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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콘텐츠와 철학

나는 누구이며,왜 존재하는가?(2000.5)

나는 누구이며,왜 존재하는가?

- 나의 신화읽기-

 

 

 

외계의 지적 존재

 

아서 클라크(A.C.Clarke) 원작,스테인리 커브릭 감독의 ≪서기 2001년≫(2001:A Space Odyssey,1968)은 이제 SF영화의 고전이 되었다.이것은 본래 아서 클라크가 1951년에 발표한 『파수꾼』(The Sentinel)을 각색한 것이다.

 

나는 아서 클라크를 SF작가 가운데 최고로 친다.그의 작품은 단순한 SF소설의 범주를 넘어서는 범상치 않은 그 무엇이 있다.그것은 본격적 문학작품으로,철학적 토론주제로 읽혀질만한 가치가 있다.흔히들 아서 클라크를  아이작 아시모프(I.Assimov)와 비교하곤 하는데 아시모프는 단순히 인기있는 SF작가이지 비교할 만한 상대가 아니다.그의 작품들속에는 인간에 대한 어떤 통찰을 찾아 보기 어렵다.그러나 아서 클라크는 다르다.

 

사실 SF는 작가의 역량에 따라서는 깊은 통찰을 담아내기에 적합한 장르이다.우리의 일상적 경험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상황들을 배경으로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사실 아서 클라크는 이 SF의 잇점을 최대로 활용한 작가가 아니었는가 한다.

 

아서 클라크가 여러 작품들을 통해서 일관성있게 추구해온 한 주제가 있다.인간의 자기발견의 문제이다.숲속에 들어가서는 숲을 볼 수 없듯이 지구를 벗어나지 않고는 내가 살고있는 행성을 객관적으로 들여다 볼 수 없다.그런 의미에서 우주시대의 개막은 인류가 자신을 바깥에서 들여다 본 최초의 경험이었다. 이론이야 어떠했든 우리의 감각에는  이 어머니 대지는 영원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우주 그 자체였다.그러나 우리눈에 보인 지구는 그렇지 않았다.광활한 우주공간에 외로이 떠돌고 있는 평범한 한 행성에 지나지 않았다.이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우연히 만들어졌다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소멸해갈 우리 존재의 허망함으로 느낄 수도 있겠지만 아서 클라크의 눈에 비친 경험은 그 반대였던 것 같다.망망한 침묵의 우주에 푸른 빛을 발하고 있는 생명의 행성..그것은 이 우주와 연관된 어떤 의미를 갖지 않으면 안된다.그것은 우연일 수 없으며 이 우주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음이 틀림없다.이것은 오래된 질문이다.그러나 우리는 이제 이것을 우주시대의 배경하에 새롭게 조명할 수 있게 되었다.≪서기 2001년≫의 줄거리는 대강 이렇다.

 

인류가 태어나기 이전의 태고의 어느 때,외계인이 지구를 방문했다.여기서 미래의 어느 시기에 지성이 탄생할 가능성에 주목하면서 떠나기 전에 달의 이면에 검은 선돌의 모노리스(monolith)를 세워 놓고 간다.만일 지성이 출현하여 과학기술문명을 구현하게 되면 분명히 달을 방문하게 될 것이고 그 지적 생명체는 달의 뒷면에 있는 거대한 인공물을 보게 될 것이다.모노리스에 손대는 순간 신호가 발사되도록 장치되어 있다.이것은 외계인의 재방문을 알리는 신호가 될 것이다.

 

사족 하나.원작인 『파수꾼』에서는 모노리스가 계속 신호를 발사하고 있는데 인간이 이것을 부숨으로써 발사가 중지되고 이것으로 과학기술문명의 출현을 외계지성이 알게 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 보다는 인간에 의한 어떤 개입이 있었을 때 신호가 발사되는 것으로 하는 것이 더 그럴듯해 보인다. ≪서기 2001년≫에는 이렇게 바뀌어 있다.

