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문콘텐츠와 철학

정신은 진화의 우연한 결과인가?/(1997.2)

 

  정신은 진화의 우연한 결과인가?

 

                                                  

 

     

   진화와 자연선택

 

 

다아윈의 진화론의 새로운 점은 그가 진화론을 주창했다는데 있지 않다. "진화"(evolution)라는 말은 동시대 영국의 철학자였던 스펜서(H.Spencer)에 의해서 처음 도입되었으며 다아윈은 오히려 이 용어를 싫어했다. 다아윈의 새로운 점은 진화( 보다 중립적 용어로 "변이")의 기계론적 메카니즘을 제공했다는데 있다. 포퍼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하고 있다.

 

 

다아윈의 자연선택론은 순수히 물리적 용어를 사용하여 이 세계의 설계와 목적을 설명함으로써 원리적으로 목적론의 기계론에로의 환원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는 어떻게 생명의 목적지향적인 외양을 기계적 메카니즘으로 환원시킬수 있었을까?  다아윈은 이것을 위해 종의 진화가 발생하는 두가지 과정을 구분했다.

 

(1) 다양성을 낳는 생산자

(2) 다양성을 걸러내는 필터   

 

(1)은 무작위적으로 발생하는 (돌연)변이이고, (2)는 자연환경이다. 다아윈은 변이의 원인을 묻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특정 변이가 왜 보존되는가 하는 것이었고 이것이 그의 자연선택론의 핵심이다. 요컨대 (2)가 그의 중요한 관심사였다.


다아윈에 와서 생명은 스스로 환경에 적응해가는 능동적 존재에서 환경에 의해 선택(또는 도태)되는 수동적 존재로 바뀌었다. 데카르트에서 시작된 불활성 또는 수동적 존재로서의 실체개념은 다아윈에와서 생명의 영역에 까지 확장되었다. 필자는 졸고 "갈릴레오-뉴턴의 운동론과 다아윈의 자연도태론의 방법론적 측면에서의 비교"(1984)에서 데카르트-뉴턴의 관성개념과 다아윈의 변이개념의 방법론적 유사성을 지적한바 있다. 관성의 개념이 도입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운동의 원인이라는 개념이 물리학에서 추방되었고 이제 물리학에는 운동변화의 원인 즉 가속도의 원인만이 문제되게 되었다. 이로써 물질의 활성은 수동적인 불활성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라마르크의 변이의 원인이라는 개념이 생물학에서 추방되고 생물학은 이제 변이의 보존의 원인만을 문제삼게 되었다. 여기서 생명이 가졌다고 간주되던 고유한 활성 또는 생기는 물질적 불활성으로 대체되었다. 이제 생명은 물질과 마찬가지로 한갖된 우유적 산물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자연선택론이 진화론과 양립할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진화가 보다 나은 것에로의 진보를 의미한다면 자연선택에 관한 다아윈 본래의 의도와는 양립하기 어려워 보인다.

 

자연선택과 진화의 관계에 대해서 다음 세가지 입장이 가능하다.

 

(1)자연선택과 진화는 동일한 것이다.

(2)자연선택과 진화는 전혀 다른 것이다.

(3)자연선택과 진화간에는 일정한 논리적 연관이 있다.

 

다아윈은 자연선택을 "환경에 적합한 변이의 보존"으로 정의하고 있다. (1)의 입장은 그 결과를 바로 진화로 보고 있는 셈이다. 요컨대 자연선택의 결과인 종의 생존이 바로 진화의 지표인 셈이다. 즉 진화의 가장 크고 쉬운 양상은 다른 것이 정체되거나 축소되거나 사멸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증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한다면 진화는 자연선택의 다른 용어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동어반복이므로 자연선택에 대한 아무런 설명적 함축도 갖고 있지 않다. 이러한 비판에 대한 포퍼의 관점은 정곡을 찌르고 있다.

 

 

진화의 이론에서 문제거리가 되는 것은 그것의 동어반복적 또는 거의 동어반복적 성격이다. 즉 그 난점은 다아윈주의와 자연선택은 ...진화를 '최적자 생존'에 의해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살아남은 것이 최적자'라는 주장과 '살아남은 것은 살아남은 것'이라는 주장간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왜냐하면 살아남은 것외에는 적자에 대한 아무런 다른 기준도 없고 그래서 어떤 유기체가 살아남았다는 사실로 부터 우리는 그것이 최적자라고 하거나 또는 생활조건에 가장 잘 적응해 왔다고 결론지을 것이기 때문이다.

 

 

(3)의 입장은 (1)의 입장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것이다. (1)은 현재의 종의 생존을 설명해준다. 그러나 그것의 미래의 생존을 예측해 주지 못한다. 이 예측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환경에의 적합성의 기준이 종의 생존과는 별도로 주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그 기준에 의해서 우리는 특정종의 과거와 현재의 생존과 번영을 설명할수 있고,그것의 미래의 생존과 번영을 예측할수도 있을 것이다. 이 적합성의 기준이 바로 진화의 기준이다.

