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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철학

창조적 진화와 空化(2000.12)

 

창조적 진화와 空化

                                            

 

 

근대과학에서 物의 구성방식의 혁신은 物에서 그 능동성을 탈색시켜 버린데 있다.이것은 근대과학의 운동론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론과의 대결과정에서 형성되었다.아리스토텔레스가 운동을 가능태에서 현실태에로의 이행으로 정의했을 때 이 목적론적 과정은 비단 생명체의 운동에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그것은 존재자 전체에 적용되는 기본원리였다.그러므로 물질도 그 예외가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물질 자체는 능동성을 함유하고 있다.

근대과학의 운동론은 이것을 관성의 원리로 대체한다.갈릴레오에서 시작되어 데카르트에서 완성된 관성의 원리는 물을 철저히 수동화시키고 있다.관성의 원리란 외부에서 원인이 작용하지 않는한 물은 자신의 상태를 바꾸지 않는다는 원리이다.그러므로 운동하고 있는 물체는 외적 원인이 개입하지 않는한 그 운동상태(등속운동)를 계속할 것이다.이것을 우리는 관성운동이라고 한다.물론 마찬가지 이유로 정지해 있는 물체는 외적원인이 없는 한 그 정지상태를 계속 유지할 것이다.

이것이 우주를 거대한 기계로 보는 기계론의 철학을 만들어내는 기초가 되었다.이제 자연은 활성없는 기계로 간주되었으며 외양상 이 원리에 반하는 듯이 보이는 현상,특히 생명현상 조차도 여기에 대한 예외로 취급되지 않았다.이것은 생명이 기계가 아니라기 보다 우리의 지식이 아직 부족해서 그 기계적 원리를 충분히 규명하고 있지 못한 "복잡한" 기계일 뿐이었다.그것은 앞으로 풀어야할 과업일 뿐이었다.이제 이것은 시대의 주류적 추세가 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할 인물은 라이프니쯔이다.그는 과학혁명의 주류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이 흐름을 탐탁치 않게 보고 그것과는 다른 과학을 펼쳐보이려고 하고 있었다.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론을 새로이 대두하고 있는 운동론과 타협시켜 보려는 노력을 계속했다.그의 저항은 그의 죽음과 함께 기계론의 거대한 흐름속에 소멸되어 버렸다.그의 논지들은 반박되었다기 보다 단지 잊혀져 버렸을 뿐이다.

그가 物의 개념으로서 데카르트의 "延長"에 대항해서 가져온 개념이 "單子"이다.데카르트처럼 물질과 정신에 각각 다른 본성을 부여함으로써 이 둘을 날카롭게 나누지 않고 그는 물질과 정신을 단자들의 점차적 이행단계들로 보았다.그럼으로써 그는 물질을 단순한 수동성으로 환원하지 않고 능동적 활성을 보존케할 수 있었다.

단자라는 개념에 의한 물의 구성방식은 근대 기계론의 위세앞에서 충분히 시도되지 않았지만 이것은 물을 구성하는 또 다른 대안방식이라는 점에서 보편적 개념이다.이것은 화이트헤드(A.N.Whitehead)의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데이비드 봄(D.Bohm)의 "함축된 질서"(implicate order)의 개념속에서 재현되고 있으며 나아가 華嚴철학의 기본구도속에서도 의연히 살아 있다.여기서 구성되는 물은 외부원인에 의해서 변화하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고 활성을 가지고 자기스스로를 조직하는 능동적 존재이다.여기서의 패러다임 사례는 "물질"이 아니고 "생명"이다.말하자면 생명적 특성이 물질적 특성의 한 특수한 형태가 아니라 오히려 물질적 특성이 생명적 특성의 한 특수한 형태로 파악되고 있다.

이 관점을 가장 철두철미하게 밀어부친 것이 불교의 화엄철학이 아닌가 한다.화엄철학의 일차적 관심사는 이해가 아니라 구원이다.그것은 애당초 물을 구성하기위한 이론적 시도로서 나온 것은 아니다.그러나 그것이 기초하고 있는 그 개념에서 기계론의 물에 대한 한 대안이론을 구성할 수 있는 많은 통찰들을 찾아낼 수 있다.

 

 

 라이프니쯔는 물질의 본질이 연장이라는 데카르트의 견해를 거부했다. 실체의 본질적 특성은 불가분성(不可分性;indivisibility)에서 찾아야 하는데 연장은 그 자체 가분적인 것이어서 실체가 될 수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것을 '단자'라고 부른다. 이 단자는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기본단위라는 점에서 '원자'와 비슷한 것 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연장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원자와는 다르다. 이 단자와 비슷한 것은 기하학에서의 '점'이다.

 그렇다면 연장을 갖지 못한 모나드가 어떻게 세계속에 현상하는가? 그는 모나드들의 운동속에서 그 답을 찾고 있다. 수학적 선분은 무한한 점들의 집합이 아니고 점의 운동이며,면은 무한한 선들의 집합이 아니고 선의 운동이듯이 단자들의 운동이 만들어 내는 결과 또는 그 현상이 우리의 세계이다. 운동은 단자속에서 자발적으로 발생하는데 이 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단자 자체의 본질이 바로 '힘'(force)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실체는 바로 단자이며 물질과 정신은 그것의 상이한 현상태들이다.

 이것은 그의 운동론의 배경에서 더 잘 이해할 수있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물질의 본질은 연장이고,연장이므로 불가침입성(不可侵入性;impenetrability)을 갖고,이 불가침입성으로 해서 물체간의 충돌이 일어나고,이 충돌은

라는 운동량의 크기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충돌 후 두 물체의 질량중심은 등속운동을 하므로 이 충돌에 아무런 힘의 개입이 필요없다. 그래서 데카르트의 체계는 힘이 도입되고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운동학'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고,라이프니쯔는 힘이 도입되는 '동력학'(dynamics)의 체계를 구상했다.

 그는 우선 데카르트의 운동량의 개념으로 불충분하다는 것을 물체의 낙하의 분석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1) 예컨대 질량 m의 물체를 높이 h에서,그리고 질량 4m의 물체를 높이 1/4h에서 낙하시키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갈릴레오의 낙하법칙에 의하면 다음식이 성립한다.

 

 (1) v =

 

 (1)식에서 높이 h에서는 v =

,높이 1/4h에서는
이다. 데카르트가 주장했듯이 운동량이 보존된다면 이 값을
mv,4mv,,에 대입했을 때 양변이 같아야 한다. 그러나 같지 않다. 양변을 같게 하기위해서는 vv,'를 제곱을 해주면 된다.

 

 (2) m ×2gh = 4m ×1/2gh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보존되는 것은 mv가 아니라 mv2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두 식의 차이를 라이프니쯔는 '무한소'의 개념을 가지고 비교하고 있다.2)

 

 (3) (m1 + m2 + m3 + ...)(v1 + v2 + v3 + ...)

 

  m1, m2 ...는 무한소의 단자들이고,v1, v2 ...는 무한소의 단자들이 갖는 무한소의 속도의 집합이다. 무한소의 단자들의 질량의 합은 거시적 계에서 m이다. 그래서 (3)은 무한소의 단자들의 운동량의 총합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기할 수있다.

 

 (4) m(v1 + v2 + v3 + ...)

    = m∫vΔv

    =1/2 mv2

 

 단자들의 충돌의 총합(mv)이 거시적 계에 나타날 때 힘(mv2)으로 된다.그는 mv를 운동의 상태를 시작시키지만 현실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힘으로 '죽은 힘'(dead force),

mv2 을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힘으로 활력(vis viva,living force)이라 부른다.3)

 요컨대 단자가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이 힘(오늘날의 운동에너지)이며 단자는 연장을 갖지 않지만 이 힘의 장(場)으로 해서 자신의 장속에 다른 물체의 침투를 저지하며 이것이 연장과 공간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것들은 단자라는 실체가 만들어내는 현상에 지나지 않으며,데카르트가 보듯이 그자체 실체가 아니다.