 

사족 또 하나.『파수꾼』에서는 외계인이 지구를 방문하여 원숭이 가운데 한 종을 선택해서  품종개량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파수꾼』에서는 이런 언급이 없다.영화에 추가된 이 장면이 좀 유치해 보인다.소설에서처럼 외계지성을 개입자가 아닌 관찰자로 설정했으면 영화의 첫 장면의 유치한 부분을 다 뺄 수 있었을 텐데..

 

여하튼 아서 클라크는 모노리스의 의미를 주인공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거의 1천억개의 별이 은하수의 원을 그리며 회전하고 있으며 아주 오래전에 다른 태양의 세계에서 다른 외계종족들이 우리가 도달한 문명의 경지에 도달했거나 앞질렀을 것이다.그러한 문명을 생각해 보라.천지창조의 희미한 여광을 거슬러 먼 과거의 시간에,아직 어려서 생명이 존재하는 곳이라고는 아주 적은 그러한 우주의 주인의 문명을,그들의 세계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고독을,무한한 우주를 내려다 보며 자신의 생각을 나눌 어떠한 이도 발견 못하는 신의 고독을 지녔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행성을 탐사하듯 성단을 탐사했을 것이다.모든 곳에 세계는 존재했겠지만 그곳은 아무도 살지 않거나 지능없이 우굴거리는 생물들로 가득차 있었을 것이다. 우리의 지구역시 마찬가지였으며 여명의 외계인들이 탄 우주선이 명왕성의 뒤편의 혼돈으로부터 미끄러져 들어왔을 때 아직 거대한 화산에서 연기가 분출하여 하늘을 뒤덮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 우주방랑자는 불꽃과 얼음사이의 좁은 구역의 궤도를 돌며 지구를 살펴 보았을 것이며 지구가 태양의 마음에 드는 자식일 것이라고 추측했을 것이다."먼 미래 여기에 지성을 가진 생명체가 존재하게 될 것이다."그러나 그들 앞에 셀수도 없이 많은 별들이 기다리고 있었으며 더욱이 그들은 다시 이 길로 돌아올 수 있을지 조차 알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생명의 약속을 지닌 모든 세계를 관찰하기 위해,우주에 흩어져 있는 수백만개의 감시인중의 하나를 남겨 두었다.그것은 하나의 신호기였으며 가없는 세월에 걸쳐 아무도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신호를 꾸준히 보내왔다.

 

아마 여러분은 이제 왜 저 크리스탈 피라미드가 지구상이 아닌 달에 설치되었는지 이해할 것이다.그것의 건조자는 야만스러운 상태에서 버둥거리는 그러한 종족에게는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그들은 단지 우리의 요람인 지구를 벗어나 우주여행이 가능할 정도의 고도문명인에게만 흥미가 있다.그 점은 모든 지성적 종족이 언젠가 직면해야 하는 도전이었다.그것은 이중의 도전으로서 하나는 원자력 에너지의 정복에 관한 것이었으며 또 다른 하나는 발달된 과학기술로 자멸하느냐 마느냐 하는 마지막 결정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그 단계를 넘어섰다면 피라미드를 발견하고 그것을 여는 것은 시간문제였다.이제 그것의 신호는 멈추었으며 그 책임자들은 지구에 관심을 기울 것이다.그들은 우리의 어린애같은 문명을 도와줄지 모른다...

 

나는 이제 저 군집된 별들중에서 외계문명인이 있을까 하는 궁금함없이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다.평범한 비유를 드는 것을 양해한다면 우리는 화재경보 단추를 눌러 놓고 단지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나는 우리가 그다지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이라 생각한다."

