각하면 그림 밖으로 나와있고 그림 밖으로 나와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림 안에 들어가 있다.그림의 중심에 보이는 빈공간은 이 안팎이 서로 꼬이면서 소용돌이치는 그래서 표현불가능한 그 중심이다.이 이상한 그림은 놀랍게도 우리의 존재의 모습이다.바로 안팎이 아무런 걸림없이 교차하면서 부분이 전체속으로 들어오고 다시 전체가 부분속으로 들어가는 사사무애의 세계의 구상적 표현이다.(적어도 필자는 그렇게 생각한다.)
에셔의 다른 그림도 이것을 구상화시키려는 일련의 노력들이다.이 주제에 대한 그의 다른 작품을 보기위해서는 다음을 클릭하세요.( 그림1 그림2 그림3)
空의 원리
그러면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만일 우리가 이것을 실체의 입장에서 생각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영원한 미궁이다.전체속에 부분이 들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화엄철학은 사물의 自性(실체성)을 부정한다.그것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미혹이다.
사물 자체는 自性을 갖고 있지 않다. 즉 空하다.자성을 갖는 존재라면 그것은 다른 것과 관계맺을 수 없으며 소통할 수 없다.라이프니쯔의 모나드의 딜레마가 바로 이것을 보여주고 있다.창이 없다는 것은 자족적 실체라는 뜻이며 자성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다른 모나드와 관계할 수 있겠는가? 中論의 "실에 스스로 정해진 相이 있다면 삼에서 나오지 말아야 하리라.또 옷감에 스스로 정해진 상이 있다면 실에서 나오지 못해야 하리라."7)는 말은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음식에 자성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나의 먹이가 될 수 있다.그것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즉 소화시켜 나의 것으로 동화시킬수가 있다.)그리고 나 역시 자성이 없기 때문에 타자의 먹이가 될 수 있다.필자의 이말에 모순이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을 것이다.자성이 없다고 하면서 어떻게 "나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그렇다면 중론의 다음 구절은 어떠한가?
만일 모든 존재가 자성이 있다면 어떻게 변화가 일어날 수 있겠는가? 만일 모든 존재에 자성이 없다면 어떻게 변화가 있겠는가?(若諸法有性 云何異得異 若諸法無性 云何異有異)8)
필자는 이것을 이렇게 이해한다.여기 책이 한권있다.책의 자성은 무엇인가?그 속에 들어있는 정보라고 해야할까? 그렇지만 그것은 불쏘시개가 되어 우리를 따뜻하게 해 줄 수 있다.그외 다른 자성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그것이 정보라는 자성만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불쏘씨개가 될 수 없다.그러므로 자성이 없다는 것은 어떠한 자성으로도 될 수 있는 가능태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그리고 그것이 어떤 것으로도 될 수 있는 것은 우주 전체를 자기속에 가능적으로 내함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래서 나는 무자성 즉 空을 아낙시만드로스의 "무한정자"(to apeiron)와 유사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나의 얕은 이해일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것이 나와 관계맺기 위해서는 그 가능성이 한정되어 나와 동일한 자성으로 규정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앞 인용의 후반구를 나는 그렇게 이해한다.그러므로 어떤 것의 자성은 그것이 다른 것과의 관계맺음을 통해서 비로소 발현되는 것이다.그러나 그것이 다른 것과 관계맺으면 다른것의 자성으로 발현된다.그러므로 그것은 일정한 자성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작은 것 속에 큰 것이 들어갈 수 없다.그러나 그것이 자성이 없다면 작은 것 속에 큰 것이 들어가는 것이 아무런 장애가 될 수 없다.그래서 법장은 "이 티끌과 저 산은 비록 하나는 크고,다른 하나는 작지만 서로를 포용한다...그러므로 大는 小속에 곧바로 포함된다."고 말한다.그래서 화엄경에서 말하듯이 "무한한 국토와 바다는 항상 티끌속에서 드러나고 그리하여 한 티끌의 입자는 모든 국토와 바다에 널리 퍼져나간다."
그러면서도 각 우주들은 다른 우주들의 부분으로 융섭해서 들어오고 있다.하루살이는 나의 우주의 일부를 이루고 반면 나는 하루살이의 우주의 일부를 이룬다.서로가 서로에 중첩되고 서로가 서로에 포개지면서도 아무런 충돌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이것이 바로 사사무애의 원리이다.
