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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콘텐츠와 철학

매트릭스를 넘어, 가상을 넘어, 그러나..(2002.8)

가상과 현실 《매트릭스》

 

매트릭스를 넘어, 가상을 넘어..그러나..

 

 

1. 가상과 현실의 차이는 전자는 "없는 것"이고 후자는 "있는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저 꽃은 붉다"는 것이 참인지의 여부를 감각이 알려 주듯이 "저 꽃이 있다"는 것의 참인지의 여부도 감각이 알려줄 수 있을까? 상식은 물론 그렇다고 한다. "저 꽃이 붉다"는 것은 "그 꽃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는가? 없는 것이 어떻게 성질을 가질 수 있는가? 철학적 용어로 말하면 속성은 실체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실체없는 속성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껏 보아온 가상현실은 이 결론이 간단치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상현실속에서 꽃에 대한 지각을 가질 수 있으며 이것은 현실속에서의 지각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가상현실속의 꽃은 "없는 것"이라는 점에 쉽게 동의한다. 속성의 현전은 실체의 현전을 지시하지 않는다!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있는 것은 속성의 현전이지 실체의 현전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꽃은 내가 보고 듣고 느낌을 통해서 구성해낸 것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데카르트는 우리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이 세계가 단순히 데몬(악마)의 장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데카르트는 그런 생각이 내키지는 않지만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데 동의한다.

 

나는 진리의 원천인 최선의 신이 아니라, 그의 모든 계교를 나를 속이는 데 사용하는, 전능하리만큼 교활하게 속임수를 쓰는 어떤 심술굿은 악마가 있다고 가정하려 한다. 하늘·공기·지구·색채들·형체들·소리들, 그리고 우리가 보는 모든 외적 물체들은 그 악마가 나의 믿음을 농락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환상과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려 한다. 나는 나 자신을 손도, 눈도, 살도, 피도, 아무런 감각도 없는데,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고 잘못 믿는 것처럼 생각하려 한다.1)

 

『매트릭스』에서 데카르트의 데몬에 해당하는 것이 컴퓨터 인공지능이다. 이것이 매트릭스를 만들고 인간을 이 매트릭스 안에 가두어 두었다.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매트릭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매트릭스는 모든 곳에 있네. 우리의 주위에, 물론 이 방에도 있지. 창문 너머에도, 텔레비전을 볼 때도, 자네가 일하러 갈 때도, 교회에 갈 때도, 세금을 낼 때도 그것을 느끼지.

 

매트릭스는 모든 곳에 있다. 그렇다면 그것을 우리가 모를 리가 있겠는가? 왜 우리는 그것을 한번도 지각하지 못했는가? 네오의 이러한 질문에 대해 모피어스는 우리가 그런 감옥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넌 노예야, 네오.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너도 그 속에 묶여 있고, 자넨 (매트릭스의) 냄새를 맡을 수도, 맛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감옥 안에 갇힌 상태로 태어나지. 바로 자네의 마음을 통제하는 감옥이지.

 

여기서 "감옥"은 은유적 메타포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성원(member)과 집합(class) 또는 개(個)와 유(類)의 문제이다. 부분(성원)에 적용될 수 있다고 그것이 전체(집합)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으로 어느 크레타인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자신의 말도 이 진술속에 포함되는가? 그렇다면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다"는 것도 거짓말인가? 그렇다면 모든 크레타사람은 거짓말쟁이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진짜 거짓말을 했고 따라서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가 된다. 그러나 그렇다면...

이 크레타사람의 말이 의미를 가지려면 "크레타사람은 거짓말쟁이다"는 자신의 말은 여기서 제외시켜야 한다. 럿셀은 크레타 사람이 하는 말을 대상언어라 하고 이 크레타사람에 관해서 하는 말을 메타언어로 구분한다. 이 메타언어는 성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그 집합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류의 혼돈은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낙서를 하지 마시오"라고 담벼락에 써놓은 것은 낙서인가, 아닌가? "조용히 하시오"라는 나의 고함 역시 소음이 아닌가? 헌법의 개정절차를 규정한 헌법의 조항은 그 개정절차에 따라 개정할  수 있는가? "너는 거짓말쟁이야"라고 말했을 때 "예, 나는 거짓말쟁입니다"라고 말한 사람은 거짓말쟁이인가?