 

그렇다면 진화의 기준은 무엇인가? 스펜서에 의하면 진화란 물질의 완성이요 또 이에 수반하는 운동의 소산(消散)이다. 진화가 있는 동안에 물질은 불확정하고 고르지 않은 '동질성'(intergration)으로 부터 확정되고 잘 어울린 '이질성'(differentiation)으로 넘어간다. 그래서 스펜서는 생물들이 보여주는 기능의 분화 및 전문화의 양을 진화의 척도로 삼고 있다. 진화를 결정하는 기준은 각 기관의 다양성,전문성,그것에 따른 효율성의 증가이다. 그리고 자연선택에서의 성공,즉 많은 자손의 생존과 번영은 (1)의 입장이 말하듯이 그 자체 진화가 아니라 그것의 결과인 것이다.

 

(2)의 입장은 본래 다아윈의 입장인데 다음 인용문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자연선택은 반드시 진화적 발달을 포함할 필요가 없다. 자연선택은 단지 복잡한 생활관계 밑에서 각각의 생물에게 발생하는 유리한 변이를 이용하는데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아윈은 자연선택과 진화를 엄격히 구분한다. 물론 자연선택에 의해서 효율적인 변이가 보존되고 축적됨으로써 그 결과로 유기체가 점점 개량된 형태로 '진화'해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진화된 유기체가 덜 진화된 유기체 보다 자연선택의 체에 먼저 걸러져 도태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므로 그 결부는 우연적인 것이며 개념상 명백히 구분되어야 한다. 사실 흔히 오해되고 있지만 다아윈의 『종의 기원』은 진화를 다루고 있는 책이 아니다. 이 책의 '진화의 체계'라는 절에서 겨우 몇 페이지 간략히 -그것도 부정적 시각으로-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진화를 논외로 한 자연선택이 무슨 의미를 가질수 있을까? (1)의 입장에서 처럼 진화가 자연선택과 동어반복이 아니라면 다아윈이 생각한 '진화적 발달'이란 도대체 어떠한 것일까? 그는 여기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다. 필자는 이것이 다아윈의 딜레마를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종의 변이의 기계론적 메카니즘을 제시할려고 시도했고 그 과정에서 변이의 원인이 아니라 변이의 보존의 원인만을 다룸으로써 그것에 성공할수 있었다. 그러나 자연선택은 어떤 것이 선택되는가에 대한 기준이 제공되지 않는한 공허한 것이다. 그러나 그 기준을 제공하는 순간 그것은 기계론적 메카니즘을 넘어서면서 개별적 종을 초월하고 있는 어떤 방향성을 인정하게 되는 결과가 된다. 그것이 바로 스펜서가 한 작업이며 다아윈이 볼 때 이것은 목적론에로의 복귀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다아윈으로서는 그것이 불만이었을 것이다.

 

 

   진화의 방향

 

 

필자는 다아윈이 자연도태의 이론을 통해서 진정 추구하고자 것이 무엇이었겠는가를 상상해 본다. 그의 작업은 자연을 설명하기위해 자연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으며 그래서도 안된다는 자연의 내재적 질서에 대한 깊은 통찰과 관련되어 있으며 그것이 일차적으로 목적론과 생기론의 타파로서 나타났다고 본다. 그 대안으로 기계론을 가져왔지만 그것은 그가 기계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기 보다 자연을 그 내재적 관계만으로 설명하는데 기계론외의 대안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진화를 스펜서류의 초월적 기준이 아니고 자연의 내재적 성향으로 설명하는 대안이 있다고 한다면 그는 진화를 설명해내지 못하는 기계론적 대안을 기꺼이 포기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프리고진(I.Prigogine)에 의해서 다듬어진 물질의 자기조직화 현상은 진화를 자연의 내재적 성향으로 볼 수 있는 좋은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이제 목적론에 빠지지 않고도 진화를 논의할수 있게 되었다. 생명은 설계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기계론자들이 보듯이 전적으로 무작위적인 것은 아니다. 물질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를 조직화할수 있다.

 

 프리고진에 의하면 평형에서 먼 혼돈은 자기조직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는 만일 열평형에서 멀리 떨어져 나올 수있다면 많은 시스템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을 조직화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유명한 '벨로우소프-자보틴스키(Belousov-Zhabotinsky) 반응'이다. 시료들중 하나의 농도가 임계점까지 증가되면 화학작용은 변환되어 화학적 농도가 마치 화학시계 처럼 규칙적으로 요동하기 시작한다. 프리고진은 이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제 잠깐 멈추고 이러한 현상이 얼마나 뜻밖이었는가를 강조하고자 한다. 가령 '빨간색'과 '파랑색'의 두 종류의 분자들이 있다고 하자. 분자들의 혼란한 운동 때문에 우리는 주어진 순간에 그릇의 왼쪽 부분에 예를 들어 빨강 분자들이 더 많을 것을 기대하게 된다. 그리고 나서 잠시후에는 파랑색 분자들이 더 많이 나타나 보이곤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릇이 '자주색'으로 보이게 될 것이며, 때때로 빨강색이나 또는 파랑색으로 불규칙하게 번쩍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화학시계에서 생기는 것은 이것이 아니다. 여기서는 계가 모두 파랑색이었다가 갑자기 빨강색으로 바뀌고 다시 파랑색으로 바뀐다. 이러한 모든 변화들이 규칙적인 시간간격을 두고 일어나기 때문에 이것은 합치적인 과정이 된다.