 

 

목성의 유로파를 향해서 출발하는 디스커버리호

 

아서 클라크의 또 다른 작품인 『지구유년기 끝날 때』(Childhood's End,1953)는  『파수꾼』의 속편이라고 볼 수 있다.지구상의 분쟁이 격심하고 새로운 세계대전이 우려되고 있는 상황에서 갑자기 지구의 하늘에 외계의 우주선단들이 자리잡으면서 시작된다.그들은 국가의 모든 기능을 중단시키고 지구의 직접 통치에 들어간다.그들은 우주에 영적 정신의 씨앗을 뿌리고 양육하는 역할을 가진 우주의 보모이다.인간에게서 그 씨앗을 보았으며 그래서 전쟁으로 인한 파멸을 방관할 수 없어 전쟁을 종식시키고 인간의 영적 진화를 돕기위해 지구로 온 것으로 상정된다.인간의 靈的 진화가 시작되자 이 외계인들은 서둘러 지구를 떠난다.이 영적 에너지는 이들에게 치명적인 것이기 때문이다.그들은 누구인가? 앞서의 파수꾼에서 모노리스가 반짝이는 아이디어였다면 여기서의 반짝이는 아이디어는 이 외계인의 정체이다.그들이 자신의 형상을 드러내었을 때 그 형상은 우리에게 아주 낯익은 것이었다.바로 악마의 형상이었다.

 

필자는 인간의 영적 진화와 같은 유치한 이야기에는 흥미가 없다.필자가 흥미를 가진 것은 아서 클라크의 악마에 대한 독특한 해석이다. 아득한 태고에 우리 인간에 지성의 씨를 뿌리고 키워온 자는 바로 이 외계인이었으며 이것이 우리 인류의 집단무의식속에 공통된 기억으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어느 문화권이든 우주와 인간의 창조주로서 신에 관한 설화가 없는 곳이 없다.신은 누구인가? 우리의 無知가 만들어낸 한갓된 환상인가?대자연의 공포에 대한 심리적 보상물인가?신의 의미는 보다 깊은 곳에 있다.그것은 자기를 알고자 하는 내면의 깊은 충동과 연관되어 있다.

 

우리가 찾아낸 신(우리의 창조주)의 얼굴은 무엇인가?아서 클라크의 《지구유년기 끝날때》에 등장하는 신의 얼굴은 악마였다.그것은 동시에 우리의 얼굴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이 책에서는 인간은 영적 존재로 진화함으로써 악마의 지배를 벗어나지만 이것은 인간 자신의 악마적 원천을 부정하려는 심리적 방어기제가 아닐까? 신은 왜 악마에게 인간의 창조를 맡겨 놓은 것일까?

 

 

프로메테우스

 

그리이스 신화에서는 인간의 창조설화도 똑같은 주제를 변주하고 있다.인간의 창조자는 주신 제우스가 아니라 프로메테우스(Prometheus)이다. 그는 거인족인 타이탄족의 일원이었으며 이들은 인간창조 이전 부터 이 지상에 살고 있었으며 제우스를 도와서 크로노스를 몰아내고 제우스 치하의 올림푸스시대를 연 주역중의 한 신이다.

 

주신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에게 생명체의 창조의 임무를 맡긴다.땅의 흙을 약간 취해서 그것을 물로 반죽해 가지고 신들의 형상에 따라 인간을 빚어 내었다. 그는 짐승들은 모두 얼굴을 밑으로 하여 땅만 내려다 보고 다니게 했으나 사람들은 얼굴을 들어 하늘로 향하고 별들을 바라볼 수 있도록 그에게 두 다리로 곧추 설 수 있는 자세를 취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런데 다른 동물들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동물들이 스스로 생존할 수 있도록 날개를 주고,발톱을 주고,갑옷을 주는 등 모든 재료를 다 써버려 인간에게는 더 이상 줄 것이 없었다. 프로메테우스는 궁리 끝에 태양의 수레로 부터 불을 옮겨 붙여 가지고 와서 인간에게 주었다. 이 선물을 받고 나니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길 바가 아니었다. 이것은 인간들로 하여금 다른 동물들을 복종시킬 무기와 땅을 경작할 연장을 만들 수 있도록 했고 주거를 따뜻하게 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이 불은 우주의 주신 제우스가 피조물에게 주지 못하도록 금지시킨 것이었다. 진노한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에게 벌을 내려 코카서스 산정의 바위에 그를 결박해 놓고 독수리에게 간을 빼먹게 했다. 빼먹히는 대로 새것이 돋아나서 그는 영원히 그 고통의 징벌을 받지 않으면 안되도록 운명 지워졌다. 불을 받은 인간에게도 징벌이 내려졌는데 제우스는'판도라'라는 여자 -그 때 까지는 여자가 없었다- 를 만들어 인간세계에 내려 보내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유해한 모든 악 -통풍,신경통,복통 등 신체적 질병과 질투,시기,복수 등 정신적 질병- 을 항아리 속에 가두어 놓았는데, 판도라가 그 항아리 두껑을 열고 그것을 들여다 보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모든 악이 인간세계 속에 퍼지고 제우스의 징벌은 실현되었다.