 

2. 이제 왜 우리가 매트릭스를 볼 수 없는지 분명해진다. 매트릭스는 단순히 시공을 점유하고 있는 어떤 "사물"(성원)이 아니다. 그것은 사물을 담고 있는 "세계"(집합)이다. 세계는 책, 책상, 교실, 지구, 은하 등과 같은 사물이 아니다. 사물은 그것이 아무리 광대한 것이라 하더라도 시간과 공간 속에 놓여진다. 그러나 세계는 시간과 공간 속에 있지 않다. 도대체 그것은 어떤 곳에도 있지 않다. 그것이 어떤 곳에 있다면 그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것이고 따라서 세계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구태여 시간과 공간의 메타포를 사용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아무 곳에도 없으면서 모든 곳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모피어스는 "매트릭스는 모든 곳에 있다"고 말하면서 "냄새 맡을 수도 맛볼 수도 없는 것"(없는 것)이라고 한다.

세계는 사물이 아니다. 따라서 사물에 적용해야할 시간, 공간, 원인의 개념을 세계에 적용할 수 없다. 그것을 마치 사물인양 다루어 시간, 공간, 원인 등을 규정하고자 할 때  "범주오류"(category mistake)에 빠지게 된다. 한 예로 흔히들 "세계의 크기는 얼마인가?"라고 묻지만 이것은 잘못된 질문이다.

사물이 크기를 가짐으로 우주도 크기를 가질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현대과학도 그렇게 생각하고 우주의 크기를 측정하는 허망한 작업에 돈을 쏟아 붓고 있다. 그러나 그 크기는 얼마인가? 그 크기의 한계 밖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 밖에 아무것도 없다면 밖이 없는데 어떻게 안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안이 없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그러나 안이 없다면 동시에 바깥이 없는 것이고 그런 면에서 경계가 없이 무한하지 않은가? 지대무외(至大無外)이므로 지소무내(至小無內)이고 至小無內이므로 至大無外인 셈이다. 화엄의 4대 祖師인 징관(澄觀)은 십현문의 하나인 광협자재무애문(廣狹自在無碍門)의 "광대즉입어무문 진모포납이무외"(廣大卽入於無門, 塵毛包納而無外)란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小는 곧 內가 없으니, 內가 없는 까닭으로 中間이 없다. 無外는 大를 말한다. 大는 곧 밖이 없으니, 밖이 없음으로 광대한 신찰(身刹)이니, 곧 內가 없는 진모(塵毛)로 들어간다. 그러므로 광협무애(廣狹無碍)라 이름한다. 卽하거나 入함에 모두 廣狹無碍함을 얻는다.진경(『晉經』)에 이르기를 "금강위산(金剛圍山)의 수가 무량하나 모두 한 터럭 끝에 능히 안치할 수 있으니,지극히 큰 것이 작은 相에 있음을 알고자 하여 보살이 이런 까닭으로 처음으로 발심하였다."고 하였다. 지극히 큰 것이 작은 相에 있음이 즉 廣狹無碍이다. 또 이르기를 "능히 작은 세계로써 큰 세계를 만들고, 큰 세계로써 작은 세계를 만든다."고 하였다.

 

그래서 세계는 무한히 작으면서 무한히 큰 셈이다. 이것은 세계가 무한히 작으면서 클 수 있다는 사실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그것은 세계의 크기를 논하는 것은 범주오류이며 넌센스라는 것을 의미한다. 넌센스임을 앎으로써 크기의 "감옥"에서 해방될 수 있다. 이것이 징관이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였다. 이 글을 읽고 작으면서도 무한히 큰 어떤 대상을 그려내려고 고심한다면 우리는 가리키는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을 보는 우를 범하게 된다.