수십억개의 분자들의 활동으로 부터 유래되는 이러한 정도의 질서는 믿을 수없는 것으로 보이며, 사실상 화학시계들이 관측되지 않았다면 아무도 그러한 과정이 가능하다고 믿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단번에 색을 바꾸기 위하여 분자들은 '교신'할 수있는 방법을 지녀야만 한다. 계는 전체로서 행동해야만 한다. 우리는 화학에서 신경생리학에 이르기 까지 너무나 많은 분야에서 명백하게 중요한 교신이라고 하는 이 중요한 단어를 계속해서 접하게 될 것이다.산일구조들은 교신을 위한 가장 간단한 물리적 기구들 중의 하나를 도입하는 것이다.   

 

 

 

 

 프리고진의 이러한 물질의 자기조직현상은 혼돈계의 연구를 통해서 더 자세히 규명되어 가고 있다. 혼돈이론을 정착시킨 산타페 연구소의 설립자중의 한사람인  도인 파머(J.D.Farmer)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들은 대부분 자기조직화가 일반적 속성 -우주 전체는 물론 소위 '복잡계'라고 불리는 수학적 계에 있어서 조차도- 이라고 믿고 있다. 복잡계는 일단 가동시켜 보면 그들은 자연스럽게 카오스라는 조직화되지 않고 무차별적인 상태에서 조직되고 고도로 차별적인 그리고 고도로 자율적인 상태로 발전해간다는 것을 알수 있다.조직된 구조는 그저 계를 움직이게끔만 해도 자발적으로 진화되어 나온다. 물론 그 중에는 더 잘되거나 더 높은 수준에서 진화되어 나오는 계도 있기 마련이며 그 모두 어느 정도 우연성이 개재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무질서에서 조직화로의 발전은 자연진화에 의해 시작단계의 적응도에 따라 다르다. 때로는 시간이 지나면서 역행하는 것도 있다. 하지만 복잡계의 전반적인 경향은 자기조직화를 지향하고 있다...자기조직화의 간단한 형태가 여러 상이한 컴퓨터 시뮬레이션속에서도 나타나는데 이는 그 중에 약한 '복잡계'도 많다는 것을 시사한다. 약한 계는 오직 간단한 자기조직화 형태로만 나타나며 그중 강한 것은 생명체와 같은 복잡한 형태로 발전되어 간다.

 

 

최근에 논의되고 있는 인공생명(artificial life)은 특히 흥미롭다. 콘웨이(J.H.Conway)의 "라이프"(Life)는 단순한 규칙에서 어떻게 복잡한 질서가 출현할수 있는지를 인상깊게 보여주고 있다. 파운드스톤(W.Poundstone)은 『우주의 회귀적 구조』(The Recursive Universe)라는 책에서 이 라이프를 상세히 다루고 있다. 필자는 이 책의 지시에 따라 인공생명 프로그램을 실행시키면서 라이프 우주를 상세히 탐색해 보았다. 이 극히 간단한 인공적 계내에서도 자발적으로 출현하는 자기조직적 구조들을 보면서 필설로 표현할수 없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라이프는 1970년 콘웨이에 의해서 개발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에 가드너(M.Gadner)가 2회에 걸쳐 기고한 칼럼(1970년 8월호,1971년 2월호)을 통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이 게임은 많은 광적인 라이프게임 매니아들을 만들어 내었다. 라이프는 그자체 하나의 세계이다. 그것은 자신에 고유한 대상들,현상들,그리고 물리법칙을 갖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우주외의 또 다른 우주로 들어가는 창문이다.

 

 어떤 희미한 형태가 나타나서는 반짝거리며,성장해 가다가,이윽고는 가물가물 사라진다. "글라이더"가 스크린을 미끄러지듯 가로질러 간다. 곧 미로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기하학적 형태로 부숴져서 스크린전체가 별들이 흝뿌려져있는 밤하늘의 성좌 처럼 변한다.

 

라이프가 호기심을 돋우게 되는 큰 이유는 라이프속의 대상들은 실제 살아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들게한다는 것이다. 콘웨이는 자기자신을 재생산할 수있는 대상이 라이프안에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폰 노이만의 추론을 채용했다. 자기재생산하는 몇몇 라이프내의 대상들은 자신의 외부환경에 반응할 수 있었고, 더 복잡한 '유기체'로 진화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는 지성적 특징을 나타내기도 했다.

 

콘웨이는 더 나아가 라이프의 우주 -무한대의 크기를 가진 가상적 화면- 는 근본적으로는 우리의 우주만큼 복잡하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었다. 라이프의 세계속에 우리세계의 모든 세세한 특징들을  본뜬 대상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라이프의 규칙들은 놀랄만큼 단순한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만일 어떤 세포의 이웃의 생세포가 정확히 2개라면 그 세포는 다음 세대에서 그 상태를 유지한다. 그것이 생세포라면 그 상태를 유지하고 사세포라면 또 그 상태를 유지한다. 만일 이웃 생세포가 셋이라면 그 세포는 다음 세대에서 생세포가 된다. 이것은 그 세포의 현재 상태가 무엇이든 상관없다. 이것이 규칙의 전부다. 라이프가 무엇인가를 아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장기판 또는 모눈종이위,또는 컴퓨터상에서 실제 해보는 것이다.