 

인간은 신에 의해 창조된 자가 아니다.인간은 프로메테우스의 신에 대한 반역의 결과이다.우리의 인간은 프로메테우스에 양육된 자이며 그 프로메테우스는 신의 반역자 곧 악마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신은 악마에게 인간의 창조를 맡겨 놓지 않았다.스스로 탈취했을 뿐이다.

 

 

뱀 또는 사탄

 

우리는 또 다른 변주를 성서의 창세기 기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①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에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1-26-27)

 

②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로사대 동산 각종 실과의 나무는 너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령 죽으리라 하시니라.(2-16-17)  

 

③ 여호아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들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 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3-1-7)

 

④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을 피하여 동산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벗었음으로 두려워 하여 숨었나이다.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너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말라 명한 그 나무의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아담에게 이르시되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3-8-17)

 

 ①은 인간의 창조인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것은 물리적인 것이라기 보다 하나님이 갖고 있는 그 본질을 인간에게 부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본질은 무엇일까? 그것은 무제약적인 '자유의지'라 생각되는데 그렇지 않고는 하나님이 아담과 이브에게 금령의 위반을 추궁하는 것은 자가당착일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가진 최고의 것,즉 아무 것에도 구속받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할 수 있는 그 권능을 인간에게 부여해 준 것이다. 그런데 ② 즉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금령은 무엇인가?진정한 인간의 창조는 이 ②를 어김으로써 시작된다.이것을 매개하는 자가 뱀 즉 사탄이다.

 

③은 사탄의 유혹과 금령의 위반을 기술하고 있다. 뱀은 고래로 '지식'과 '지혜'를 상징해온 동물로서 신성시 되어왔다. 이 뱀은 인간의 잠자고 있는 능력 -원래 하나님으로 부터 부여받은 신적인 능력- 을 흔들어 깨워놓는다. "선악과를 먹어라. 그러면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 같이 될 것이다"라고 유혹한다. 그러나 그것은 창조주에 대한 반역을 통해서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반역은 이윽고 결행되고,이 반역을 통해서 자기의식을 획득한다. 그는 자기와 대상세계를 준별하고, 그 반사적 결과로서 자기가 자기를 대상화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한다.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라는 귀절은 눈이 밝아졌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분명히 보여준다. 자신이 벗은 줄을 알기 위해서는 자기를 관찰하는 또 하나의 자기가 있음을 의미하며 이것은 자기의식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자기의식의 생성을 의미한다. 배반을 통해 진정한 인간이 출현한 것이다.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의 눈을 피해 은밀히 모반한 바로 그 사건이다.

 

 ④는 금령의 위반에 대한 창조주의 응징이다. 하나님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너게 고하였느냐"고 묻는다. 바로 자기가 자기에게 고한 것이다. 그것은 자기의식이며 선악과를 먹음으로써만 일어날 수 있는 효과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네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의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고 추궁한다. 하나님의 응징은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는 노동의 명령으로 나타난다.그리고 영원히 낙원에서 추방된다.그리이스신화에서는 프로메테우스는 코카서스 산정에서 간이 쪼이고 인간은 판도라의 저주에 걸린다.