우리가 매트릭스를 볼 수 없는 것도 똑같은 맥락에서이다. 눈이 볼 수 있는 것은 대상이나 사물이다. 우리가 내 눈앞의 꽃을 보듯이 세계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것 또한 범주오류이다. 세계는 시간과 공간 속에 규정되는 사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크기도 없고 냄새도 없고 맛도 없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것이 크기와 냄새와 맛을 만들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3. 매트릭스는 이원론을 전제하고 출발하고 있다. 매트릭스 안에서의 경험은 가짜이며 그 가짜를 폭로함으로써 진실에 이를 수 있다고 본다. 여기서 플라톤의 영향을 읽기는 어렵지 않다. 매트릭스안에서의 경험과 바깥에서의 경험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 감각자료의 내용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다르다. 나는 현실의 사과를 한입 베어물고 다시 가상현실로 들어가 사과를 한입 베어문다. 그 감각자료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러나 다르다. 하나는 가짜이고 다른 하나는 진짜이다. 배신자 사이퍼가 스미스 요원과 스테이크를 먹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다시피...난 이 스테이크가 존재않는다는 걸 압니다. 이런 것도 알아요. 내가 이걸 입에 넣으면...매트릭스가 내 두뇌에 얘기를 해 주겠죠...촉촉하고...맛있는 거라고 말요.

 

글쎄, 스테이크의 맛을 내 뇌 스스로가 알았든, 매트릭스가 주입했든 그 맛의 차이는 없을 것이다. 그 현상을 매트릭스를 갖고 설명해도 좋고 우리의 감각을 갖고 설명해도 좋다. 그렇다면 그 둘은 같은 것인가?

그러나 사이퍼에게는 이 둘은 식별가능하다. 비록 그 맛이 같다더라도 하나는 가상이고 다른 하나는 현실이다. 왜 그에게 가능한가? 매트릭스를 보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매트릭스를 볼 수 있는가? 물론 그것은 앞서 말했듯이 "봄"의 대상이 아니다. 보여지는 대상은 매트릭스(일반적으로 계)내의 대상이지 매트릭스 자체는 아니다. 매트릭스를 "보기" 위해서는 매트릭스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때 매트릭스는 대상화되고 보여지게 된다.

이것을 좀더 일반적인 용어로 말해보자. "현실적으로 있는 것"은 매트릭스 바깥에서 비로소 알려지며 매트릭스 안에서는 모든 것은 단지 "가상적으로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매트릭스를 넘어섬으로써 보여지는 것만이 현실적으로 있는 것이다. 매트릭스내의 세계가 아무리 그럴 듯 해 보이더라도 그것은 가짜이며 매트릭스 바깥의 거대한 시험관 속에 부유하고 있는 인간의 몸덩어리 그것이 현실이다. 매트릭스를 넘어가는 자만이 "있음"과 "없음", 더 정확히 말해서 "현실적으로 있음"과 "가상적으로 있음"을 구분할 수 있다. 이 자에게서는 이제 매트릭스 속의 스테이크와 진짜 스테이크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사이퍼는 매트릭스 바깥으로 나간 자이고 따라서 그가 한 말은 의미가 있다. 그는 그 차이를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자 심지어는 매트릭스의 백신 프로그램인 스미스 요원에게도 이 차이는 무의미하다. 스미스 요원이 그 강력한 힘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 네오에게 지게 되는 것은 매트릭스 자체를 그는 결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가 최초로 이것이 매트릭스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까? 영화는 모피어스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매트릭스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그 안에서 한 사람이 태어났다. 그는 무엇이든 그가 원하는 바대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를 풀어주고 진실을 가르쳐준 것은 바로 그였지. 매트릭스가 있는 한 인류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라고. 그가 죽고 난 후 오라클은 그가 돌아와 사람들에게 자유를 가져다줄 전쟁을 일으키고 마침내 매트릭스를 파괴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내가 그를 찾아 매트릭스를 헤맸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지. 그리고 난 마침내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이루었다.