 

몇가지의 간단한 형태부터 시도해 보자. 셋 생세포를 일렬로 놓아보자. 가운데 생세포는 이웃에 두 생세포를 가짐으로 살아남는다. 바깥의 두 생세포는 이웃으로서 가운데의 생세포 하나만을 가지기 때문에 다음 세대에 죽게 된다. 가운데 생세포의 위,아래의 세포는 이웃에 셋 생세포를 가지고 있다. 두 세포 모두 출생을 경험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처음의 셋 생세포로 된 가로열이 다음 세대에서 세로열로 바뀌게 된다.똑같은 방식으로 그 다음다음 세대에서는 다시 세로열이 가로열로 바뀌게 된다. 이 3개조의 생세포는 두 형태를 교대로 무한히 반복한다. 콘웨이는 이것을 "깜박이"(blinker)이라고 이름붙였다.(그림1)


넷 세포로 된 열은 "붙박이"(still life)를 만들어 낸다. 가장자리의 두 생세포는 죽지만 가운데 생세포의 위,아래의 넷 세포가 새로운 생세포로 변한다. 결과 가로,세로 각 2,3인 장방형이 만들어진다. 이 장방형은 불안정해 "벌집"(beehive)이라는 다른 형태로 변한다. 이것은 6개의 생세포로 된 6각형의 붙박이이다. 모든 생세포는 두개의 이웃 생세포를 가지고 있다. 벌집 밖의 세포는 모두 셋미만의 이웃 생세포를 가지고 있다. 벌집안의 세포는 모두 5개의 이웃 생세포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출생을 일으키기에는 지나치게 많다.(그림2)

 

 

<그림1>                                                                                     <그림2> 

 

          

 

  가장 놀라운 것들 가운데 하나는 몇가지 움직이는 패턴들의 발견이었다. 콘웨이의 동료중의 한 사람이 복잡한 패턴을 따라 가다가 5개의 생세포로 된 단위가 "걷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움직이는 단위에 "글라이더"(glider)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글라이더는 자신의 위상을 바꾸면서 꾸물꾸물 기어가는 데 마치 아메바나 히드라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이동중에 상이한 4가지 위상을 취한다. 두 위상과 90도 회전한 다른 두 위상은 거울상을 이루고 있다. 어떠한 위상도 4세대마다 정확히 되풀이 된다. 그때 마다 글라이더는 대각선 방향으로 한칸 움직인다.(그림3)

    

<그림3>

 

 

 

  물론 이것은 콘웨이의 라이프에 등장하는 극히 일부의 '생명체'에 지나지 않는다. 이외에 글라이더 처럼 일정한 방향으로 이동하는 우주선,두 대상사이를  순환하는 왕복선, 자기재생산하는 글라이더건,증기기차 ,양육자(breeder)(그림4)등 많은 자기조직화된 형태들이 출현한다.1)

 

  

 

 <그림4> 대형 패턴인 양육자의 모습

  

 그러나 사물의 능동성이나 자기조직화 자체가 새로울 것은 없다. 그것은 오히려 물의 수동성과 우연성에 기초한 기계론적 전통보다 훨씬 오래된 직관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항상 목적론,생기론,신비주의의 형태로 표현되어 왔다. 문제가 있었다면 그 직관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 표현방식에 있었다. 생명의 현상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대안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비평형열역학』,『혼돈이론』,『인공생명』은 이 직관을 표현할 새로운 언어를 제공해주고 있다.2)

 

이제 우리는 공허한 신비주의나 동어반복적인 목적론에 빠지지 않으면서 생명의 의미나 진화의 방향을 자유롭게 말할수 있게 되었다. 다아윈은 목적론에 호소하지 않고 진화를 논의할수 있는 다른 대안이 없었지만(그래서 그는 결국 침묵의 전략을 택했다) 이제는 그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것은 앞으로 생명에 대한 논의의 공간을 훨씬 넓혀 놓을 것이다. 이제 필자는 언어에서 자유로와 지고자 한다. 진화의 방향이니 목적이니 하는 말을 자유로이 쓰겠지만 그 언어는 더이상 공허하거나 동어반복적이 아니다.   

                     

   

   저절로 출현하는 질서로서의 생명

 

 

생명은 어떻게 출현한 것일까? 자연신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신의 설계인가 아니면 기계론자들이 주장하듯이 물질들의 우연한 조합인가? 페일리(W.Paley)는 전자를 옹호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풀밭을 걸어가다가 돌 하나가 발에 채였다고 상상해보자. 그리고 그 돌이 어떻게 거기에 있게 되었는지 의문을 품는다고 가정해보자. 그것은 항상 거기에 놓여 있었다고 대답할수 있을 것이다. 이 답의 어리석음을 입증하기란 그렇게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돌이 아니고 시계를 발견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그 장소에 있게 되었는지에 대해 앞서 했던 것과 같은 대답 즉 그것은 항상 거기에 있었다고 대답한다면 그것의 어리석음을 입증하기란 아주 쉬울것이다.