 단자는 실체이기 때문에 데카르트의 논리에 따라 다른 것에 의존함없이 존재하는 것,즉 절대적인 활동의 중심이지 않으면 안된다. 단자속에 일어나는 모든 활동은 오직 그 자신에서만 일어나며,어떠한 외적 원인도 이것에 영향을 주거나 변화를 줄 수없다. 그래서 그는 "단자는 다른 것이 들어갈 수있거나 나갈 수있는 어떠한 창문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물들간의 상호작용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각각의 단자의 표상속에는 일체의 다른 것과의 연관이, 즉 우주 자체가 그 속에 함유되어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하나의 단자는 극소로 압축된 우주, 즉 하나의 소우주(microcosmos)라고 할 수있다.

 

물질의 아무리 작은 부분에도 피조물,생물,동물,영혼,정신의 세계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수 있다.

물질의 각 부분은 마치 식물로 가득차 있는 정원이나,물고기로 가득차 있는 연못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된다.그리고 그 식물의 한 개의 가지나 동물의 한 개의 肢體나 그 물방울의 하나하나가 역시 한결 같은 정원이며 연못이다.4)

 

이와 유사한 비유를 우리는 화엄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나의 티끌속에서 무한량의 불국토와 수미산 金剛鐵圍山의 세간을 나타내어도 좁지 않다.(於 一微塵中 現無量佛國 須彌金剛圍 世間不迫착)5)

 

그러나 흥미롭게도 그 입론의 근거는 완전히 상반된다.라이프니쯔에서 단자속에 전 우주가 압축되어 들어있다는 것은 단자가 "창문이 없기 때문에" 즉 실체이기 때문에 필요한 불가피한 요청이다.화엄철학에서는 事에 전 우주가 융섭해들어오는 것(事事無碍)은 事가 自性-실체성-이 없다는 데서 오는 당연한 귀결이다.화엄에서의 事는 창문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자체가 창문이다.

라이프니쯔는 왜 화엄철학에서 보이는것과 같은 철저한 관계론에 도달하지 못한 것일까?데카르트의 실체관을 비판했지만 여전히 데카르트의 실체관을 벗어나지 못한데서 오는 한계로 보인다.그래서 올바른 출발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결론으로 들어가는 길을 잃고 말았다. 무한한 실체들의 존재를 승인한다는 것은 실체의 절대독립성에 대한 데카르트의 정의를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그대로 고수함으로써 상호교통할 수없는 창이 없는 무한한 실체들의 집합으로 된 세계,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질서를 만들기위해 전 우주가 각각의 단자들속에 압축되는 세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거꾸로 뒤집혀져 있다. 여기서 데카르트의 영향 -실체관- 을 벗겨냄으로써 뒤집혀진 라이프니쯔를 바로 세울 수있다. 그 때 드러나는 세계는 어떠한 세계인가?

 '힘'은 우선 관계의 개념이다. 절대 자립적 힘이란 형용의 모순이며 힘은 다른 것과 관계속에서 만들어지는 한 상태이다. 단자의 본질이 힘이라는 것은 이미 관계를 전제하고 있으며 이 우주는 거대한 관계의 망상조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관계가 현상한 것이 바로 -라이프니쯔가 옳게 통찰했듯이- 공간이고 물체이다. 그러므로 단자는 관계의 다른 이름이 아니다. 단자는 세계와 그물처럼 얽혀있고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세계를 반영하고 있다. 이것을 실체의 입장에서 보면 마치 세계가 단자속에 압축되어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실체를 먼저 상정하고,그것의 상호작용을 물을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을 먼저 상정하고 그것이 '실체'를 어떻게 현상하게 하는가라고 물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라이프니쯔의 경우 그 탐구의 방식이 외양상으로는 전자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후자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는 단자를 먼저 상정했지만 이것은 상호작용의 실체화이다. 다음에 이 상호작용이 어떻게 '실체'(시간,공간,물체,정신)를 현상하는가를 묻고 있다. 우리는 라이프니쯔에서 데카르트의 실체개념을 제거했기 때문에 "단자는 창문이 없다"는 그가 관계의 존재론에 실체의 존재론의 옷을 입히려는 과정에서 어쩔 수없이 가져온 그 임시변통적 설명(ad hoc explanation)을 제거할 수있다.  단자는 창문이 없는 것이 아니라,그 자체 바로 창문이다.단자는 그 자체 空하다.(自性이 없다) 그러나 "이 공은 비누와 같아서 공이라는 비누로 분별의 때를 빨았으면  그 공의 비눗기도 다시 헹궈내야 한다."(空空)6) 라이프니쯔는 비눗기를 미처 헹궈내지 못해 그것을 실체화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고 할 수 있다.

단자를 이런 방식으로 재해석할 때 오히려 라이프니쯔의 의도가 더 분명히 밝혀지는데 그는 실체의 존재론에 대한 관계의 존재론을 정립함으로써 데카르트와는 구별되는 물에 대한 새로운 구성방식을 시도한 것이다.

이 관계의 존재론에 대한 철저한 재구성은 화이트헤드의 철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화이트헤드의 창조성의 개념과 공과의 관계를 검토해 보자.

 

 

3.1 화이트헤드는 궁극자의 범주로 창조성,다자,일자를 들고 있는데 이것은 사물의 존재의 의미속에 들어있는 궁극적 개념이다.7)그리고 이 셋간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창조성은 궁극적인 사태를 특징지우는 보편자들의 보편자이다.그것은 이접적 방식의 우주인 다자를 연접적 방식의 우주인 하나의 현실적 계기로 만드는 궁극적 원리이다.다자가 복잡한 통일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사물의 본성에 속한다.8)

 

요컨대 다자의 통합을 통한 일자의 창출이 창조성이다.이것이 창조적일 수 있는 것은 그 일자가 단순히 다자들의 합이 아니라는데 있다.이 통합과정에서 항상 "새로움"이 출현한다.다자들이 다자들로서의 특성-자성-을 견지하고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다자들의 집합이지 일자라고 할 수 없다.이 과정에 다자의 각자는 자신의 자성을 사상해가는 과정이 필요한데 이것은 완전히 자신을 무화하는 과정은 아니다.이것은 불교의 공화의 개념과 상당한 유사성을 갖고 있다.

다자가 일자로 통합되는 과정을  "合生"(concrescence)이라고 하는데 이 과정을 통해서 "현실적 존재"(actual entities)가 출현한다.

합생은 "더불어 성장한다"는 의미의 라틴어 동사에서 조어된 것이다.그는 합생을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합생이란 다수의 사물들로 구성된 우주가,그 多者의 각항을 새로운 一者의 구조속에 결정적으로 종속시킴으로써 개체적 통일성을 획득하게 되는 그런 과정을 일컫는 말이다.9)

 

화이트헤드가 합생을 가지고 설명하고자한 것은 1차적으로 전자,양성자,에너지 양자같은 물리적 존재인것을 보인다.반면 단세포에서 다세포로의 이행 같은 것은 "결합체"(nexus) 또는 "사회"라 불러서 구분한다.

이 글에서 필자의 관심사는 현실적 존재의 생성에 있다기 보다 결합체(nexus)나 사회의 생성에 있다.결합체나 사회의 생성에는 합생의 과정이 없는가?그러나 화이트헤드는 미시적 과정인 현실적 존재의 생성에만 이 합생이라는 용어를 한정시켜 사용하고 있다. 다자의 일자에로의 통합과정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결합체나 사회에도 합생의 과정이 일어나고 있다.그러므로 화이트헤드의 합생에 대한 분석을 사회나 결합체에도 원용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이런 관점에서 "합생"의 외연을 확장해서 결합체나 사회도 합생의 범주에 포함시켜 합생의 개념을 넓게 사용하고자 한다.10)

우선 이것은 "合成"(synthesis)과는 다르다.합성의 과정속에서 각 요소들은 독립성과 자율성을 상실하고 전체속에 병합된다.이것은 우리의 代謝 과정속에서 일어난다.나의 체내에 들어온 영양물(그 이전에 독립성과 자율성을 가졌던 다른 생명체)은 분해되어 나의 몸을 구성하는 재료가 된다.이것은 원래 가졌던 자기동일성을 상실한다. 반면 합생은 각 요소들이 독립성과 자율성을 유지하면서 전체의 부분으로 통합되어 가는 과정이다.세포와 세포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세포소기관들(미토콘드리아,엽록체 등),몸과 몸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세포들 사이에 보여지는 전형적 관계들이 이러한 것들이다.물론 우리의 몸의 세포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다가 우리의 몸속에 통합된 것은 아니다.세포의 분화과정은 이미 발생의 과정이지 합생의 과정이 아니기 때문이다.그러나 이 합생의 과정이 지금 우리의 몸속에 일어나고 있지 않더라도 과거 단세포에서 다세포에로의 이행과정에서 일어났을 것으로 보인다.합성의 과정만 있었다면 다세포 생명체는 커녕 진핵생명체 조차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우리의 몸이 바로 아득한 과거에 일어났던 합생의 증거이다.