 

설사 최초의 깨달은 자가 이 세계가 매트릭스임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설득할 수 있었을까?  다른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가상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그 매트릭스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그의 말에 납득되지 않는한 누구도 밖으로 나갈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요컨대 밖으로 나가야만 납득할 터인데 납득해야만 나갈 것이니 정말 딱한 노릇이다.

네오도 예외가 아니다.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전화를 걸어 탈출을 종용한다. 스미스 요원이 네오를 잡기 위해 좇아온다. 건물의 끝에 매달리고 밑은 까마득한 허공이다. 크게 잘못도 한 것이 없는데 (요원들에게 쫓길 이유는 업지는 않다. 그는 정부기관들을 해킹하는 해커이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에게서 온 모호한 전화 한 통화에 목숨을 걸어야 할까? 그는 모피어스의 말을 안듣고 결국 요원들에게 연행된다.

 

미친 짓이야! 왜 이런 일이 나한테 일어나는거지? (창문 밖으로 나가려 하다) 지금 뭘하는거야? 난 평범한 사람인데. 아무 짓도 안 했다구....이런 젠장 난 못하겠어

 

네오가 매트릭스를 보았다면 모피어스의 말을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그것을 보기 전이다. 그런데 네오는 이 정체불명의 전화 한 통화에 목숨을 걸어야 할까? 네오의 선택은 당연하다. 만일 알지 못하는 누가 여러분에게 전화를 해서 "당신은 하느님에 의해서 선택되었다. 조만간 휴거가 일어날 것이니 모든 것을 정리하고 우리에게로 오라."라고 말한다. 당신은 내일 중요한 약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미련없이 모든 것을 팽개치고 그 교회로 달려갈 것인가? 아마 그러지 않을 것이다. 네오 또한 그러지 아니한 것이다.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알게 모르게 세상이 주는 어떤 신념체계를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세상사를 끊임없이 해석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신념체계를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이 신념체계도 넓은 의미에서 일종의 매트릭스라고 할 수 있다. 이 매트릭스를 바꾸는 일과 그것이 가지는 의미와 역설에 대해서는 그레고리 베이트슨에 의해서 날카롭게 분석된 바 있다. 이것이 그의 유명한 '이중구속론'(double binding system)이다.

 

4. 가장 쉬운 예로 우리가 어린 시절 했던 "말따라하기" 놀이를 한번 생각해 보자.

 

갑;   이것은 책이다.

바보; 이것은 책이다.

갑;   이것은 사과다.

바보; 이것은 사과다.

 

(지겨워진 갑이 놀이를 그만하고자 한다.)

 

갑;   이제 그만하자.

바보; 이제 그만하자.

갑;   아니 이제 말따라하기 놀이를 끝내자니까!

바보; 아니 이제 말따라하기 놀이를 끝내자니까!

 

갑은 어떤 말로 이 놀이를 끝낼 수 있을까? 을에게 "이것은 책이다"고 했을 때의 문장과 "이제 그만하자"고 했을 때의 문장의 계형이 서로 다르다는 것(전자는 대상언어이고 후자는 대상언어에 대한 언어 즉 메타언어이다)을 어떻게 설득시킬 수 있을까? 정말 곤란한 점은 "이제 그만하자"는 말에 대한 말도 역시 말이라는 것이다. "이제 그만하자는 말은 말따라하기 놀이의 말에 속하지 않는다"고 설명해본들 그마저도 따라 할 것이다. 한글 워드프로세서도 대상언어와 메타언어를 구분하지 못하는데 한 예로 다음  두 문장을 타이프해 보자.

 

1. 집안을 깨끗히 합시다.