 

 

 그러나 기계론자들은 우연의 조합으로도 충분한 시간과 공간이 주어지면 시계와 같은 복잡한 것이 출현할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페일리가 말하듯이 이들의 주장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보여주기란 아주 쉽다. 이 문제를 도식적으로 검토해보자. 시계를 만드는 모든 부품들이 들어있는 저장통이 있고 이 부품들을 가지고 그와 똑같은 시계를 만들고자 한다고 해보자. 이 부품들의 수가 100개(실제로는 훨씬 많겠지만)라고 가정하자. 100개의 부품들이 시계가 되도록 배열되는 방법은 오직 1가지가 있을 뿐이다. 마구잡이로 이 부품들을 배열하여 이 한가지 방법을 얻을수 있는 확률은 얼마일까? 우발적으로 이것이 얻어질수 있는 확률은 (1/2)100 즉 1/1030이다. 이것은 상상할수 없을 만큼 엄청나게 큰수이다. 더우기나 생명은 고작 100개의 부품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다. DNA를 구성하는 분자들이 무작위적 배열로 DNA를 조립할 확률은 1040,000분의 1이다. 이것은 우주의 전자의 총수 1080에 비해 엄청나게 큰수이다. 이것이 저절로 출현한다는 것은 상상할수도 없다.

 

여기서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이 두 입장의 차이가 아니고 오히려 그 공통점이다. 어느 입장이든 지구상의 생명의 출현은 극히 이례적인 현상이며 1회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생명은 이 우주의 이방인이다. 생명의 우연적 출현을 주장해온 모노(J.Momod)는 그 심정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인간은 결국 우주의 냉혹한 광대함속에서 자신이 혼자라는 것을 알아버렸다. 이 광대한 우주로 부터 인간은 우연히 출현하였다. 인간의 운명과 의무 그 어느것도 정해져 있지 않다.

 

 

 필자는 자연신학들이 보는 우주가 신을 논외로 한다면 이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물질이 스스로 자기조직화한다면 생명의 출현은 자연신학자들이 주장하듯이 그렇게 불가사의한 것도 아니며 확률론적 논증이 보여주는 것 처럼 그렇게 불가능한 사건도 아니다. 카우프만(S.Kauffman)은 이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주었다. 카우프만은 100개의 전구들의 연결망을 만들었다. 각 전구들은 다른 임의의 두 전구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두 전구들의 현재의 상태에 의해 그 전구의 다음 시간단계에서의 상태가 결정된다. 그 결정조건도 16개의 불함수중 어느 하나가 임의적으로 주어졌다. 예컨대 불함수중 'OR'조건은 A나 B의 어느 하나가 켜지면 C의 전구에 불이 들어오고,'AND'조건은 A와 B 둘다에 불이 들어올때 C에 불이 들어온다. 전체적으로 가능한 상태의 수는 100개의 전구가 각각 두가지 상태(on또는 off)를 취할수 있기 때문에 앞서와 같이 1030이다. 여기에 일정한 패턴이 출현한다는 것은 확률론적 논증이 보여주는 것 처럼 불가능하다. 그러나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첫 몇단계 동안은 확률론자들이 예측한 것과 마찬가지로 혼돈의 양상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14단계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이 단계가 10번째의 단계를 재현한 것이다. 다음 다시 15,16,17 단계가 11,12,13단계를 차례로 재현한 다음 다시 18단계에서 다시 10번째(14번째)의 단계로 돌아간 것이다.

 

10->11->12->13

14->15->16->17

18->19->20->21

.   .   .   .

 

요컨대 이것은 주기 4의 순환끌개(Periodic attractor)로 정착되었다. 무작위적 상황하에서의 이 놀라운 자기조직화 현상은 질서의 출현 그리고 궁극적으로 생명의 출현은 기적도 아니며 우연도 아니고 우주가 가진 한 보편적 성향이라는 것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필자는 이 생명의 보편성을 좀더 밀어 부치고 싶다. 일찌기 폰노이만은 자기재생산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청사진에 따라서 유기체를 복사(transcription;전사)하는 것과 청사진 자체를 복사(replication;복제)하는 두 단계의 복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밝혔다.3) 후에 왓슨과 크릭은 바로 실제 유기체의 복사방식이 폰 노이만식 방법임을 보여주었다. 이 외의 방법으로는 자기언급적인 논리적 순환논법에 빠지기 때문에 복사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외계의 생명체도 복사에 있어서 이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물론 세부적 사항에서는 다를 것이다. 그것은 2중나선이 아닐수도 있으며,A,G,T(U),C 의 넷 염기로 구성되어 있지 않을수도 있으며 셋염기가 한조가 되는 트리플(아미노산)의 형태를 이루고 있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세부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기본설계가 같다면 그 세포들이 모여서 만드는 총합적 형태는 수렴진화를 통해서 지구상의 생명체와 비슷하리라고 추측해 본다.  