화이트헤드는 합생의 과정을 '호응적 위상'(responsive phase),'보완적 위상'(supplement phase),'만족'(satisfaction)의 셋 단계로 나눈다.11) 호응적 위상은 현실세계를 감성적 종합을 위한 객체적 여건이라는 형태로 순수하게 수용하는 국면이다.그러나 이 단계는 요소들이 私的인 직접성-통일된 중심-으로 아직 흡수되지 않고 있는 단계이다.

그래서 이것들은 자기제한 없이는 새로운 일자로 통합될 수 없다.여기서 각 요소들의 주체성의 일부가 捨象되면서 점차 私的인 직접태가 작동하기 시작한다.이것이 보완적 위상이며 이것에 이어 요소들이 완전한 개체로 통합되는 만족의 위상이 따라온다.이 과정 자체는 상당히 복잡하고 논란의 여지도 많지만 여기서는 그 상세한 세부적 논의들로 들어갈 게제는 아니다.12) 화이트헤드의 의도의 대략적인 파악으로 만족하고자 하는데 그 의도는 요소들을 전체속에서 통합하면서 그 요소들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살리기위한 철학적 숙고라고 하겠다.

이 합생의 과정에 대한 간단한 모형이 물리학의 "同調"(correspondence)의 개념이다. 한 예로 레이저의 생성과정을 보자. 서로 마주보는 거울이 있는 상자속에 에너지를 부여하면 상자속의 원자의 일부는 이전보다 에너지 準位가 높은 勵起상태가 되어 광자를 방출한다. 광자는 여기된 다른 원자에 충돌하고 거듭 광자가 방출된다. 처음에는 광자들의 파가 서로 간섭하여 복잡한 파형을 만들어 내지만 서로 위상이 달라 상쇄되어버려 방출되는 빛은 약하다. 그러나 점차 에너지의 강도를 높혀 가면 갑자기 어느 시점에서 광자들이 동일한 위상으로 정렬되어 강력한 단일 진동수의 빛을 방출하는데 이것이 레이저 광선이다. 왜 이렇게 되는 것일까? 이것은 勵起상태에 있는 많은 분자들의 내부운동에 동조현상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동조현상이 전체의 질서를 만들어 내지만 또한 전체의 질서 없이는 이러한 동조현상이 생겨나지 않는다.이것은 완전히 순환적이다. a와 b가 관계맺음(호응적 위상)으로 a-b의 관계망(만족의 위상)이 생기고 이것이 역으로 a와 b를 한정한다. 그러나 이것이 a,b가 a-b에 선행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a,b로서의 개별성을 갖게 되는 것은 이 a-b의 관계망으로서이기 때문이다.요소는 전체를 전제하고 있고 전체는 요소를 전제하고 있다.13)

그런데 합생은 한번으로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그것은 새로운 차원에서의 합생으로 진입해 들어가는데,그는 이것을 '이행'(transition)이라고 부른다.이 단계에서 전단계의 합생을 통해 만들어진 주체는 새로운 차원의 합생을 위한 객체(자기초월체,superject)가 된다. 화이트헤드는 이 객체를 "죽은 여건"(dead datum)이라고 하는데14) 왜냐하면 그 과정에 요소들의 주체성이 그대로 살아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군집이지 합생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 그 주체성은 새로운 합생을 통해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그것은 자기한정을 통해 객체적 불멸성을 획득한다.15)

 

3.2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존재는 항상 주체이면서 객체라는 점이다.그것이 창조의 과정에 있다는 점에서 주체이지만 이것이 완료되었을 때 그것은 새로운 창조의 여건이 된다는 점에서 객체이다.화이트헤드는 주체와 대립되는 것으로서의 객체라는 뉘앙스를 피하기위해서 객체를 "자기초월체"(superject)라고 부른다.그래서 존재는 단순히 주체나 자기초월체로 이해되어서는 안되고 "자기초월적 주체"(superject-subject)로 이해되어야 한다.

 

현실적 존재는 경험하고 있는 주체이며 동시에 그 경험의 자기초월체이기도 하다.그것은 자기초월적 주체이며,이 두 측면의 기술은 어느 한 순간도 간과될 수 없다.주체라는 술어는 현실적 존재가 그 자신의 실재적 내적 구조와 관련하여 고찰되는 경우에 주로 사용된다.그러나 주체는 항상 "자기초월적 주체"의 생략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16)

 

이 자기초월적 주체는 새로운 합생을 위한 여건이 된다.있는 것은 현실태이면서 동시에 가능태이다.이것을 화이트헤드는 존재의 "상대성 원리"라고 한다.그러므로 모든 것은 창조의 과정속에 있으며 창조는 있는 것의 본성에 속한다.이것이 "과정의 원리"이다.거꾸로 말해서 새로움을 향해 변화되지 않는 것은 현실적 존재가 아니다.그것은 공허한 추상일 뿐이다.

 

있는 것의 본성에는 모든 생성을 위한 가능성이 속해 있다는 것,이것이 "상대성 원리"이다17)..

현실적 존재가 어떻게 생성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 그 현실적 존재가 어떤 것인가를 결정한다는 것,따라서 현실적 존재에 대한 두가지 기술은 서로 독립해 있는 것이 아니다.현실적 존재의 "있음"은 그 '생성"에 의해 구성된다.이것이 "과정의 원리"이다.18)

 

그러므로 "주체","객체"라는 것은 이 생성의 과정을 임의로 단절시킨 추상물에 지나지 않는다.생성의 과정속에 주체라는 것은 없다.그것은 아직 완료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주체가 아니다.그러나 완료되는 순간 그것은 이미 객체로 되고 있다는 점에서 주체도 아니다.그것은 수학에서의 극한값과 같다.말하자면 그것은 주체와 객체 간의 극한값이다.현실적 존재는 주체도 아니고 객체도 아니고 주체와 객체가 만나는 그 극한 속에 있다.19)

 

결정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항상됨에 집착하는 것이고 결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斷滅에 집착하는 것이다.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있다거나 없다는데 집착해서는 안된다.(定有則著常 定無則著斷 是故有智者 不應著有無)20)

 

주체는 객체와의 극한속에 있으므로 그것을 있다고 하면 상주론에 빠지고 없다고 하면 단멸론에 빠진다.

 

만일 사물이 결정적인 자성을 가져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恒常되다는 말이 되고,미리 존재하다가 지금 없어졌다면 斷滅했다는 말이 된다.(若法有定性 非無則是常 先有而令無 是則爲斷滅)21)

 

이것이 "머무름이 없음"의 無常이며 화이트헤드의 현실적 존재가 함축하고 있는 바이다.무상이 현실적 존재의 본성이며 다른 것은 다만 이것의 한갓된 추상일 뿐이다.사물 자체는 자성을 갖고 있지 않다.즉 공하다.자성을 갖는 존재라면 그것은 다른 것과 관계맺을 수 없고 변화는 일어날 수 없다.파르메니데스가 보여주었듯이 절대로 있음에서 절대로 없음이 생길 수 없고 절대로 없음에서 절대로 있음이 생겨날 수 없다."있음"과 "없음"으로는 변화와 창조가 불가능하다."있음속의 없음"," 없음속의 있음" 이른바 공함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22)창조적 주체이면서 창조의 여건이 되고 있는 이 자기초월적 주체의 특성은 바로 이 공함에서 나온다.중론의 다음 구절들은 그것을 말하고 있다.

