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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철학

자연을 읽는 새로운 독법 ; 다윈의『종의 기원』

 

1. 다윈의 도발


흔히 과학사가들은 다윈을 뉴턴과 비교한다. 뉴턴이 물리학의 동력학에서 했던 그 종합을 생물학의 진화론에서 했다는 점에서다. 그러나 필자가 볼 때 뉴턴 보다는 갈릴레오와 비교하는 것이 더 그럴듯해 보인다. 둘에 공통된 점은 지금까지 세상 사람들이 당연시 해왔던 전제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다르게 물었고 급기야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물음에 대해 답해가는 과정에서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세상이 출현했다.

 

묻는다는 것은 불온한 것이다. 그것은 그 시대가 당연시 해온 답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갈릴레오는 종교재판에 회부되었고, 지구가 태양주위를 돈다는 주장을 철회했고 그 후 침묵을 강요당했다. 그러나 갈릴레오의 도발은 다윈의 도발에 비하면 어쩌면 사소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갈릴레오의 이론은 성서의 문자근본주의자가 아닌 이상 기독교 교리 안에서도 충분히 용인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다. 그 뒤 뉴턴은 갈릴레오의 운동론을 일반화시킨 만유인력법칙을 완성했고 신의 영광을 드러낸 그 공로로 웨스트민스트 대성당의 묘지에 묻힐 수 있었다. 그러나 다윈의 도발은 절대 사소한 것이라 할 수 없다.

 

『종의 기원』(1859)은 3가지 측면에서 시대의 주류적 사고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첫째는 ‘본질주의’(essentialism)라 불리는 플라톤 이래 서구문명의 근간이 되어온 사고에 도전하고 있다. 모든 사물들은 그 사물을 사물이게끔하는 본성, 본질을 갖고 있으며 각 사물들은 그것의 불완전한 모사일 뿐이다. 이 본성을 플라톤은 '이데아'라고 불렀다. 이 이데아의 생물학 버전이 다윈과 동시대 사람이었던 오웬(R.Owen)의 '원형'(archetype)이다. 종(species)은 원형이고 종에 속하는 개개의 생명체들은 그 원형의 모사일 뿐이다. 물론 각 개체들은 다를 수 있으나 그것은 그 원형의 범위 안에서 이다. 다윈의 『종의 기원』은 그 제목이 함축하듯이 종 자체의 변화를 문제삼고 있고 이것은 좁게는 원형 가설에 대한 부정이며 넓게는 본질주의에 대한 거부이다.

 

원형가설에 대한 다윈의 대안이 '공통조상설'이다. 두 개체가 유사한 것은 동일한 원형의 모사물이어서가 아니고 그 둘의 조상이 같기 때문이다. 이것은 시대와의 두 번째 대결로 이끌고 가는데 공통조상설이 맞다면 종내의 개체들 뿐만 아니라 종 조차도 그 기원에 있어서 같은 조상에서 나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모든 종은 그 자리에 맞게 하느님에 의해서 따로따로 창조되었다는 기독교의 '특수창조설'과 심각하게 대립한다. 다윈은 진화에 관한 노트에서 이 구상에 근거해서 '생명의 나무'를 스케치하고 있는데 이것은 종래의 존재의 대연쇄에 기초한 '생명의 사다리'와 인상적인 대립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반면 현대의 생명의 나무와의 인상적인 일치는 다윈의 뛰어난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1 (좌)존재의 대연쇄  

 그림2 다윈의 생명의 나무 스켓치


 

 

 

 

그림3 현대의 생명의 나무

 

이것만으로도 다윈의 도발은 충분히 불온하다. 그리이스 문명과 기독교에 기초한 2천년 서구문명의 전통과는 분명한 대립각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윈은 여기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종의 변이의 원인을 밝히고자 했다. 이것이 바로 ‘자연선택’의 원리이며 이것은 창조성의 근원을 초월적 신이 아닌 자연 그 자체에 두었다는 점에서 한층 더 불온하다. 다윈 당시 어느 누구도 이 정도까지는 밀어붙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다윈은 진화론의 가장 급진적인 입장을 대표하고 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다윈은 갈릴레오처럼 가택 연금되지도 침묵을 강요받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열렬히 환호 받았으며 『종의 기원』은 출간되자말자 당일 매진되었다. 물론 학계, 종교계의 주류의 격렬한 비난이 이어졌다. 그러나 일반대중들은 그 사상을 환호했으며 그 시대의 진보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그는 죽어서도 자신이 무너뜨린 구시대의 권위의 상징인 웨스트민스트 대성당의 묘지에 묻혔다. 그 위대한 뉴턴 바로 옆자리에...