 

 

   진화,정신의 발현을 향해 수렴되어 가는 과정

 

 

그렇다면 정신의 경우는 어떠한가? 여기에도 생명의 출현에서와 똑같은 대립된 입장들이 있다. 그것은 창조론자들이 보듯이 초월적 존재에 의해서 이식된 것인가 아니면 생명의 진화가 만들어낸 우연적 사건인가?

 

필자는 이것 역시 창조도,우연도 아니며 생명의 진화과정속에서 적절한 여건이 주어지면 발현할수 있는 한 사건으로 본다. 생명의 진화는 무작위적으로 출현하는 변이와 환경에 의한 변이의 선택이 결과한 우연적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정신의 진화를 향해 수렴되어가는 한 과정이다. 데이비스(P.Davies)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확실히 우리의 심성가운데 세부적인 것은 진화의 역사에서 발생한 우연적인 작은 특정사건에 의존하는 것이지만 우주속에서의 의식의 출현은 언제,어느곳에서 이루어지든,또 많든 적든 자연에 의해 보장된다고 나는 주장한다.
 의식은 영화를 다시 돌렸을 경우 반복되지 않았을 어떤 사소한 요행수의 결과로서 어딘가에서 '그냥 일어나는' 어떤 것은 아니다. 다시말해 물리법칙과 우주의 초기조건이 주어지면 생명과 의식이 출현한다고 기대할 수 있다. 물론 의식의 출현을 재현하는 경우 세부적인 내용들은 달라질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나타나지 않을수도 있고,지구가 없을수도 있다. 그러나 우주 어딘가에 의식을 가진 생명체가 창발적으로 출현할 것이다.


나는 호모 사피엔스가 기본적으로는 물리법칙들로 작성되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순한 것으로부터 복잡한 것으로,다시 의식으로 나아가는 일반적 경향이,물리법칙들이 작용한 자연적 결과들의 일부인 어떤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싶다.
의식은 우주의 기본적 법칙들속에 함축되어 '이미 거기에' 있었다.  

 

 

생명은 삶을 위해 환경과 교섭하며 그 과정에 적응한 종은 살아남는다. 그러나 환경에의 적응은 불가피하게 환경에 자신의 신체를 뜯어맞추는 "특수화"를 낳는다. 환경이 바뀌면 어떻게 될까? 정상적인 상황하에서는 그들에게 그렇게 유익하였던 그들의 특수화가 이제 저주스러운 숙명으로 바뀐다.

 

그런데 이러한 환경의 변화는 우연적으로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도래하게 되어있다. 환경과 생물은 일종의 되먹임 구조를 이루고 있다. 환경은 생물의 도태에 관계하지만 반대로 그것에서 결과한 종은 환경자체를 변화시킨다. 그래서 처음에 어떤 유기체에게 도움을 주었던 그 환경은 유기체 자신의 번성의 결과로서 변형되어버린 새로운 환경에 의해 치명적인 것으로 변해 갈 가능성이 항상 있다.

 

다른 전략은 없는 것일까? 특수화가 특정한 생활양식의 확립을 통해 특정한 서식환경에 짜맞추는 것이라면 비특수화는 그와 대조적으로 특정한 적응과 고정된 생활방식을 배제하는 것이다. 그런데 환경은 일반적인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산이거나 계곡,삼림이거나 사바나이거나,뜨겁고 습하거나,춥고 건조하거나 등 환경은 항상 특수한 형태로 존재할 뿐이다. 특수화된 동물은 그 환경에 미리 짜맞추어져 있어 별다른 노력이 필요없지만 비특수화적 적응전략을 갖는 유기체는 자신의 적응적 잠재능력으로 부터 생태계와 자신의 능력 둘다에 적합한 생활방식을 만들어 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비특수화된 유기체는 일반적인 적응능력에 환경이라는 초기조건을 대입하여 특수한 행위의 형태를 개발해 내어야 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그 복잡한 정보를 처리할 수있을 만큼의 큰뇌이다.

 