 

만일 모든 존재에 자성이 있다면 어떻게 변화가 일어날 수 있겠는가? (若諸法有性 云何異得異 ) 23)

 

모든 존재는 변하기 때문에 無自性임을 알아라. 無自性인 존재도 역시 없다.일체의 존재가 空하기 때문이다.(諸法有異故 知皆是無性 無性法亦無 一切法空故.)24)

 

공함으로서 그것은 다음의 합생을 위한 여건이 될 수 있다.화이트헤드는 이 여건화된 자기초월체를 "죽은 여건"(dead datum)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25) 주체적 형식, 즉 自性이 사상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그러나 이것은 무화되는 것이 아니다.주체적 직접성을 버리는 대신 객체적 불멸성을 획득한다.

 

현실적 존재는 주체적으로 끊임없이 소멸되지만 객체적으로는 불멸한다.현실태는 소멸될 때 주체적 직접성을 상실하는 반면 객체성을 획득한다.그것은 그 안정의 내적 원리인 목적인을 상실하지만 작용인을 획득한다.이 작용인으로 말미암아 그것은 창조성을 특징짓는 제약의 근거가 된다.26)

 

3.3 다자에서 일자에로의 합생이 창조적 과정이다.합생 후 다자의 각자는 그 자성을 완전히 상실하는 것일까?화이트헤드의 경우 다자는 후속하는 창조성을 제약하는 여건으로서 의연히 남아있다.그러므로 자성의 전부를 버린다기 보다 통합을 위한 최소한의 주체성을 양도하는 것으로 보아야할 것이다.일자란 중앙집중적 단일국가라기 보다 지방정부의 연합체로서의 연방국가에 가깝다.

필자는 일자에의 통합을 다자들의 모듈화와 레벨이동의 관점에서 살펴 보고자 한다.새로운 합생의 과정에서 그 자체가 완전히 소멸하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관계맺음을 통해서 더 높은 레벨에서 그 주체성을 이양한다.화이트헤드는 "주체적 직접성"을 상실한다고 했지 "주체성"을 상실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그것은 창조의 장에 들어있는 상위레벨에 대해서는 주체성을 잃었지만 하위레벨에서는 여전히 주체성이 살아있다.단지 그 "직접성"을 잃었을 뿐이다. 외교권은 상실했지만 지방내의 통합에 필요한 내적 자치권은 보유하고 있는 연방국가의 지방정부에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말하자면 그 자체 여전히 복잡한 전체(일자)이면서 상위레벨의 전체에 대해서 모듈화되는 것이다.이것은 위를 향해서는 부분(다자)이지만 아래로 향해서는 그자체 전체(일자)인 케슬러의 홀론(holon)과 같은 것으로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케슬러에 의하면 실재를 부분의 합으로 보느냐,아니면 부분으로 환원할 수없는 통일적 전체로 보느냐 하는 것은 사실상 의미가 없다. 모든 실재는 부분이면서 동시에 전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절대적 부분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없는데 그것은 더 하위레벨의 부분들로 이루어진 전체로서의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똑같은 논리로 절대적 전체라는 것도 존재할 수없는데 더 상위레벨의 부분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계구조의 각 구성요소들은 각개의 차원에서 그 고유한 권리를 지닌 아전체,즉 홀론이라는 것이다.그것은 자기규제적인 장치를 갖추고 상당한 정도의 자율성 혹은 자기통제능력을 누리고 있는 안정되고 통합적인 구조로 되어있다.세포,근육,신경,기관 등의 모든 부분들은 자기의 고유한 리듬과 활동양상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들은 종종 외부의 자극없이 자발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그것들은 부분으로서 위계구조상의 더 높은 중앙에 종속되어 있지만 그와 동시에 준자율적인 전체로서 작용하기도 한다.그들은 야누스(Janus)다.더 높은 차원을 향해 위로 보고 있는 얼굴은 종속적인 부분의 얼굴이고 자신의 구성요소를 향해 아래로 보고 있는 얼굴은 놀랄만큼 자기충만성을 지닌 전체의 얼굴이다.27)

 

그러므로 창조적 진화란 기존의 것을 완전히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과정 아니고 기존의 것을 여건으로 해서 새로운 레벨로 이행해가는 과정으로 보아야할 것이다.이 과정에서 일자로서의 주체성을 양도하는 것이 필요하며 또 그만큼만 필요하다.자신을 일자에 대해 완전히 동화시키는 것은 화이트헤드적인 합생은 아니다.이 합생의 과정에 다자가 일자의 구성요소로서 규격화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바이츠체커(E.Weizsäcker)가 생명의 진화를 위해 가져온 "새로움"과 "확인"의 개념도 이러한 맥락에서이다.28) 보다 높은 의미론적 수준의 새로움을 끌어들이게 되면 하위수준에서의 새로움은 줄어들게 되고 규격화되는데 이것이 "확인"이다.이것은 생명의 진화에서 잘 드러난다.오늘날 지구에는 수백만 종의 원핵생물이 있지만,진핵세포 안에 형성된 세포소기관들(원시 원핵생물의 후손들)은 고도로 규격화되어 있다.이것은 원핵생물이 진핵생물속으로 유입됨에 따라 규격화의 과정을 밟았다는 것을 의미한다.보다 높은 수준으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낮은 수준의 새로움을 감소시켜야 한다.

테니스를 처음 배울 때 손목을 쓰지 말라고 가르친다.그러나 좋은 선수가 되었을 때는 그러한 것을 모두 잊어버렸을 때이다. 화이트헤드의 용어를 빌리면 그것이 "죽은 여건"-바이츠체커의 규격화-이 되었을 때이다.선수들의 끊임없는 단순반복 연습은 역설적으로 말해서 그것을 "잊어 버리기'' 위한 것이며 그럼으로써 실제 시합에서 고차적 전략을 구사할 수 있다.그렇다면 그것은 소멸되었는가?그렇지 않다.그것은 하위차원에서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오히려 그것은 높은 수준의 새로움 속에서 "객체적 불멸성"을 획득한다.

합생이 완료되었을 때 그것의 구성요소들(다자)이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각 단계는 일정한 자율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자신 고유의 시간과 공간속에서 삶을 영위한다.

이것을 투박하기는 하지만 다음과 같이 비유해 보면 어떨까 한다.세포는 그 구성부분들의 합생이다.몸은 다시 세포들의 합생이다.그러나 몸을 이루기 위해 모인 세포들은 그것이 몸을 이루고자 한다면 더 이상 합생의 신분이어서는 안된다.그것은 몸에 대한 객관적 여건으로 자신의 신분을 바꾸어야 한다.몸들의 모임은 다시 새로운 합생으로 전이되어 간다. 그러나 세포소기관들이 세포가 되고 세포가 몸이 되었다고 해서 세포소기관이 세포소기관으로서,세포가 세포로서의 특성을 잃는 것은 아니다.이것을 도식화하면 <그림1>과 같다.29)

 

 

그림 1 존재의 다층적 구조

 

합생2로 이행해 갔을 때 합생1에서의 a1,a2,a3는 더 이상 합생의 단위가 아니고 그 셋을 묶은 A(그리고 다른 경로를 통해 들어온 B,C)가 단위가 되고 있다.여기서 a1,a2,a3의 현실은 A의 현실과 다르다.A의 현실은 오히려 B,C와 공통으로 묶여 있다.합생과 전이의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차원의 현실이 계속 창조되고 있다.그렇다고 그 하위 차원의 현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궁극적 형이상학적 원리는 이접적으로 주어진 존재들과는 다른 또 하나의 새로운 존재를 창출해내는,離接(disjunction)에서 連接(conjunction)에로의 전진이다.이 새로운 존재는 그것이 찾아내는 '多者'의 共在性(togetherness)인 동시에,또한 그것이 뒤에 남겨놓은 이접적인 다자속의 '一者'이기도 하다.즉 그것은 그 자신이 조합하는 많은 존재 가운데 이접적으로 존재하게 되는 새로운 존재인 것이다.다자가 일자가 되며 그래서 다자는 하나만큼 증가된다.존재들은 그 본성상 접합적 통일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이접적인 다자인 것이다.30)

 

이것이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현실적 존재를 규정하고 있는 "궁극자"(the Ultimate)의 범주다. 얀치(E.Jantsch)는 생명의 진화에 대한 사색 과정에서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다.