2. 깨끗히 는 틀렸고 깨끗이 가 맞습니다.

 

1번 문장의 깨끗히 를 입력하는 순간 경고음이 울리면서 깨끗이 로 바뀔 것이다. 2 번 문장을 타이프하는 순간 곤욕을 치를 것이다. 한번 시도해 보아라. 2번 문장은 유의미한 문장임에도 불구하고 컴퓨터는 이것을 자꾸 아래와 같은 무의미한 문장으로 바꾸어 버린다.

 

 깨끗이는 틀렸고 깨끗이 가 맞습니다.

 

2번 문장에서 깨끗히는 틀린 단어가 아니다. 이것을 대상언어로 보면 맞춤법이 틀렸지만 메타언어로 보면 틀린 것이 아니다. 메타언어는 맞춤법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컴퓨터는 대상언어(깨끗이)와 메타언어(깨끗히, 깨긋이)를 구분하지 못한다. (깨끗히, 깨긋이 는 대상에 대한 언급이 아니고 단어 깨끗히, 깨긋이 에 대한 언급이다. 후자를 언어에 대한 언어라는 의미에서 메타언어라고 한다.)

교정볼 때도 이런 곤혹스러운 경우가 있다. 예컨대 인제대학이란 글자를 지정한 다음 "고딕체로"라고 교정쇄에 써놓았다면 '인제대학'이라는 글자를  '고딕체'로 라는 글자로 교체하라는 것인가(유형1) 아니면 '인제대학'이라는 신명조로 된 글자체를 "인제대학"이라는 고딕체 글자체로 바꾸라는 것인가(유형2)? 바보가 아닌 이상 문맥으로 보아 어느 쪽인지를 쉽게 이해하겠지만 만일 컴퓨터가 교정을 본다면 분명히 에러를 일으킬 것이다. 미리 교정지의 앞 부분에 이렇게 써 두면 어떨까?  "빨강색 펜으로 쓴 글은 유형1이고 파랑색 펜으로 쓴 글은 유형2입니다." 이것으로 OK? 아니다! 이 문장은 어떤 색으로 해야하지? 이것은 유형1인가 유형2인가????

말을 말로서 설명하는한 어떤 방법으로도 말과 말의 말을 구분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의 언어생활은 말, 말의 말, 말의 말의 말 등 차원을 달리하는 여러 가지 계형들이 뒤섞여 있다. 그럼에도 사용되는 말들의 계형들을 척척 분리하고 거기에 따라 재해석하는 이 놀라운 유연성이 우리 언어의 큰 비밀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이 계형구분은 번역 소프트웨어들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기도 하다.)

다시 『매트릭스』로 돌아가자.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빨강과 파랑의 2개의 알약을 제시한다. 파랑은 일상의 세계로 돌아가는 약이다. 이 약을 먹으면 마치 악몽을 꾼 것처럼 잠에서 깨어날 것이다. 빨강은 매트릭스 밖으로 나가게 하는 약이다. 네오는 빨간 약을 선택하고 매트릭스 밖으로 나가게 된다. 자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져볼 수 있다.  진저리치는 그 장면 -끝없이 펼쳐진 부양조와 그 속의 인간들- 이 현실이라는 것을 네오는 어떻게 확신할 수 있었을까? 매트릭스 밖으로 나갔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답이 아니다. 어쩌면 그 약은 오히려 현실에서 가상으로 들어가게 하는 약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매트릭스 밖으로 나간 것이 아니라 안으로 들어간 것일지도 모른다.