2. 자연선택


본래 상대의 논리를 비판하려면 자신의 논리에 약점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럴 경우 도리어 엎어치기를 당해 상대의 논리를 강화시켜주는 역효과를 내게 된다. 특히 공격하는 쪽이 비주류에 속하는 경우 상대가 아무리 허점이 많다 하더라도 자신의 허점 하나만으로도 쉽게 무너져 버리는 것이 논쟁이다. 논쟁은 결코 공평하게 진행되는 법이 없다.

 

다윈의 『종의 기원』의 경우는 어떤가? 시대의 근본에 도전하는 책 치고는 그 논리에 허점이 많다.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에 기본 한 그의 진화론은 첫째는 우선 '불가능'하며, 그것이 설사 가능하다 하더라도 둘째로 그것은 '무의미'하다. 이것은 다윈의 불독이라 불린 헉슬리도 알고, 자연선택의 공통주창자였던 윌리스도 알고 있었고 물론 다윈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헉슬리와 윌리스는 다윈의 진화론을 받아들였지만 그 방법적 기초가 되고 있는 자연선택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실 자연선택이 빠진 진화론은 더 이상 다윈의 진화론이라고 부를 수 없다.) 자연선택설은 다윈 생전에 이미 죽었다고 선언되기도 했다. 그러나 다윈은 그 허점에도 불구하고 자연선택설을 끝까지 고수했다. 그는 자신의 통찰이 틀리지 않았으며 자연선택설에 내재한 허점은 미래의 새로운 과학에 의해 보강되리라는 확신을 가진 것 같다. 그의 확신은 보답 받았는데 『종의 기원』(1859) 출간 이후 70여년이 지난 20세기 중반 자연선택설에 내재한 허점이 해결되면서 자연선택설은 '종합 진화설'(Modern Evolutionary Synthesis)의 이름으로 화려하게 부활하기 때문이다.

 

왜 발표 당시 그것은 불가능하며 무의미하다는 평을 받았을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다윈의 자연선택설을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환경과 생명체의 몸은 자물쇠와 열쇄의 관계에 있다. 몸은 환경에 맞춰 직조되어 있다. 생명체는 몸을 어떻게 환경에 짜맞출 수 있었을까? 마치 재단사가 몸의 치수를 재고 거기에 맞춰 옷을 맞추듯이 생명체는 자신이 몸담을 환경을 스스로 스크린하고 거기에 맞춰 자신의 몸을 만든 것일까? 라마르크(Lamarck)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에 의하면 어떤 기관을 계속 사용하게 되면 그 기관 자체가 변하게 된다.  그러나 다윈은 환경이 변이체들의 개체군에서 긴 목의 기린을 선택했다고 주장했다.

 

라마르크와 다윈의 근본적 차이는 '변이'(variation)의 기원에 있다. 라마르크에서 변이는 동물이 그 기관을 계속 사용한 결과이다. 예를 들어 기린의 경우에는 목을 길게 늘이면 목이 점차 길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후 세대는 앞 세대로부터 새로 얻어진 길이를 물려받는다. 그러나 다윈에서 변이는 무작위적으로 출현한다. 그 주인공의 의도나 목적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냥 다양한 변형들을 쏟아낸다.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자손을 남김으로서 다음 세대에 전달되고 또 어떤 것은 자손을 남기지 못해 소멸한다. 다윈에 의하면 기린의 목이 길어진 것은 목이 긴 기린만이 살아남아 그 유전자를 후손에게 전달했기 때문이다. 목이 짧은 기린을 멸종시키고 긴 기린을 살아남게 한 것은 긴 기린에 유리하게 된 자연환경이다. 기후가 건조해져 초목이 말라가고 관목의 높은 가지의 잎만이 먹을 수 있는 유일한 먹이라고 생각해보자. 목이 짧은 기린은 먹이를 얻지 못해 굶어죽지만 긴 기린은 관목의 잎을 뜯을 수 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다. 기린의 목이 길어진 것은 목을 사용한 결과가 아니고 목이 긴 놈만이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유능한 농부는 각 세대에서 특정한 개체만을 선택해서 교접시킴으로서 특정 형질의 발현을 유도해 간다. 이것을 인위선택이라 부른다. 야생의 세계에서 이 역할을 '자연'이 한다는 점에서 그는 이것을 '자연선택'이라고 불렀다.