 

거시세계와 미시세계가 공진화과정에서 분화하는 것은 이 단계에서 저 단계에로의 '도약'이 아니다.각 단계는 그대로 남아 한층 더 진화하기 때문에 진화과정들의 수준들은 각 수준만이 아니라 그 수준들의 위계적인 성층화과정(stratification)에서 그 수효와 복합성이 다같이 증가한다.그 수준들은 재편되기는 하지만 그 어느하나도 사라지지 않는다.31)

 

합생된 현실적 존재는 겹겹히 포개진 수많은 합생들의 산물이고 각 수준의 합생들은 합생의 과정에서 소멸하는 것이 아니고 각 수준에서 여전히 살아있다. 얀치는 비슷한 논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다수준적이고 역동적인 실재안에서는 새로운 수준 하나하나가 새로운 진화과정들을 작용하게 하고,그것이 상대적으로 낮은 계층수준들의 과정들을 특정한 방법으로 조정하고,강화한다.따라서 오직 한개의 수준으로 환원하기란 절대로 불가능하다.자기조직,특히 생명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수준들을 인정해야 할 뿐 아니라 그들간의 관계를 이해해야 한다.32)

 

이러한 논의들은 우리에게 그렇게 낯설게 들리지 않는다. 실재의 층들이 겹겹히 겹쳐 있고 각각이 각각의 세계를 구현하고 있는 重重無盡의 세계,그러면서 서로 상충하지 않는 "仍不雜亂隔別成"33)의 事事無碍의 華嚴의 세계가 바로 이런 것이기 때문이다.

 

 

 

4.1 화이트헤드는 관계의 존재론을 철저히 밀어부쳤지만 화엄적 입장에서 볼 때는 이것 조차도 불철저하다고 볼 수 있다.모든 것이 관계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라면 계의 포섭관계,시간의 이행관계 등도 철저히 상대적으로 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그러므로 큰 것이 작은 것을 포섭하는 것처럼 작은 것이 큰 것을 포섭할 수 있어야 하고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듯이 미래에서 과거로 흐를 수 있어야 할 것이다.그것이 아무리 기이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관계론의 논리적 귀결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 두 철학은 事의 구성방식에 있어서 상당한 공통점을 보여주고 있다.단순한 事는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事은 다자의 복합체이다.事의 분할을 계속해 나간다 하더라도 절대적 단순자를 만날 가능성은 없다.기계장치는 그 최종적 부속 까지 기계는 아니다.구태여 사를 기계에 비유한다면 그 부분까지 철저히 기계인 그런 기계이다.라이프니쯔는 기계의 비유를 사용해서 事가 기계일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생물의 유기적인 신체는 어느것이나 신적인 기계 또는 어떤 종류의 자연적인 자동기계라 할만 하며,이는 어떠한 인공적인 자동기계보다도 더 우월하다.왜냐하면 인간의 기술에 의하여 만들어진 기계라고 하는 것들은,그 부분 하나하나까지는 이미 기계가 아니다.이를테면 톱니바퀴의 톱니의 부분 또는 단편들은 우리로서 볼진대 벌써 인공적인 것이 아니며  톱니바퀴의 본래의 용도라는 점에서 보더라도 벌써 기계다운데는 조금도 없다.그러나 자연의 기계 곧 생물의 신체는 그것을 무한히 분할함으로써 아무리 작은 부분으로 만든다고 할지라도 역시 기계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이것이 자연과 인공,곧 신의 기술과 우리들의 그것과의 차이점이다.34)

 

이것은 부분 자체가 그자체로서 전체라는 事의 특징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앞서 홀론의 다른 표현이라고 하겠다.이런 통찰에서는 事에 대한 화엄의 관점과 화이트헤드의 관점이 다르지 않다.화이트헤드는 "다자라는 술어는 일자란 술어를 전제하며 일자란 술어는 다자란 술어를 전제한다."35)고 한다. 법장은 이것을 소상하게 풀이하고 있다.

 

문:이미 一이라고 말한 것이 어찌 一속에 十을 지닐 수가 있다는 말인가.

답:이른바 일이라는 것은 자성으로서의 일이 아니고 연을 이루기 때문이다.그런고로 일속에 십이 있다는 것은 이것이 연을 이루는 일인 것이다.만일 그렇지 않은 것이라면 자성이 있으므로 연기됨이 없을 것이며,일이라고 이름할 수가 없을 것이다.나아가 10이라는 것도 모두 자성의 십이 아니고 연을 이룸으로 인한 까닭으로 이 때문에 십속에 일을 지니는 것은 이것이 연을 이루는 자성이 없는 10인 것이다.만일 그렇지 않다면 자성인 것으로 연기를 이루지 않으니 십이라고 이름할 수가 없다.그런고로 모든 연기는 다 자성이 아닌 것이다.무슨 까닭인가 하면 하나의 연이 사라짐에 따라 바로 일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으로서 이런 이유로 一속에 바로 多를 갖춘 것을 그대로 연기의 一이라고 할 따름이다.36)

 

그러나 이 두입장간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첫째,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의 경우 다자에서 일자에로의 이행이라는 일방적 이행이 있을 뿐이며 일자에서 다자에로의 역행은 없다.다자는 일자에로 이행하는 순간 주체적 직접성을 상실하기 때문이다.이것은 비가역적 과정이며 새로움이 계속 생성되는 창조적 과정이다.그러므로 다자는 그 자신 합생이전의 일자로서 그것의 생성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자체 전체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자신을 포함한 더 큰 전체를 자신속에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반면 화엄철학의 경우 부분속에 자신을 포함한 전체가 들어오고 있다.(一中一切多中一) 그렇다면 일과 다,전체와 부분은 상대적인 관점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그러므로 부분이 그대로 전체이며 전체가 그대로 부분이다.(一卽一切多卽一)37)

둘째,시간적 상입의 경우인데 과거의 현재에로의 상입에는 두 입장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그러나 화엄철학은 미래의 현재에로의 상입 까지도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철저한 입장이다.그런데 이것이 성립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스티브 오딘(Steve Odin)은 화엄과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을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창조성의 과정이론에 의하면 그의 상대성은 항상 화엄불교가 설명하는 대칭적 상대성과는 반대되는 비대칭적 또는 일방적 상대성을 의미한다...인과관계에 의해 존재하게 되는 것은 과정구조에서는 항상 과거로 부터의 인과관계를 의미하는데 반해,화엄에서의 인과관계는 과거,현재,미래의 방향에서 동시에 작용한다.창조성의 원리에 의해 새로운 일자로 통일된 다자는 항상 공이나 연기의 개념과는 반대되는 것으로서 한 사건의 역사적 선행사건들을 의미한다...창조적 종합에 의해 성취된 우주적 공재성은 화엄의 총체적 공재성이 아니고,새로운 공재성이 한순간에 생성하는 것,즉 선행사건들이 현실태의 새로운 단위로 창발하는 공재성이다.사건들의 창조적 종합의 기능으로 특징짓는 양극적 융섭은,공에 의해 성립되는바의 주체와 대상,또는 일자와 다자와 같은 대립자들의 동시상호진입 또는 동시상호융섭이 아니고 다자가 일자로 또는 대상이 주체로 되는 누적적 진입 또는 누적적 융섭이다.38)

 

그래서 화엄철학의 상호상입의 대칭적 관점은 창조적 자유와 창발적 새로움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칭적 하위구조를 기초로 하여 전적으로 걸림없는 相入과 無碍한 互容을 주장하는 화엄불교의 이론이 완전한 존재론적 공재성,결합성과 연대성을 설명하고 있지만,이것이 창조성,새로움 및 자유를 모두 희생시킨다는 것이다.각 법은 인과적 관계와 지지적 조건들로 남김없이 철저히 분해되거나 환원되어 분석될 수 있다.명확히 말하자면 총체적 결정론은 각 法이란 단순히 그것을 이루는 다수의 원인들의 결과일 뿐 창의성,자유 또는 새로움이 없다는 견해를 수반한다.더구나 각 법은 단순히 그 원인으로 환원할 수 있는 결과이기 때문에 그것은 전적으로 自性 즉 실체나 고유한 자아가 없다...