화엄종의 초대조사인 두순은 "事는 융섭하는 理와 동일하기 때문에 그것은 장애없이 일체를 포용하고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방식으로 일체에 침투하며 그것들과 상호융섭한다고 한다...事는 事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일체를 포용한다."9)고 말하고 있다.
연기와 연결망
필자는 空을 가능적 무한으로 이해한다.그것은 절대적 무가 아니라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가능성이다.그것이 자성이 없는 것은 절대로 자성이 없는 무이기 때문이 아니라 어떠한 자성도 가질 수 있는 것으로 정해진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 공의 개념은 나가르쥬나(龍樹)를 비조로 하는 중관학파에 의해서 철저하게 추구되었지만 이 개념은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는 바 사물과 그 변화의 원리에 대한 부정적 파악에 그치고 있다는 것이다.그러나 불교철학속에는 또 하나 그것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개념이 있다.그것이 바로 연기의 원리이다.이 연기의 원리를 통해서 부정적방식으로 파악된 공의 개념을 긍정적이고 능동적 개념으로 전환시킨 것이 중국의 화엄철학이다.
화엄해석학적 구조에서 공의 개념은 중관파의 변증법적 부정주의에서 함축적 의미(不了義)로 생각되던 것이 화엄철학에서는 아주 명백한 의미(了義)로 철저하게 재해석되었다.화엄에서의 공은 온전히 사건들의 상호의존적이고 상입적인 성질을 의미하며,그것에 의해 법들의 완전한 진공과는 달리 존재론적 완전함과 우주적 공재성을 강조한다.10)
모든 사물은 다른 사물에 의존하고 있다.그러한 의존이 가능한 것은 각 사물들이 공하기 때문이다.공하지 않고 자성을 갖는다면 어떻게 서로간의 상호작용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중국의 화엄철학에서의 공의 용어의 쓰임새는 약간 다르다.연기의 근거가 공이 아니라 공의 의미가 바로 연기이다.공과 연기는 약간의 뉘앙스를 달리하는 동의어이다.이 연기는 바로 요즈음 논의되고 있는 연결망과 본질적인 면에서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적어도 필자는 이런 관점에서 논의를 진행하겠다.
서양철학의 전통적 실체론적 관점에 따르면 근본적인 것은 실체이고 관계(연결망)는 그 실체들이 맺는 어떤 우유적 양상이다.그러나 화엄철학에서는 이것이 역전된다.보다 근본적인 것은 연결망(인다라망과 같은 것)이고 오히려 실체(자성을 가진것)는 이 연결망이 만들어내는 우유적 현상이다.새로운 연결망의 형성은 그 실체를 변화시킨다.이것은 그 실체가 본래의 자성을 갖고 있다면 불가능한 것이다.그것이 공한 것은 연결망을 지탱하기 위한 논리적 근거이다.반면 연결망이 없다면 그것은 공하다고 하기 어렵다.그것은 전적으로 자립적이고 독립적인 실체일 것이기 때문이다.이 두 개념은 관점을 달리하는 事의 두 측면이다.
필자는 이 관점에서 사사무애에 대해 거울의 모델 보다 더 근사해 보이는 모델을 제시하고자 한다.우선 논의된 몇가지 모델들을 정리해 보자.
1.금사자상의 모델.이것은 앞서 논의한 만델브로트의 프랙탈모델이나 홀로그램모델을 통해 더 근사한 형태로 만들어 볼 수 있다.이것은 부분속에 전체가 재현되고 있다는 점에서 사사무애의 아주 중요한 측면을 모델화하는데 성공하고 있다.그러나 부분이 전체속에 재현된다고 해서 전체가 부분속으로 들어온다고 보기는 곤란하다.이것은 케슬러의 홀론(holon)의 모델이 보여주는 한계이기도 하다.그러나 사사무애는 전체와 부분의 상대화에 그 핵심이 있기 때문에 이 모델에는 한계가 있다.