 

내 목이 길다고 해도 동료 기린의 목이 더 길다면 나는 상대적으로 불리해진다. 목이 긴 기린들 무리에서 더 긴 목을 가진 기린이 있다면 그 기린은 생존상의 이점을 누릴 것이다. 이 생존경쟁의 결과 목이 점점 더 길어지는 추세가 생겨난다. 이것은 목의 길이가 몸에 부담이 되는 임계점에 도달할 때까지 그 경쟁은 계속된다. 이 과정에서 보통의 길이의 목을 가진 집단과는 이제 완전히 구분되는 새로운 종-기린-이 출현한다.

 

칼 세이건(C. Sagan)은 이 자연선택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의 저서 『코스모스』에서 재미있는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1) 혹시 헤이케(平家)의 게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이것은 그 등딱지가 사무라이를 닮아서 일명 사무라이게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게의 등딱지가 사무라이 얼굴을 하게 된 연유는 이렇다. 1185년 천황파인 헤이케파와 그 숙적인 겐지(原氏)파간에 단노우라는 곳에서 대접전이 있었다. 결과 헤이케파가 패배했고 그들이 옹립한 7살 난 소년인 안도쿠(安德) 천황은 죽음의 위기에 몰렸다. 천황의 할머니는 "저 바다 깊은 곳에 조상님들의 집이 있다"며 천황과 함께 바다 속으로 뛰어들어 자살했다. 많은 사무라이들이 그 뒤를 이어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뒤 그 바다에서 잡히는 게의 등껍질에 사무라이 얼굴이 새겨져 있었는데 사람들은 사무라이들이 죽어 게가 되었다고 해서 그 게를 헤이케의 게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림4 헤이타이의 게..사무라이의 얼굴을 닮았다고 일명 사무라이 게


왜 이런 불가사의한 현상이 생긴 것일까? 칼 세이건은 자연선택의 관점에서 설명가능하다고 한다. 우연한 변이로 등껍질이 울퉁불퉁한 게가 생겨났다고 하자. 안도쿠 천황의 비극을 알고 있는 어부들에게 그 게가 사무라이 얼굴과 흡사하다고 느꼈을지 모른다. 어부들은 불쌍한 마음에 그 게들은 도로 바다에 놓아주었다. 등껍질이 밋밋한 게는 잡아먹히는 반면 울퉁불퉁한 게는 계속 방생됨으로써 개체수가 늘어났을 것이다. 울퉁불퉁한 게 가운데서도 사무라이 얼굴을 더 닮은 놈일수록 살아남을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이것이 수백 년간 계속 되면서 오늘날 사무라이 얼굴을 한 헤이케의 게가 출현한 것이 아닐까?

 

믿거나 말거나 이지만 이 과정은 다윈이 자연선택이라고 부른 그 과정과 똑같다. 변화무쌍한 등껍질이라는 변이에 인간의 눈이라는 선택이 작용함으로써 헤이케의 게가 생성된 것이다.


3. 자연선택과 유전자


자연선택설은 아주 그럴듯한 논법이다. 무질서하게 발생하는 변이 가운데 환경에 유리한 변이만이 생존하게 됨으로 환경에 의한 선별작용이 일어나는 것이다. 다윈은 이것을 비둘기나 개와 같은 동물 사육과정 속에서 확인했는데 이 과정을 통해서  다윈은 품종들이 만들어 진다2). 예컨대 말은 지속적으로 덩치가 커져왔는데 이것은 사육사가 태어난 놈 가운데 작은 놈은 죽이고 큰 놈은 번식시키는 선택과정을 통해 얻어진 것이다.3) 그는 이것이 자연 속에서도 일어난다고 생각했다.4) 다윈은 사육가의 인위이 자연외삽해서 자연 속에서도 그와 유사한 선택이 일어날 것이라고 추론한다. 그는 3장만이 이것을 ‘자연선택’이라고 부른다.