화이트헤드의 창조적 진전과 일방향적 상대성의 학설도 각 사건은 수많은 원인과 조건들을 통해 매순간 현실태로 생성한다고 주장한다.그러나 화엄의 입장과는 달리 어떠한 사건도 인과관계로 환원되어 분해되거나 그 선행조건들로 남김없이 철저히 분석될 수 없다.그 까닭은 한 사건의 내용 모두는 인과적으로 계승되지만,적어도 계승될 수 없는 한 요인,즉 그들 모두에게는 하나의 통일된 경험의 生起속의 통일성이 있는바,이를 위해서는 창발적 종합이 요구되기 때문이다...화이트헤드의 과정이론에서는,한 생기의 자기창조성은 그 외의 어떤 것으로부터 파생되지 않는다...따라서 과정이론에 의하면,화엄의 대칭적 구조에서처럼 모든 사건들의 동일성 또는 상호동일성(相卽)은 없다.왜냐하면 각 생기는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창조적 종합이란 새로운 행위를 통해,그 자신을 형성하는 가운데 다른 모든 것을 포함하는 심오한 방식으로 그것들을 초월하는,환원불가한 자기존재를 지닌 새롭고 독특한 사건이기 때문이다.39)

 

스티브 오딘의 논의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전체가 부분속으로 진입해 들어올 때 그것이 온전히 그대로 진입되어 들어온다기 보다 그 전체가 개체의 주체적 형식에 맞도록 정보의 압축이 일어나기 때문이다.그런 의미에서 전체는 자기초월체로 여건화되는(영원적 객체와 함께) 변형을 통해서 개체속으로 진입한다.이런 측면에서 화엄의 논리는 소박해 보인다.그러나 이것은 보완의 문제이지 화엄의 근본원리를 붕괴시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공간적 상입 보다 시간적 상입의 문제이다.만일 오딘의 분석이 정확하다면 화엄은 정말 창조와 자유의 여지를 없애 버리게 된다.그러나 필자가 볼 때 오딘의 시간의 관점이 오히려 비화이트헤드적이지 않은가 생각한다.화이트헤드에 의하면 시간은 현존재와 함께 생성되는 것이지 현존재를 떠나서 존재하는 추상적 뉴턴적인 실체가 아니다.화엄의 관점도 다를 바가 없다.화엄의 전체논리로 보았을 때 미래의 상입은 어디까지나 방편적 개념(과거,현재,미래의 구분이 언어적 방편이다)으로 보아야한다.

결론적으로 화엄의 상입의 개념에는 화이트헤드적 관점에서 몇가지 보완할 것이 있다는 것은 수긍할 수 있지만 상입과 누적적 진입이 완전히 다른 의미라는 것은 수긍하기 어렵다.전체논리로 보았을 때 화엄에서의 "상입"은 "누적적 진입"의 의미이다. 물론 강조점은 약간 다르다.전자의 경우는 누적적 진입을 가능하도록 하는 자성버리기 즉 공화를 강조한 반면 후자는 누적적 진입이 만들어내는 새로움을 강조하고 있다.그러나 이것은 강조의 차이일 뿐 이 두 체계에 이 두 요소가 모두 들어있다.

 

 4.2. 물과 사물이 아무 거침없이 서로 융섭하는 단계를 화엄철학은 최고의 경지로 보며 이것을 "事事無碍"라고 한다.화엄종의 4대조사인 澄觀은 『華嚴法界玄鏡』에서 法界에는  事法界·理法界·理事無碍法界·事事無碍法界의 四法界가 있다고 한다. 事法界는 우주의 현상계, 理法界는 우주의 본체계, 理事無碍法界는 현상계와 본체계가 둘이 아닌 것, 事事無碍法界는 모든 현상 그자체가 相卽相入하여 거침없이 융섭하는 단계로 최고의 경지이다.

화엄에서는 이것을 相入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아래 세가지 특징으로 요약될 수 있다.40)

 

1)동시돈기(同時頓起)

2)동시호입(同時互入)

3)동시호섭(同時互攝)

 

모든 萬象은 일방적 인과적 생성이 아니라 동시에 발생하고 발현하며(동시돈기) 각각이   서로에 침투해 들어가 있으며(동시호입) 타자를 자신속에 포섭하고 있다.(동시호섭) 여기서 크기의 절대적 의미는 소멸한다.왜냐하면 티끌조차도 자신을 포함한 전 우주를 자신속에 포섭하고 있기 때문이다.이것은 사가 실체가 없는데서 오는 귀결이다.화엄의 4대 祖師인 澄觀은 십현문의 하나인 廣狹自在無碍門의 "廣大卽入於無門, 塵毛包納而無外"란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小는 곧 內가 없으니,內가 없는 까닭으로 中間이 없다.無外는 大를 말한다.大는 곧 밖이 없으니,밖이 없음으로 광대한 身刹이니,곧 內가 없는 塵毛로 들어간다.그러므로 廣狹無碍라 이름한다.卽하거나 入함에 모두 廣狹無碍함믈 얻는다.『晉經』에 이르기를 "金剛圍山의 수가 무량하나 모두 한 터럭 끝에 능히 안치할 수 있으니,지극히 큰 것이 작은 相에 있음을 알고자 하여 보살이 이런 까닭으로 처음으로 발심하였다."고 하였다.지극히 큰 것이 작은 相에 있음이 즉 廣狹無碍이다.또 이르기를 "능히 작은 세계로써 큰 세계를 만들고,큰 세계로써 작은 세계를 만든다."고 하였다.41)

 

법장은 "金獅子像"이란 그의 논서에서 이것의 의미를 금사자상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하나하나의 모든 티끌에 이르기 까지 사자의 각 눈과 귀와 수족 각각에 금사자가 있다.일체의 털에 의해 포용된 모든 사자는 동시에 그리고 즉시 하나의 털 속으로 들어간다.따라서 일체의 털 속에는 무한히 많은 사자들이 들어있다.42)

 

나아가 법장은 모든 티끌입자는 공간적 입장에서 상입하고 이로인해 시방이 하나의 원자속에 내재할 뿐 아니라 시간적 의미에서도 상호융섭하여 수백 수천의 무한한 영겁이 한 생각,한 찰나에 내재한다고 말한다.

 

티끌을 지각할 때 그것은 한순간 마음의 현현이다.한순간 마음의 현현은 수백 수천의 무한히 긴 시간과 완전히 같다....한 순간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그것은 무한히 긴 시간에 진입한다.그리고 시간들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한 순간속에 완전히 포함된다...따라서 한순간의 생각속에 3세(과거,현재,미래)의 모든 사실과 사물들이 분명하게 보인다.43)

 

이 금사자상은 사사무애법계를 설명하는 좋은 비유이기는 하지만 그 비유의 힘은 아주 제한적인 것으로 보인다.자신을 포함하는 전체를 어떻게 자신속에 압축할 수 있는가?사실은 전체와 부분이라는 것 자체가 사사무애법계를 설명하기 위한 일종의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전체와 부분은 상대적인 것이다.이것까지 포함하는 좀더 나은 비유는 징관이나 법장 등 화엄의 조사들이 가져온 거울의 비유이다.

법장은 금사장상의 비유에 이어서 같은곳에서 인다라망의 비유를 가져온다.인다라궁의 궁전은 그물로 덮혀 있고 각 그물의 눈마다 보석이 달려 있다.이 하나하나의 보석은 그 자신의 관점에서 망속의 다른 모든 보석을 반영하고 있다.각 보석속에 전체가 들어있는 것이다.그런점에서 그것은 전체이다.그러나 그것 역시 다른 보석의 관점에서 그 보석속에 들어있는 부분이다.이것은 상호반영과 重重無盡의 화엄의 통찰을 잘 보여주고 있는 압권이라고 하겠다.