 

인간을 만든자는 누구인가?바로 악마이다.제우스도 그것을 원치 않았으며 여호와도 그것을 원치 않았다.그러나 그는 악마와 결탁하여 스스로를 만들었다.이 악마는 과연 누구인가?좀더 분석을 계속해 보자.

 

 

메피스토펠레스

 

파우스트의 한탄에서 극의 첫 장면이 열린다.

 

 

아아,나는 여기서 철학도,법학도,의학도

 

그만 두었으면 좋았으련만,신학까지

 

열심히 힘들여 연구를 마쳤다.

 

그 결과가 이렇게 불쌍한 바보꼴이라.

 

전보다 조금도 똑똑해진 게 없다.

..

그러나 지금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는 걸 깨닫고 있다.

 

그걸 생각하면 이 가슴이 타버릴 것같다.

..

 

 

그는 자신이 신과 닮지 않았음을 한탄한다.

 

 

신들과 나는 닮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나는 먼지속에 꿈틀대는 벌레와 비슷하다.

 

먼지를 먹고 살며,길가는 사람에게 짓밟혀

 

죽어가는 벌레다.

 

 

그는 이제 모반의 준비가 되었다.

 

 

불수레가 가벼운 날개를 타고

 

내게 너울너울 다가온다!나는 새로운 궤도에 따라

 

대기를 뚫고,순수한 활동의 新天地로

 

향해가는 마음의 준비가 돼 있음을 느낀다.

 

이 고상한 생활,신들의 즐기는 듯한 환희!

 

그대는 아직 벌레에 지나지 않는데,이것을 누릴 자격이 있는가?

 

좋다,정다운 지상의 태양에 과감히 등을 돌려라!

 

모두가 그 앞을 살금살금 지나는 문을

 

대담하게 열어젖혀라.

 

남자의 위엄은 신들의 권위앞에 추춤거리지 않고

 

저 어두운 죽음의 동굴에도 겁내지 않고,

 

좁은 입구를 둘러싸고 지옥의 불길이 타오르는

 

저 통로를 향해 돌진하고,

 

설사 허무속으로 흘러가 버릴 위험이 따르더라도

 

밝은 낯으로 이 첫걸음을 내딛는 결의를

 

행위로써 증명할 때는 바로 지금이다!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접근한다.악마는 자신을 소개한다.

 

 

저는 항상 부정하는 정신입니다.

 

생겨나는 모든 것은 소멸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들이 죄악이다,파괴다 하는 것,

 

간단히 말해 악이라 부르는 일체의 것이

 

저의 본래의 성분입니다.

..

저는 처음엔 일체였던 부분의 부분입니다.

 

빛을 낳은 '어둠'의 일부분입니다.

 

거만한 빛은 어머니인 어둠을 상대로

 

낡은 지위와 공간을 다투고 있습니다만,

 

잘돼갈리 없습니다,아무리 노력해봐도

 

빛은 사로잡혀 물체에 달라붙어 있으니까요.

 

빛은 물체로부터 흘러,물체를 아름답게 하지만

 

물체가 그 진로를 방해합니다.

 

그래서 제가 보는 바로는 머지않아

 

물체와 함께 빛은 망할 것입니다.

 

 

진리의 갈증에 허덕이던 파우스트는 세상의 모든 진리-권력과 함께-를 보여주겠다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제의를 받아 들인다.자신의 갈증이 해소되었다면 그는 이렇게 외칠 것이고 메피스토펠레스는 그의 영혼을 가질 것이다.

 

 

그럼 이렇게 하자!

 

내가 어떤 순간을 향해

 

멈추어 다오,그대는 정말로 아름답구나!한다면

 

자네는 날 꽁꽁 결박해도 좋다.

 

그때 나는 기꺼이 멸망하겠다!

 

그때는 弔鐘이 울려도 좋다.

..

시계는 멈추고 바늘은 떨어져 나가라 하라.

 

나의 시간은 끝인 것이다!