내가 발단의 종이라고 부른 변종은 어떻게 하여 마침내 충분히 자격이 있는 확실한 종, 즉 변종끼리 보다 훨씬 많은 차이를 나타내는 종으로 변해가는 것일까? ..그것은 생존을 위한 결과로서 생기는 것이다. 이 생존을 위한 경쟁에 의해 변이는 아무리 경미한 것이라도..그 개체에 조금이라도 이익이 되는 것이면..그 개체를 보존하도록 작용할 것이고, 그것은 또 일반적으로 자손에게 전해져 내려갈 것이다. ..아무리 경미한 변이라도 유용한 점이 있으면 보존되는 원리를 인간의 선택능력과 구분하기 위해서 나는 '자연선택'이라는 용어로 부르기로 한다.5)


문제는 새로운 변이가 다음 세대에 희석되어 버릴 것이라는 것이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다음 가상적 사례를 생각해 보자. 검은 털 토끼의 무리가 있다고 하자. 기온이 변해 서식지가 눈 세상으로 변해 버렸다고 하자. 검은 털 토끼는 여우의 눈에 잘 띄어 잡아먹히기 쉽다. 우연히 변이가 일어나 흰털 토끼가 생겨났다고 하자. 이 토끼는 여우의 눈에 잘 띄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검은 털 토끼에 비해 살아남을 확률이 높다. 흰털 토끼는 점점 많아지고 검은 털 토끼는 점점 줄어들어 결국 흰털 토끼로 변할 것이다. 다윈의 자연선택의 원리에 비추어 별 무리가 없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정적 문제가 있다.

 

새로운 환경에 모처럼 나타난 이 귀한 변이가 세대가 흐름에 따라 소멸될지 모른다는 우려다. 흰색이 검은 색 짝을 만나 약간 검은 끼가 있는 흰색 새끼를 낳고 그것은 다시 검은 색 짝을 만나 약간 더 검은 새끼를 낳고...이 과정이 몇세대 진행되다 보면 흰색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그림5)

 

이러한 논지로 플리밍 젠킨(Fleeming Jenkin)은 종의 기원에 관한 논평에서 "개체의 변이가 설령 생존에 용이하다 해도 대규모로 짝짓기 하는 무리에서 안전하게 뿌리를 내리고 유지되기 힘들며, 특히 새로운 종을 만들 수 있는 충분한 수의 개체수를 만들기가 어렵다."고 비판했다.6)

 

 

그림5 혼합유전..변이가 세대가 지남에 따라 소멸한다.


이것은 사실 자연선택에 대한 결정적 논박이 될 수 있다. 다윈은 동일한 변이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다면 혼합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큰 변이는 자연선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큰 변이는 아주 드물게 일어날 것이고 젠킨의 논리에 걸려 희석되어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윈은 작은 변이의 잦은 발생이 일어난다면 혼합에 대한 젠킨의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7)

 

그러나 이것은 젠킨의 반박에 대한 임시방편적 설명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사육가들이 하듯이 특정 변이를 주의깊게 고립시키지 않는 한 그 변이를 보존하는 것은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변이를 보존할 방법이 없다면 자연선택은 성립할 수 없다.

 

다윈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듯하다. 종의 기원 10년 후에 발간된 『사육에 의한 동식물의 변이』(1868)에서 이 문제를 풀기위해 판게네시스( pangenesis) 가설을 제안하게 된다.8) 생명체의 각 부위는 각 부위의 정보를 담고 있는 제뮬(gemmule)을 생성한다. 양부모의 제뮬은 생식과정을 통해 그 자식에게 전달되어 새로운 개체를 탄생시킨다. 각 부위 마다 1벌의 제뮬이 들어오는데 이 가운데 하나만이 발현되고 나머지 하나는 잠복한다.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그림6 검은 색의 제뮬을 가진 개체(상단)이 우연히 출현했다면 흰색의 제뮬의 개체(좌단)와 짝짓기를 했을 때 검은색의 제뮬은 소멸되지 않고 후손의 제뮬 속에 잠복해 있음을 도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다윈의 이 판게네시스 가설이 어떻게 젠킨의 반박을 해소시킬 수 있는지 요령부득이다. 그리고 철저한 경험적 기초에서 작업했던 다윈이 이 요령부득의 가설을 제안했다는 것은 젠킨의 반박을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였냐에 대한 반증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요령부득의 가설 속에 다윈이 충분히 전개하지 못했지만 젱킨의 반박을 넘을 수 있는 기본적 아이디어가 있다. 각 제뮬은 서로 혼합되지 않고 독립적이다. 말하자면 아날로그가 아니고 디지털이다. 비근한 예로 검은 털과 흰털이 혼합되어 회색털이 되는 것이 아니고 검은 털 또는 흰 털 어느 하나만 발현되고 나머지는 잠복한다. 이 기본 아이디어는 멘델에 의해서 깔끔하게 구현되었다. 다윈이 생전에 이 멘델의 연구결과를 알았더라면 이것이야말로 젠킨의 결정적 반박으로 불가능하다고 판정된 자연선택을 다시 되살리는 구원투수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멘델의 연구결과는 다윈 생전에 발표되었지만 다윈은 읽지 못했던 것 같다. 읽었지만 무시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자연선택설을 결정적 논박에서 구할 수 있는 그 해결의 열쇠를 그가 놓쳤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젠킨의 반박이 성립하는 것은 변이가 생식과정에 혼합된다는 전제이다. 그러나 만일 이 변이가 독립된 단위라면 이 변이는 사라지기는 해도 변형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림6 참조)