징관은 거울의 비유를 통해 事事無碍法界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동일한 理의 전체를 포함하고 있는 개개의 事가 서로 구별을 유지하면서도, 서로 타자를 포함하고 타자에 포함되는 것을 말한다. 즉 一切가 一切를 포함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하나의 거울이 아홉개의 거울에 遍滿한 것과 같다. 또 아홉개의 거울을 攝受하여 하나의 거울 속으로 들어간다.....만일 하나의 거울이 많은 거울을 비출 때, 포용할 수 있는 하나의 거울은 오히려 포용되는 많은 거울의 영상 속에 두루 할 수 있다.44)

 

하나의 거울에는 다른 거울의 영상이 전부 들어있다. 거기에는 다른 거울에 비친 자기의 영상도 포함되어 있다. 각각의 다른 거울들도 마찬가지이다. 한마디로 一卽多, 多卽一이라고 할 수 있다. 華嚴思想에서 설하는 우주법계는 이렇게 부분이 전체를 포함하고, 다시 전체가 부분을 포함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즉 개개의 事와 事가 서로서로 무한히 상호작용을 하면서 重重無盡하게 전개되어 나가는 것이다.

이 거울의 비유는 금사자상의 비유에 비해 훨씬 사사무애법계에 대한 훨씬 근사한 모델로 보인다.우선 여기서는 전체가 부분속에 들어오는데 무리가 없다.그 이유는 이 비유에서는 전체와 부분의 개념이 해소되고 있기 때문이다.거울속에 자신을 포함한 세계가 반영되고 있지만 전체가 부분속으로 들어온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하지 않는다.그러면서도 전체가 부분속으로 들어오는듯한 거울상의 외양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전체가 부분속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아주 투박한 비유이며 좀더 근사한 비유는 각 事는 우주를 자신속에 반영하고 있다는 것일 것이다.이것이 거울의 비유이다.

그러나 필자가 볼 때는 이 비유에도 결정적인 취약점이 있다.자신이 자신을 반영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거울이 자신을 반영할수는 없기 때문이다.눈은 보는 기관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눈은 눈을 볼 수 없다.그러나 사사무애의 법계가 진정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자신을 포함한 우주가 자신속에 들어와 융섭한다는 것이다.그래서 눈이 눈을 볼 수 있어야 한다.이것이 실재의 진정한 실상이지만 이것은 럿셀이 잘 보여주었듯이 자기언급의 역설에 빠지고 만다.크레타사람이 "크레타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다"고 했을 때 자신 역시 크레타사람임으로 자신의 말도 거짓이고 크레타사람은 거짓말쟁이가 아닌 것이 된다.이것은 실재가 역설이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언어가 실재의 이 진상을 그리는 효과적인 도구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언어는 그것이 어떤 언어든 실체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이것 때문에 관계를 표현하는데 제한적이든지 아니면 자기관계 또는 자기언급과 같은 경우는 전적으로 무력하다.

<그림2>는 그 역설을 잘 보여준다. 화가는 화폭속에 그려놓고자 하는 것은 자신을 포함한 전 우주이다.그러나 화가가 전지전능한 능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자신만은 화폭안에 집어 넣을 수 없다.그것을 집어넣고자하는 가망없는 작업은 위 그림이 보여주듯이 무한퇴행에 빠진다.그러나 실재의 진정한 모습은 자신을 포함한 전체가 자신속에 반영되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다.45)

 



그림 2 무한퇴행

 

실재의 이 당혹스러운 모습은 우주의 비밀스러운 자기모습이며 이것은 고대로부터 인간에게는 우주의 경이스러운 모습이었다.다음 <그림3>을 보자.

 




그림 3 우로보로스

 

우로보로스(Ouroboros)는 연금술사의 생명의 상징으로서 뱀이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형상이다. 뱀이 자신의 꼬리부터 먹어들어가고 있다고 하자.뱀은 자신을 완전히 먹어치울 수 있을까?그럴 수는 없다.다먹기 전에 아마 죽고 말 것이라는 그러한 사실상의 문제를 논외로 하더라도 불가능하다.이것은 논리적 문제인 바 결국 자신의 입이 자신의 입을 먹어야하는 역설에 빠지기 때문이다.이것은 눈으로 눈을 볼 수 없는 역설이고 화가가 화가자신을 포함한 세계를 그려낼 수 없는 바로 그 역설 때문이다.그러나 생명의 실상은 이러한 역설들로 가득차 있다.자신이 자신을 포함한 세계를 자신속에 포함하는 것은 역설이기는 하지만 자연의 사실이다.

그러나 자연에는 이것이 가능하며 이것이 바로 事事無碍의 세계이다. 이러한 역설적 사실은 예술가들을 매료시켜 왔는바 그 대표적 화가가 에셔(Escher)이다.이 곤혹이 에셔의 일생을 관통해온 화두였으며 우리가 이 에셔의 그림에 매료되는 것은 이 곤혹을 예술가적 날카로움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그것을 구상화하고 있다는 점이다.그는 역설적 방식을 통해서 그릴 수 없는 것을 그려내고 있다.

<그림4>는 <그림2>의 화가의 역설을 좀더 예리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한 청년이 화랑안에서 어떤 그림을 감상하고 있다.그런데 그 그림이란 다름아닌 청년이 화랑안에서 그림을 감상하고 있는 모습이다.이 청년이 그림안에 있다고 생각하면 그림 밖으로 나와있고 그림 밖으로 나와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림 안에 들어가 있다.그림의 중심에 보이는 빈공간은 이 안팎이 서로 꼬이면서 소용돌이치는 그래서 표현불가능한 그 중심이다.46)이 이상한 그림은 놀랍게도 우리의 존재의 모습이다.바로 안팎이 아무런 걸림없이 교차하면서 부분이 전체속으로 들어오고 다시 전체가 부분속으로 들어가는 사사무애의 세계의 구상적 표현이다.

 


그림 4 에셔의 "화랑"

 

<그림4>는 相入의 진정한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진정한 상입은 자신을 포함한 우주가 자신속으로 들어오는 것이다.자신을 제외한 우주가 자신속으로 들어온다면 그 계는 결정론적 계가 될 것이다.그러나 자신이 자신속으로 되먹여쳐 들어오는 상입이 일어날 때 그 계는 비결정론적 양상을 만들어 낸다.화엄과 禪佛敎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역설은 여기서 오는 것이므로 이것을 지엽적인 문제로 치부할 수 없다.47)그것은 오히려 상입의 본질적 특성이다.자신을 포함한 전체계가 자신에 영향을 줄 때 이것은 線形的 인과가 아니라 非線型的 인과를 보이는데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緣起的 인과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이것은 오늘날 카오스이론으로 알려져 있는 것이다.이것을 통해 화엄의 연기적 인과를 재구성해 보고자 한다.

 

4.3 부분과 전체가 상호 되먹임으로 작용할 때 나타나는 뚜렷한 현상이 그것의 비결정성이다. 이것을 수학에서 '非線型'이라 하는데 상호되먹임은 이러한 비선형성을 낳는다. 선형이란 두 양 사이의 정비례 관계에 기초하여,그래프에서 직선으로 나타낼 수있는 모든 종류의 거동을 나타내는 수학용어이다. 선형적 계의 작용은 계를 이루고 있는 각 부분들의 거동의 합으로 나타낼 수있지만 ,비선형적 계의 거동은 이러한 합 이상의 것이다. 선형계와 비선형계의 차이는 보통 가정에서 사용하는 팬 히터와 원자폭탄을 비교하여 쉽게 설명할 수있다. 팬 히터 2개를 사용하면 2배의 열을 얻을 수있고,3개를 사용하면 3배의 열을 얻을 수있다. 이와같은 양상은 열의 양과 히터 사이의 선형적 관계를 나타내 준다. 원자폭탄의 경우 연쇄반응을 일으키고 이것이 다시 열발생을 증폭시킴으로써 더욱 폭발적인 연쇄반응을 유도한다. 이것을 '양(陽)의 되먹임'(positive feedback)이라 하는데 전형적인 비선형성을 보여주고 있다.(주53의 도식을 보라)

가장 간단한 예로 페어홀스트(P.F.Verhulst)의 식 -통상 로지스틱 사상(logistic map)이라 부른다- 의 경우를 보자.

 

  Xn+1 = B Xn(1-Xn)

 

 간단한 직관상을 얻기 위해서 B를 2로 두고 계산해 보자.