2.거울모델.이것은 부분속에 전체가 어떻게 들어오는가를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다.이런 측면에서 금사자상의 모델 보다 훨씬 더 근사한 모델이다.그러나 사사무애의 진정한 핵심을 모델화하는데는 한계가 있다.상상력을 동원해서 메꿀수는 있으나 이 모델만 가지고는 자신을 자신속에 포함하는 사사무애의 본질적 특성을 구상화할 수 없다.좀더 근사한 모델은 우로보로스 모델이나 에셔의 "회랑"모델이 아닌가 한다.표현하지 않으므로써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다.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간접적 방식이며 좀더 직접적 방식이 있지 않을까 하고 궁리해 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내가 지금 작업하고 있는 이 html의 언어가 그 모델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이런 생각하에서 나의 홈페이지를 가지고 자신을 자신속에 포섭하는 모델을 만들어 보았다.가볍게 읽어 주었으면 좋겠다.
그림a는 정상적인 경우다.인공생명이라는 나의 홈페이지가 있고 그 안에 몸의 철학이라는 부분이 있다.그림b-1은 몸의 철학이라는 나의 홈페이지의 부분속에 몸의 철학을 포함한 나의 홈페이지의 전체가 들어와 있다.부분속에 전체가 상입하고 있다.b-2 는 더 이상하다.몸의 철학이라는 방안에 자기자신이 버젖이 들어와 있다.자신이 자신을 자신의 한 부분으로서 포괄하고 있다.화엄철학에서의 상입의 최고의 단계인 사사무애의 단계라고 할만하다.
html언어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이것을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을 것이다.이것은 링크방식을 달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각 파일간에는 전체도 없고 부분도 없다.링크를 통해서 어떤 것을 전체로 정하고 어떤 것을 그것의 하위 디렉토리로 정했을 뿐이다.그러므로 링크방식을 바꾸면 부분을 전체로 할 수 있고 또 전체를 부분으로 할 수도 있다.심지어는 자신을 자신의 부분으로 할 수 있다.
이것을 가지고 장난을 좀더 쳐 보자.미국의 백악관을 내 홈페이지에 연결시켜 놓는다.내 홈페이지에서 미백악관을 클릭하면 나의 홈페이지의 틀안에서 하위 디렉토리로 미백악관이 얌전히 뜬다..인터넷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미 백악관은 내가 관할하는 나의 하위부분이다"고 말해도 먹히지 않을까?인터넷은 분산네트워크이다.(이것의 모양은 엽맥의 구조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최종말단으로 내려오면서 연결고리가 감소하다가 최종말단에서 연결고리가 끊기는 중앙집중식 구조와는 다르다.이것은 多대 多의 연결이므로 어떤 두 점간의 연결고리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있기 마련이다.
이런 의미에서 내 컴퓨터는 세계의 모든 컴퓨터와 연결되어 있다.물론 직접 연결된 것은 드물지만 2-3단계 우회하면 간접적으로 연결된다.이것은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와 비슷하다.나는 김대중 대통령과 아무 인연이 없지만 2-3단계 다른 사람을 매개시키면 아마 인연이 없질 않을 것이다.(사실 나의 아저씨뻘 되는 먼친척 한 분이 최근까지 대통령 수석비서관을 지냈다.) 자 이제 세계의 인터넷의 모든 주소를 내 홈페이지와 연결시켜 놓자.어떤 것을 클릭해도 세계의 어떤 것이든 내 홈페이지안에 얌전히 뜬다.그러나 물론 이것은 나의 특권이 아니다.다른 사람도 똑같이 할 수 있다.서로가 서로를 자신의 부분으로 포함하고 있다.
이제 앞서의 한 구절을 다시 읽어 보자.그렇게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만 들리지 않을 것이다.
징관은 거울의 비유를 통해 事事無碍法界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동일한 理의 전체를 포함하고 있는 개개의 事가 서로 구별을 유지하면서도, 서로 타자를 포함하고 타자에 포함되는 것을 말한다. 즉 一切가 一切를 포함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앞의 나의 홈페이지의 그림으로 되돌아가자.모니터상에 나타나는 이것이 진정한 실재의 모습이라고 보는 사람에게는 그림b는 수수께끼일 뿐이다.그가 이해할 수 있는 세계는 그림a일 뿐이다.이것이 전혀 수수께끼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현상의 이면에 있는 것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한다.이 모니터상의 현상을 만들어내는 이면의 세계-여기서 html의 문법-에는 전체도 없고,부분도 없으며,大도 없고 小도 없다.그것이 상호연결될 때-말하자면 링크를 만들때-비로소 전체와 부분,대와 소로 발현된다.