 

5. 모피어스와 그 반체제집단은 깨달은 자들인가 아니면 달을 보고 짖어대는 광인들의 집단인가? 영화는 모피어스와 네오의 관점에서 쓰여졌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 관점을 받아들이게 되어 자동으로 안과 바깥을 가르는 이원론자가 된다. 우리는 스미스 요원의 관점에서 모피어스와 네오를 볼 수도 있다. 그들은 이 세계를 매트릭스라고 생각하는 환상에 젖어 있으며 거기서부터 인류를 해방시키는 것이 자신들의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과격한 신흥종교 집단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이 세계를 매트릭스라고 주장하고 우리를 프로그램이라고 단언한다. 사실 그렇게 주장하면 그렇게 그럴듯하게 설명될 수 도 있다. 당신은 당신이 진정 프로그램이 아닌 그 무엇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가?

모피어스가 가정했듯이 가상과 현실의 구분이 분명한 것이 아니다. 모피어스와 네오의 세계가 가상일 수도 있고 아니면 스미스 요원의 세계가 가상일 수도 있다. 어느 것이 가상이고 어느 것이 현실인지를 구획하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감각적 충실성? 그러나 이 영화도 보여주고 있듯이 감각적 충실성에서는 두 세계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감각은 그것의 현실성을 보증해주지 않는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매트릭스의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있는 것"은 매트릭스 바깥에서 비로소 알려지며 매트릭스 안에서는 모든 것은 단지 "가상적으로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매트릭스를 넘어섬으로써 보여지는 것만이 현실적으로 있는 것이다. 매트릭스내의 세계가 아무리 그럴 듯 해보이더라도 그것은 가짜이며 매트릭스 바깥의 거대한 시험관속에 부유하고 있는 인간의 몸덩어리 그것이 현실이다. 매트릭스를 넘어가는 자만이 "있음"과 "없음", 더 정확히 말해서 "현실적으로 있음"과 "가상적으로 있음"을 구분할 수 있다.

자, 그러나 아직 문제가 있다. 그가 매트릭스의 바깥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매트릭스의 바깥을 매트릭스의 내부와 구분시키는 존재론적 차이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사 그런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설득시킬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또 다시 감각에 의지해야 하는데 감각은 유감스럽게도 존재를 함의하지 않는다.

감각은 세계에 갇혀 있으며 그자체 있음과 없음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있음과 없음이 문제되는 것은 세계를 넘어서고자 할 때 제기되는 물음이다. 있음의 근거를 묻는 것은 결국 세계의 근거를 묻는 것이고 그 근거는 물론 세계 밖에 있다. 세계 밖을 고려함으로써 비로소 있는 것(현실)과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없는 것(가상)을 구분할 수 있다. 결국 매트릭스의 세계 내에 있는 이상 "존재는 바로 지각됨"이며 가상은 넌센스이다. "우리에게 보이면(지각되면) 있는 것이지 그럼에도 없다고 하는 것이 무슨 말인가?" 당신의 말이 의미를 가지려면 세계의 바깥이 있어야 한다. 다시말해서 가상과 현실의 구분이 가능하려면 세계의 바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의 바깥이라는 것은 형용의 모순이다. 바깥이 있다면 그것은 세계가 아니라 세계의 일부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깥이 있다면 그것은 대상이서는 안된다.(대상인 한에서 그것은 바깥이 아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주체'(subject)이다. 반 프라센은 주체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하고 있다.

 

인간이 정신적인 존재인 것은 그가 정신적인 공간 가운데 자신을 숨겨 두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일정한 한 점에 이르러서는 어떤 종류의 객관화라도 모두 벗어나 버리기 때문이다. 정신은 인간의 비밀이고,이것은 우리의 포착의 대상이 아니다. 분명히 2가지의 측면이 인간에게 있다. 우리는 인간을 대상으로 관찰할 수있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 가운데 뗄레야 뗄 수없는 핵심은 우리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나'는 대상으로 파악하려고 하는 한 항상 우리의 손을 벗어난다. 반면 '나'는 대상을 이해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필수조건이다. '나'에 대해서 주체성으로 말할 수있지만, 결코 대상으로 말할 수없다. '나'는 대상의 평면위에서는 수직선과 같다. 그것은 선험적이다. '나'는 이와같이 대상이 나타날 수있는 조건이다. 정신은 세계의 한가운데 있지 않고,이 정신을 통해서 비로소 세계가 우리 앞에 등장한다. 2)