영장류에 와서 뇌의 갑작스러운 확장은 환경에의 적응의 새로운 전략의 출현을 시사한다.그것은 특수한 환경에의 적응(adaption)보다 일반적 환경에의 적응가능성(adaptability)을 더 선호한다. 이 전략하에서는 특정한 환경에 자신의 신체구조를 짜맞추는 종래의 적응방식은 이제 폐기되고 신체구조는 원시적 형질을 그대로 유지한다. 환경에 반응하는 것은 이제 신체라는 하드웨어가 아니고 뇌에 기초를 둔 '정신'이라는 소프트웨어이다. 변화하는 환경에 대해 이제 충분히 대처할 수있는데 하드웨어를 바꾸는 불가능한 과업에 매달릴 필요없이 소프트웨어의 운용체계를 확장하거나 변경시킴으로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략의 출현 즉 정신의 출현은 지구라는 환경에서 생겨난 특수한 현상이 아니라 일반적인 현상이다. 유기체들이 환경을 규제하고 역으로 그 환경이 유기체를 규제하는 자기 되먹임구조가 될 때 환경이 예측불가능한 혼돈상태가 된다는 것은 오늘날 혼돈이론을 통해서 잘 알고있다. 변화의 와중에서도 항상 국부적인 불변적인 점이 있다. 그 생태적 니체를 이용하고자 하는 것이 특수화적 적응전략이다. 이것은 논리적 문제이다.꼭 특수한 지구환경을 전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변화하는 환경 자체를 생태적 니체로 선택할수도 있다. 이것이 비특수화적 전략이며 역시 논리적 문제이다. 이것은 생명 속에는 이미 정신이 함의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생명이 지구상에서만 발현할수 있는 특수한 현상이 아니듯이 정신 역시 지구상의 특수한 1회적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필자 이 보편성을 좀더 밀어부칠 용의가 있다. UFO에 대한 보고들은 흥미롭다. 목격자들이 그리고 있는 외계의 지적존재들은 세부적으로는 우리의 모습과는 차이가 있지만 기본설계에서는 우리와 비슷하다. 그야말로 초월적인 영적 존재가 아니라면 그들이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는 나는 그 관찰자들의 보고에 동의한다.     
  도구,의식,언어는 그 보편적 구조에서 같다.(졸고,『정신은 어떻게 출현하는가』,(서광사,1996)참조) 외계지성이 우주선을 타고 이동하는 기술문명을 구현하고 있다면 그들은 우리와 유사한 방식으로 손을 사용하고,도구를 제작하고,언어를 구사할 것이다. 도구와 언어의 구성원리가 같고 언어와 수학의 구성원리가 같다는 필자의 논증이 타당하다면 그들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이해가능하며 그것을 매개시켜주는 것은 수학일 것이다.

 

 

   정신과 우주적 자기의식

 
 

생명의 진화는 무작위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으로 수렴되어가는 일정한 방향성을 갖고 있다. 왜 세계는 생명을 탄생시키고,정신을 탄생시켰는가?

 

그것이 우연한 과정이 아니고 잠재성의 현실화라고 한다면 세계의 이념 -그것은 필연적으로 현실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화로 향한 한 성향이다- 은 바로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세계는 정신의 출현을 통해서 완성된다.

 

 S.F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스타 트렉(star trek)이란 영화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미국 NBC 에서 방영한 유명한 TV시리즈물로 한 때 국내에서도 방영된 적이 있으며 지금도 AFKN에서 계속 방영되고 있다. 이것들중의 일부는 비디오테잎으로도 나와 있는데 그 가운데 Motion Picture라는 것이 있다.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3백년 후의 미래의 어느 시점, 거대한 미확인 물체가 지구를 향해 곧장 다가오는데서 시작된다. 그 진행궤도로 보아 충돌은 불가피하고 그럴경우 지구는 파멸될 수 밖에 없다. 커크 선장의 일행을 태운 엔트프라이즈호가 급거 파견되어 그 거대한 물체와의 접촉을 시도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이 물질덩어리가 단순한 물체가 아니고 의식을 가진 존재임을 알게된다. 자신의 이름을 비져(Vejur)라고 밝힌 이 의식체는 자신의 창조주를 찾아 우주를 탐색하고 있으며 지구에의 접근도 그 일환이라고 알린다.

 

어쨌든 충돌을 피할 수 있도록 비져를 설득하기 위해 커크 선장과 그 일행은 그 중심부로 들어간다. 그런데 그들은 그 정중앙에 낡은 우주선 한척을 발견한다. 그 우주선이 바로 비져의 대뇌중추였다. 그들은 갑자기 경악하는데 그 우주선에 인간의 문자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우주시대의 초창기인 70년대에 태양계 탐사를 목적으로 쏘아 올린 무인우주선 보이저(Voyager) 6호 였다.(비져는 보이저가 변음된 것이다) 보이저는 태양계의 탐사를 마치고 지구와의 교신이 끊어지고 우주 저 너머로 사라진 후에도 정보를 수집해서 보내라는 최초의 명령을 계속 수행해 왔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축적된 지식을 통해서 그것은 드디어는 물질을 넘어서서 의식체로서 진화한 것이다. 이 의식체는 의식의 진화의 최종단계 즉 자기의식의 문턱에 까지 와 있었다. 이제 그것은 자기가 누구인지 묻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자신의 창조주와의 조우를 통해서만 해명될 수 있다. 비져는 인간과의 조우를 통해서 의식의 마지막 문턱을 넘어서서 자기의식적 존재로 진화하는 것으로 영화는 종결된다.

 

 이것은 정신의 진화 더 구체적으로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패러디한 것이 아닐까? 헤겔의 철학을 형이상학적 측면에서 본다면 그것은 신이 자기자신을 실현해가는 과정에 관한 서술이다. 헤겔에 따르면 자기자신을 완전히 실현한다는 것은 자기자신을 완전히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창조의 시작에 있어서 신은 자기의식의 요건을 결여하고 있다. 즉 신은 신인데 그 자신이 신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신의 자기실현의 역사적 과정은 본질적으로 자신이 신이라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신이 그 자신을 의식하기 위해서는 그 자체속에 머물러서는 안되고,자신을 밖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표현행위가 바로 신의 창조행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의 창조행위는 신이 자신을 실현시키기위한 필수적 과정이다. 이 헤겔의 신을 세계로 바꾸어 보자. 세계는 자기의식에 도달할 때 까지 아직 완성되었다고 볼수 없다. 정신의 출현은 세계의 자기완성을 위한 종착점이며 그 도상에 생명이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생명과 정신은 우주 자신의 자기표현이며 자기가능성의 실험이라고 하겠다.