이제 앞서의 다음 구절을 다시 한번 읽어 보자.
작은 것 속에 큰 것이 들어갈 수 없다.그러나 그것이 자성이 없다면 작은 것 속에 큰 것이 들어가는 것이 아무런 장애가 될 수 없다.
링크됨으로써 비로소 모니터상에 즉 우리의 지각속에 현현한다.그 전의 그 html화일은 작다고도,크다고도 할 수 없다.그러므로 링크를 바꿈으로서 앞서 작은 것에 앞서 큰 것이 들어가는데 아무런 문제도 없다.이러한 전체와 부분,대와 소의 걸림없는 사사무애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연기법이라면 이것은 링크와 비교될 수 있다.링크야 말로 바로 연결망이고 html 파일을 모니터속에 현상시키는 근거이기 때문이다.이 비유를 확장하면 화엄의 조사들은 이 명멸하는 모니터상의 事의 이면에 있는 그 문법을 읽은 사람들이다.그리고 우리는 이 모니터상의 事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들이다.그 이면을 읽어낼 때 각자 독자적 존재자들이 서로가 서로를 반영하면서 얽혀 있는 이 다층적 존재자들의 우주의 참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그리고 모니터상에 나타나는 그 우연한 연결을 우주의 유일한 모습이라고 보고 거기에 집착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우습지 않을까?
우선 우리가 해야할 일은 이 높은 수준에 까지 이르지 못하더라도 서로 얽혀 사는 생명체들의 다양한 우주들을 우리의 시각으로 환원시키지 말고 그 자체의 세계로 볼 수 있는 눈을 길러야겠다.사상 그자체로 돌아갈 때에만 세계는 자기를 開示한다.은폐된 것은 세계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고착된 눈이기 때문이다.필자가 생각하는 이것을 해방시키는 가장 좋은 방편은 크기에 따라 달라지는 세계의 모습을 탐색해 보는 것이다.필자가 사이즈와 형태의 연관을 몇차례의 글을 통해서 계속 천착해온 것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 주의하고 넘어가자.이러한 것들은 연기의 원리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돕는 좋은 메타포이기는 하지만 어디까지 메타포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메타포는 어떤 사물의 특정 측면의 이해를 돕기위해 고안된 것이므로 그것이 이해가 되면 재빨리 버려야 한다. 그것에 집착하면 오히려 이해의 장애물이 되고만다.예컨대 "저 사람은 생각이 깊다"고 했을 때 이 말에 집착하여 강물의 깊이를 재듯이 생각의 깊이를 측정하려고 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마찬가지로 금사자상이나 모나드는 우리가 부분을 묶어 전체를 구성하는 우리의 익숙한 손기술의 방식의 메타포이다.거기서 부분이 전체를 자신속에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주장인가? 넌센스로 치부하고 버려야 할 것인가? 그러나 이 메타포를 견지함으로써 시각화할 수 없는 원리에 대한 이해의 한끝자락이라도 잡을 수 있다면? 문제는 메타포를 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집착하는 것이다.그것의 유용성은 아주 한정적이며 그것을 넘어서면 오히려 진상의 이해를 가로막는 장애가 된다.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의 언어,심지어는 우리의 지각조차도 실재에 대한 메타포이다.(지각의 메타포적 특성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그러므로 실재에 깊은 차원(아뿔사!또 메타포)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체의 이런 방편들을 사상시켜야 한다.그것이 禪僧들이 행하는 끊임없는 공부가 아닐까 한다.진정한 공부는 채워가는 것이 아니라 비워가는 것일 것이다.필자 개인적으로는 그 차원의 근방에도 가보지 못했지만 말이다.
1) 스티브 오딘,『과정형이상학과 화엄불교』,안형관 옮김(이문출판사),p.80-81 재인용
2) 같은책,p.70-71
3)같은책,p.80-81에서 재인용
4)이승렬,『선불교에서 거울의 상징의미』,동국대 대학원,P.28에서 재인용.
5) 스티브 오딘,앞의 책,p.85에서 재인용.
6)J.W.Dunne,The Serial Universe,Farb&farb,1930,p.30-31
7).龍樹, 『中論』,김성철 역주(경서원,1993),p.232
8).같은책,p.140.
9) 스티브 오딘,앞의 책,p.85에서 재인용.
10)같은책,p.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