 

비트겐슈타인은 이것을 "주체는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세계의 한계이다"3)는 통찰로 요약하고 있다. 이것이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주체로서의 코키토(cogito)이다. 가상과 현실의 확고한 구분을 원했던 데카르트가 『방법서설』과『성찰』에서 그 탄탄한 기반으로서 가져온 것이 바로 이 코키토였다. 그러나 앞서 "가상, 가상현실, 현실"에서 논의된 것처럼 오늘날 가상현실의 기술은 이 코키토 마저 확실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6. 『매트릭스』는 매트릭스 안과 밖을 전제하고 영화가 진행된다.(엄청난 형이상학적 가정!) 우리의 세계가 매트릭스이고 그 밖의 세계가 있을지 모른다. 전자가 플라톤이 말하는 현상계이고 후자가 이데아의 세계인가? 전자가 가상의 세계이고 후자가 현실의 세계인가? "깨달은 자"란 이 매트릭스를 넘어서서 매트릭스를 "본" 자들인가? 4)

대략 이런 관점들은 이원론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상과 현실의 이원론을 인정하지 아니하는 입장들도 많다. 주로 "근본적 경험론"(radical empiricism)이라 불리는 것으로 버클리의 유아론에서 후설의 현상학 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이루고 있다. 불교의 인식론도 이 후자의 스펙트럼 속에 위치하고 있다. 여기서는 지각과 존재가 동일시 되며 따라서 가상과 현실은 뚜렷이 구별되지 않는다. 이 입장에 서 있는 영화가 『토탈리콜』이다.

이제 『매트릭스』와『토탈리콜』의 그 저변에 깔린 인식론적 차이를 검토해 보기로 하자.

 

 

1. 데카르트,『방법서설·성찰』,김형효 옮김(삼성출판사,1992), 147면

2. Van Peursen,『몸,영혼,정신』,손봉호 옮김(서광사,1985),154-155면

3. L.Wittgenstein,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RKP,1971), p.117

4. 플라톤이 『국가론』에서 개진하고 있는 동굴의 비유는 이 깨달은 자들의 갈등을 소개하고 있다. 플라톤은 바깥으로 출구가 하나 있는 지하동굴을 상상해 보라고 한다. 이 동굴에는 태어날 때부터 얼굴이 동굴의 안쪽으로 고정되어 출구의 해빛을 본적이 없는 죄수들이 살고 있다. 그들 뒤에 사람이나 동물들이 움직이고 있고 이것이 죄수들의 시선이 향하는 동굴내벽에 실루엣으로 비춰지고 있다.

그 가운데 어떤 죄수가 족쇄를 풀고 실루엣의 원인이 되고 있는 진짜 세계를 보았다고 하자. 이 사람이 다른 죄수들에게 당신들이 보고 있는 세계는 진정한 세계의 실루엣에 지나지 않으며 족쇄를 풀고 나를 따라 오면 진정한 세계를 볼 수 있다고 설교하고 있다고 하자. 건전한 상식은 말한다. 그것을 입증해 보이면 이 "자물쇠" -당신은 "족쇄"라고 하지만- 를 풀겠다. 그러나 이 깨달은 자는 족쇄를 풀어야만 그것을 입증해 보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죄수들에게  이 "자물쇠"야 말로 어떤 것이 진정한 실재이고 어떤 것이 환상인가를 규정해주는 틀이다. 그것을 풀었을 때 다른 세계가 보이겠지만 그것은 진정한 실재가 아니라 규정의 틀이 붕괴된데 따라오는 환영이다. 소위 "깨달은 자"는 이 "죄수"의 논리를 논리적으로는 절대 부술 수 없다. 해방되기를 거부하는 자를 어찌하랴! 혀를 차며 안타까와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