 

 

진리의 욕구를 얻을 수 있다면 내 영혼 따위가 무엇이랴? 그는 외친다.

 

 

어떤 위험한 생각도 나는 두려워 하지 않는다.극도로 괴로운 향락도,

 

사랑으로 인한 미움도,속이 후련해지는 화풀이도,

 

답답하게 지식욕을 채운 나의 가슴은,

 

이제부터는 어떠한 고통이든 다 맞아 들여

 

인간 전체가 받아들여야 할 것을

 

이 내부에 있는 '나'로 하여금 맛보게 하리라.

 

이 정신으로 최고의 것과 가장 깊숙이 있는 것을 붙잡아,

 

인류의 행복도 비애도 모두 이 가슴에 쌓아놓고

 

이 자아를 인류의 자아로 넓혀

 

인류 그 자체처럼,마침내 나도 멸망하리라.

 

 

신-악마-인간   

 

신화의 기본패턴은 항상 3중구도이다.그리이스 신화는 제우스-프로메테우스-인간의 3중구도이며 성서는 여호아-사탄(뱀)-인간의 3중구도이고 파우스트는 신-메피스토펠레스-파우스트의 3중구도이다.심지어는 아서 클라크의 소설도 악마의 형상을 한 외계지성,육으로서의 인간,영적 인간의 3중구도이다.그러나 이것은 사실 인간의 악마성을 은폐하기위한 교묘한 은폐의 수사법이다.인간을 2원화함으로써 인간성속의 그 부정적 특성을 은폐하고 전가하기 위한 구도로 설정된 것이 악마일 뿐이다.

 

성서 창세기 기사에서 뱀은 인간 아담을 유혹하는 악의 표상으로 나타나지만 뱀은 인간 아담 자신외에 누구도 아니다.역할의 2원화를 통해서 자신의 악마적 특성을 교묘하게 은폐하고 있을 뿐이다.똑같은 것이 그리이스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와 인간으로 2원화되어 있고 파우스트속에서는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로 2원화 되어 있다.메피스트펠레스는 자신을 '처음에 일체였던 부분의 부분'이고,자신의 본질을 '부정하는 정신'이라고 소개한다.이것은 바로 메피스토펠레스의 입을 빌린 -그래서 은폐하고 싶은-인간 자신에 대한 고백일 것이다.고대신화에서 인간의 시작을 음울한 색조의 배반과 살해의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정신속에 들어있는 어둠의 부분에 대한 통찰인 것이다.

 

신 즉 자연에 대한 반역은 인간의 원초적 운명속에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그것은 처음에 일체였던 부분의 부분이지만 이제 그것과 맞서 있는 대립자-악마-로 등장한다.그의 힘의 원천은 분열이다.그것은 자연에 자신의 논리를 강요하고 그 논리에 따라 자연을 짜르고,가르고,분해한다.그것의 악마적 본성은 자신의 모태에 반역하고,그것을 자신의 확장을 위한 제물로 삼는다.그것은 자연의 창조성의 극치이지만 결과적으로 자연에 밀어닥친 재난이다.

 

신은 신화에서 보듯이 인간의 창조를 원하지 않는다.그러나 신은 인간의 창조가 은밀한 모반속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알면서 그것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는다.그의 모반을 통해서 비로소 신은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악마의 출현과 그 몰락을 통해서 신,자연,또는 이 우주는 자기의식을 획득한다. 괴테가 말했듯이 악마는 자신의 의도를 추구하지만 결국 신의 의도에 봉사할 뿐이다.아서 클라크에서 그 악마의 형상을 한 지성적 존재는 영적 아이(우주의 자기의식)의 출현에 봉사할 뿐이다.(클라크와는 달리 나는 전자를 인간으로 후자를 신으로 해석한다)

 

그렇다면 더 깊은 차원에서 신과 악마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악마는 신의 자기인식의 과정일 뿐이다.그러므로 인간의 신에 대한 원초적 반란은 신이 자기자신을 찾아가는 그 출발점이었음이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