멘델의 기본 아이디어는 형질이 단위들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독립의 법칙이다. 2개의 대립형질 가운데 한쪽만이 발현된다는 것이 우성의 법칙이다. 이 두 법칙이 주어지면 3:1은 수학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형질이 하나인 Aa와 Aa를 교배할 경우 AA, Aa, Aa, aa의 조합이 나오고 A가 우성이라면 AA, Aa, Aa에서는 A가 발현되고 aa에서는 a가 발현되어 A대 a는 3:1이 된다. 여기서 혼합유전에서처럼 A와 a는 섞이지 않고 각각 독립적으로 유전된다. 둘이 섞인다면 예컨대 A가 높은 빈도로 존재할 경우 모처럼 나타난 변이 a는 사라져 버리고 원래의 A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각 유전자가 독립적이라면 모처럼 일어난 변이 a는 보존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감수분열 과정에 탈락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것을 보존할 수 있는 어떤 조건이 주어진다면 자연선택은 성립할 수 있다. 다음 그림은 그것을 도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림7 멘델의 3법칙, 다윈의 자연선택설의 빠진 고리를 보완하고 있다. 

 

자연선택이 주어진다면 변이a는 단순한 통계적으로 가정된 것 보다 높은 빈도로 보존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종합 진화설’(morden evolutionary synthesis)이라고 부르는데 다윈의 약점은 오히려 강점이 되어 새로이 부활했다. 1932년경 홀데인(John Haldane)은 『진화의 원인』에서 "다윈은 죽었다"는 유명한 말을 비웃으며 그 이전 세대 동안 진화론적 사고에 팽배했던 다윈설의 실추는 "피셔와 라이트 그리고 자기 자신에 의해서 끝났다"고 주장했다.9)



4. 자연선택과 진화


자연선택설이 성립불가능하다는 논증은 멘델의 단위유전설, 그리고 종합진화설의 유전자 빈도설 등에 의해서 깔끔하게 해결되었다. 다윈의 통찰의 승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또 다른 논박은 여전히 남아있다. 자연선택설은 단적으로 무의미하거나 동어반복이라는 것이다.

 

이제 지금까지 유보시켜 왔던 진화의 개념을 검토해 보자. 먼저 ‘진화’와 ‘자연선택’의 관계는 어떤가? 자연선택이란 환경에 적합한 변이의 보존이다. 그런데 흔히 진화란 자연선택의 결과로서 오해되고 있다.

 

"진화의 가장 크고 쉬운 양상은 다른 것이 정체되어 있거나 축소되거나 사멸하고 있는데 대해서 증식하고 있다는 것이다."10) 자손의 증식은 자연선택의 결과이다. 그런데 이 인용문은 이것을 진화와 동일시하고 있다.

 

"다윈의 중요한 공헌은 진화는 숱한 임의적인 변이 중에서 자연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밝혔다는 점이다."11) 이것은 더 명백히 진화는 자연선택에 의해서 성취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다윈은 진화와 자연선택을 명백히 구분하고 있다. "자연선택은 반드시 진화적 발달을 수반할 이유가 없다. 그것은 다만 복잡한 생활관계 속에서 모든 생명에게 일어난 유리한 변이를 이용하는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12)

 

만일 진화를 자연선택의 결과라고 한다면 진화의 여부는 그 생존(그리고 증식)이다. 그렇다면 인간 보다 박테리아가 더 진화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자연선택은 환경에 적합한 것만이 선택된다는 ‘적자생존’(the survival of the fittest)의 다른 말이다. 그런데 환경에 적합하다는 것은 그것이 도태되지 않고 선택되었다는데서 찾는데…이것은 동어반복이다. 그러므로 적합성(adaptation)의 기준은 그것의 선택 즉 생존 외의 다른 것에서 찾아야 한다. 적합성이 있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지 선택되었기 때문에 적합성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적합성의 확장…그것이 ‘진화’이다.