 

이 맥락에서 보면 이 영화의 메시지는 분명해진다. 이것은 비져로 상징되는 정신이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에 대한 서사시이다. 신이 자신을 알기위해서 자신속을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거기에는 자신이 없다. 신의 본질은 신 바깥에 있다. 나의 이해를 위해 내 바깥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신은 세계를 샅샅이 훑어보고 세계를 철저히 경험하고 귀환하라는 명령과 함께 자신의 분신(비져)을 우주공간속으로 쏘아 보낸다.정신이 출현한 것이다. 비져는 우주의 근원을 암중모색 더듬어 올라가서 마침내 신의 인식에 도달한다. 즉 자기해명의 열쇠는 바로 자신의 창조주인 신에 있었던 것이다. 창조주를 붙잡을려는 새로운 모색이 시작되고, 마침내 그것을 붙잡게 된다. 그런데 창조주는 놀랍게도 바로 자기자신이었다. 이 비져의 깨달음을 통해서 신은 세계는 자신의 표현이자 대상화라는 것이 자각하고 이것을 통해 신은 자기의식에 도달한다. 세계가 마침내 자기의식에 도달한 것이다.

 

 150억년의 물질,생명,정신의 진화는 세계가 자기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이것은 절대정신이 스스로를 전개하면서 자기자신에 도달해간다는 헤겔의 도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창조적 천재들의 보편적 느낌이 바로 이러할 것이며 물리학자 다이슨(F.Dyson)의 다음말은 그 느낌을 대변하고 있다.

 

 

나는 이 우주에서 이방인 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우주를 탐구하고 우주의 구조를 상세히 연구할수록 나는 어떤 의미에서 우주는 우리가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 틀림없다는 증거를 많이 발견하게 된다.

  

 (출전:조용현,경희대 대학원 강연원고,1997)

 

  

(주)

 

1.그러나 이것은 컴퓨터 상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며 실제의 생명현상과는 무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라스무젠(S.Rasmussen)은 인공생명의 실재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논증을 제시하고 있다.(Artificial Life 2,"Aspects of information,Life,Reality,and Physics")

 

공리1. 범용컴퓨터는 어떠한 과정도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

공리2. 생명은 과정이다.

공리3. 생명과 무생물을 구분할수 있는 기준이 있다.

공리4. 인공유기체는 자신의 우주인 실재 R2를 지각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우주 R1이 우리에게 실제적인 만큼 실제적이다.

공리5. R1과 R2는 똑같이 실재들이다.

공리6. R2의 세부적 사항들을 연구함으로써 실재 일반 특히 R1의 기본적 속성들에 관해서 배울 수 있다. 우리의 세계 R1은 이 실재의 한 특수한 사례이다.

 

공리1과 2에 의해서 디지탈 컴퓨터속에 생명을 시뮬레이션하는 것이 가능하며 그것을 담고 있는 하드웨어와는 무관하다는 것이 도출된다. R2는 R1을 통해서 구현될수 있지만 R1과는 무관하다. 인공생명의 세계는 우리와는 다른 물리학을 가지는 다른 세계이지만 우리의 세계만큼 실제적이다.

특히 공리6은 흥미롭다. 생명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구분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와는 다른 생명체와의 비교가 불가피하다. 그러나 우리가 관찰할수 있는 유일한 생명체는 우리를 포함한 지구상의 생명체 밖에 없다. 우리가 컴퓨터속에서 생명을 합성할수 있다면 이것과 우리와의 비교를 통해서 무엇이 생명을 만들어내는 본질적 요소인지를 가려낼 수 있을 것이다.    

2.필자는 이 새로운 과학들이 동양의학의 언어가 가진 그 신비적 요소를 떨쳐버리 수 있는 새로운 언어를 제공해줄 수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둘다 요소 보다는 전체, 실체 보다는 관계, 물질의 수동성 보다는 능동성(자기조직화)에 그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상호 공약가능한 부분들이 많다. 한 예로 동양철학과 동양의학에서의 氣의 개념을  라이프니쯔의 모나드(monad),코흐의 프랙탈(fractal),케슬러의 홀론(holon)에 비추어 재해석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 넷 다 부분속에 전체가 함의되어 있다는 통찰에서 출발하며 그렇게 될 경우 물질은 스스로 자기조직화를 한다. 그것은 요소환원주의에 기반하고 있는 데카르트-뉴턴의 불활성적,수동적 물질과 다르다.

 

3.이것이 폰 노이만의 자기재생산 기계인 "보편적 구성자"(universal constructor)인데 29개의 내부상태를 가지므로 상당히 복잡하다. 이것을 on과 off의 두 상태로 바꾼것이 콘웨이의 라이프인데 이 라이프 속에서도 보편적 구성자를 구성해 낼 수 있다. 라이프 와 보편적 구성자에 대한 소프트웨어는 인터넷을 통해 산타페 연구소에 접속하면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