 

고로 자연선택만으로 진화를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진화를 설명해 주지 못하는 ‘자연선택설’ 그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아니면 생존은 좋은 것이라는 무의미한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헉슬리, 윌리스, 헤켈 등이 다윈의 후계자를 자처하면서도 다윈의 ‘자연선택’의 틀 속에 머물지 못하고 보다 형이상학적 원리를 찾을 수밖에 한 원인이다.


결국 헉슬리도 윌리스도 헤켈도 여기서 더 이상 다윈주의자가 될 수 없었다.

 

스펜서는 진화의 기준을 자연선택 외의 다른 것에서 찾는다. 사실 진화라는 말자체가 스펜서에 의해 도입된 것이다. 스펜서(H.Spencer)에 의하면 진화란 "물질의 완성이요, 또 이에 수반하는 운동의 소산(消散)이다. 진화가 있는 동안에 물질은 불확정하고 고르지 않는 동질성으로부터 확정되고 잘 어울리는 이질성으로 넘어간다. "13)

 

요컨대 스펜서는 생물에 있어서 기능의 분화 및 전문화의 양을 진화의 척도로 삼고 있다. 진화를 결정하는 기준은 각 기관의 다양성, 전문성 그것에 따른 효율성의 증가에 있는 것이지 보다 많은 자손의 증식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다윈은 묻는다. "이 자연선택이 각 생물을 유기적, 무기적 생활환경과의 관계에 있어서 개량과 그래서 체제의 진화를 유도하는 것.."14) 그런 것이 있을까? 즉 다윈은 자연선택의 메커니즘 안에서 진화를 설명할 수 있는지를 묻고 있다. 진화를 자연선택 밖의 어떤 형이상학적 원리에서 가져오고자 했다는 점에서 헉슬리도, 헤켈도, 심지어 윌리스도 다윈주의자가 아니다.

 

다윈의『종의 기원』은 진화론의 완성된 판이라기보다 미래에 완성시켜 가야 할 연구 프로그램으로 보아야 한다. 그 과업은 ‘자연선택’의 원리에 기초해서 기능의 분화와 전문화로 지향해가는 진화를 설명하는 것이다.


『종의 기원』안에서만 ‘자연선택’의 개념을 보면 자칫 무의미하거나 동어반복으로 보일 수 있다. 그 책은 구체적 연구들로 채워질 때 비로소 의미를 획득한다. 『종의 기원』(1859)의 출간 후 다윈 자신이 바로 이 채우기 작업에 들어간다. 이 책은 그의 다음 작업과 연관시킬 때 그 의도를 정확히 읽을 수 있다.



1809   출생


1859 『종의 기원』 출간

1862 『곤충에 의해 수정되는 난의 여러 가지 고안에 관하여』

1869 『가축과 재배식물의 변이』

1871 『인간의 유래』

1872 『사람과 동물의 감정표현』

1875 『식충식물』, 『덩굴식물의 운동과 습성』

1876 『식물계에서 타가수정과 자가수정의 효과』

1880 『식물의 운동력』

1881 『자서전』, 『지렁이의 작용에 의한 부식토의 형성』


1882  세상을 떠남



『종의 기원』이 위대한 책인 것은 그것이 답을 제시했다기 보다 우리가 자연에 대해서 무엇을 보아야 하며 어떻게 질문해야 하는가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15) 『종의 기원』출간 후 난초에서 지렁이 까지 다윈은 그 빈칸을 쉬지 않고 채워갔으며(지렁이의 양토와 벌의 수정에 관한 그의 세밀한 연구는 그가 얼마나 천재적 직관력을 가졌는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그의 죽음 직전 까지도 계속되었다.


( 조용현, 2011 KBS 고전 아카데미 시민강좌)

 


생각해볼 문제



1. 당대의 사고에 대해 다윈의 진화이론의 급진성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보자.


2. 젠킨스는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3. 멘델의 유전자(유전형질)의 개념은 다윈 진화론의 ‘빠진 고리’에 해당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4. 다윈식 공부는 세심한 경험적 증거의 검토와 그것에 기초한 대담한 추론의 범형을 보여주고 있다. 이 능력으로 그는 당시의 증거와 지식에 기초했다면 결코 얻을 수 없었을 시대를 뛰어 넘는 통찰을 보여주었다. 그것을 찾아보고 감상해 보자.


5.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는 자칫 공허한 동어반복으로 보일 수 있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고 그 대안으로 가져온 5장을 같이 검토해 보고 이것이 과연 다윈주의 틀 내에서 수용가능한지를 토론해 보자.

 

5장 내용은 아래글 참조

http://biophilosophy.tistory.com/admin/entry/post/?id=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