  

 Xn+1 = 2(Xn - Xn × Xn)   

 

 Xn이 두번 곱해져 있다. 여기서 패턴의 반복을 찾아낼 수있을까? 숫자의 길이에 따라 주기가 길어지는데, Xn(n=1)이 0.707070일 경우 다음 반복에서 2 × (0.707070 - 0.707070 ×0.707070)이 되어 소숫점 이하 10자리,다음 반복에서는 20자리,40자리로 등비급수적으로 불어나갈 것이다. 여기서 새로운 패턴이 시작되는 주기를 찾아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여기서 예측불가능한 비결정론적 세계가 나타난다.

 이 식은 1845년 페어홀스트가 인구증가를 수학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도입한 식이다. 수효증가를 나타내는 방정식을 비선형으로 만든 그의 개념은 인구증가의 과정을 아주 간략하고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Xn=1은 개체수의 가능한 최대수,즉 100%를 나타내고,Xn+1=0.5는 그것의 절반 50%를 나타낸다. 이 식의 의미를 수치를 넣어 구체적으로 검토해 보자.

 여기서 x의 값은 식 전체의 형태에 본질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다. 처음에는 x의 값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반복의 횟수를 늘이면 똑같은 형태를 보여준다. 예컨대 x=0.9와 x=0.02이고,r=1.5일 경우를 비교해 보자. x=0.9일 경우 0.9,0.135,0.1751,0.2167(소숫점 4자리 까지만 나타내겠다)...로 변하다가 25회 반복 후 26회째(n=26) 0.3333으로 수렴한다. x=0.02는 0.02,0.294,0.0428...로 변하다가 30회째 0.3333으로 수렴해서 x=0.9일 경우와 같아진다. 이것은 수식의 형태로 보아 예측될 수있는데 x값이 증대하면 (1-x)값은 감소하도록 되어있어 그 곱은 두 값의 크기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편의상 x를 0.9로 두고(x=0.9),r의 값의 변화에 따른 x(1-x)의 변화를 추적해 보자.48) r=2.3일 경우 9회째 0.5652(약 57%)에 정착하고 그 이후의 반복계산에서는 더 이상의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r=2.4일 경우 10회째 0.5833에 정착한다. r을 높이면 이 값은 점점 높아져 r=2.5일 경우 25회째 0.6(60%)에 고정된다. r=2.98일 경우 처음에는 일정한 수렴을 보이지 않고 불규칙적으로 변화하다가 354회째에 0.6644에 고정된다. 결론적으로 r이 2이하일 경우 특정값에 수렴되는 일정한 규칙성을 보인다.그러나 r=3일 경우 새로운 현상이 나타난다. 0.6644에 있던 끌개(attractor)가 불안정해져서 불규칙적인 값을 산출하다가 1683회 반복후 0.6723과 0.6609의 두개의 끌개로 나뉘고, 그 이후는 이 두 값 사이를 교대로 진동한다. r=3.2가 되면 21회째 부터 0.5130,0.7994 사이를 진동한다. 이것을 '갈래질' 또는 '분지'(分枝;bifurcation)라고 하는데 여기서 두개의 가지가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r=3.5로 높이면 이 두 값이 다시 불안정해지면서 불규칙적 양상을 보이다가 31회째 부터 0.8749,0.3828,0.8269,0.5008사이를 진동하는 4개의 새로운 갈래질이 발생한다. 이것이 3.56에 이르면 또다시 불안정해져서 8개의 갈래질이, 3.567에서 16개의 갈래질이 발생하고,뒤이어 32,64,128...의 갈래질이 나타나는 소위 '주기배증'(週期倍增;period-doubling)이 가속되다가 3.58 부근에서 갈래질은 무한대가 된다. 이것이 바로 혼돈상태(chaos)이다.

 이것을 rx간의 관계가 아니고,XnXn+1간의 관계로 나타내면 r값에 따른 소멸,수렴,혼돈의 관계를 잘 보일 수있는데 다음 도표는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그림5)  여기서 각각의 y값(즉 Xn+1)은 새로운 입력치로서 다시 x값에 재입력되기 때문에 그 궤적은 45도의 직선 즉 y=x의 직선상에서 반사된다. 이 그림은 소멸,수렴,혼돈이 포물선의 가파른 정도(즉 r값의 크기)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봉우리가 너무 낮은 함수(그림a,r=0.8)는 x의 초기값이 얼마이든 간에 결국 소멸되어 간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파란 정도를 증대시키면 안정된 일정한 점으로 수렴해 간다.(그림b,r=2.5) r이 어떤 값을 넘어서면 두 갈래질 사이를 진동한다.(그림c,r=3.1) 그리고 갈래질이 계속되다가 마침내 궤적은 일정한 진동을 보여주지 않는 카오스의 상태로 변한다.(그림d,r=3.8)

 




그림 5
Xn=rXn(1-X)의 그래프

   

 이 식의 의미를 좀더 자세히 검토해 보기위해서 이것을 rx의 그래프로 그려 보면 다음과 같다.49)

 



그림 6 r대 X의 그래프

 

<그림6>에서 점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검은 부분은 한 계가 발견될 수있는 상태가 무한대임을 나타낸다. 이것은 전혀 예측할 수없는 혼돈의 상태임을 의미한다. 결정론적 계라 하더라도 자기되먹임의 과정은 비결정론적인 혼돈적 거동을 만들어낸다. 과거의 사건이 미래의 사건에 영향을 주지만 이것은 선형적 인과가 아니고 비선형적 인과 말하자면 "연기적 인과"이다.

 

4.4 데이비드 봄(David Bohm)이 보는 입장도 바로 이것이다.비물질적 "형태형성장"(morphogenetic field)50)의 가능성을 주장한 쉘드레이크와의 대화에서 봄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현재의 형태와 과거의 형태와의 관계는 사실 시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시간의 전체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시간을 초월해서 모든 것을 내함하고 있는 총체성의 관점에서 보면 현재의 시점에서 생성되고 있는 것-나의 용어로 펼침unfoldment-은 일자(whole)의 유출이다.즉 일자의 어떤 양상이 어떤 순간에 펼쳐진 것이다..

각 계기는 그것의 선행계기와 닮았다.그러면서도 그것과는 다르다.나는 이것을 "방출"(projection)과 "유입"(injec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설명해 왔다.각 계기는 일자의 방출이다.다음 그것은 다시 일자속으로 유입된다.다음 계기는 이 유입의 재유출이고 이것은 무한히 계속된다.51)

 

필자가 볼 때 봄의 방출과 유입은 상입(interpenetration)의 다른 표현으로 보인다.상입을 능동적 작용에서 보면 방출이고 수동적 작용에서 보면 유입이기 때문이다.화엄의 입장에서 보면 방출과 유입은 관점을 달리한 동일한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봄에서 선행사건이 후행사건에 직접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선행사건은 일단 일자속으로 유입된 다음 후행사건으로 방출됨으로서 영향을 행사한다.그러므로 전체(일자)와 매개된 부분이 부분속으로 유입되어 들어오는 것이다.이 가운데 본질적인 것은 자기자신이 일단 일자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자기자신으로 유입되어 들어온다는 점이다.이것은 기본적으로는 로지스틱 맵에서 일어나는 작용과 다르지 않다.데이비드 봄의 견해에 대한 편집자의 해석은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다.

 

그 간단한 비유로 바다와 파도간의 관계를 들 수 있다.파도는 바다 전체에서 방출되어진다.그 다음 그것은 다시 전체속으로 되돌아간다.그것이 다음 파도를 일으킨다.후행파도에 가해지는  선행파도에 의해 영향은 그것을 포함한 바다 전체이다.여기에는 인과적 연관이 있다.그러나 파도a가 파도b에 주는 영향은 "선형적" 인 것이 아니다.파도a는 바다 전체속에 도로 흡수되는 방식으로 파도b에 영향을 준다.봄의 용어로 말하면 파도a의 유입의 재방출이다...봄도 어떤 유형의 "인과성"의 작용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함축적 바다의 총체성에 의해서 매개되어진 인과"(one that is mediated via the totality of the implicate ocean)이다.그것은 분리되고 고립된 "외연적 파도"(explicate wave)들간의 인과와는 다르다.52)

 

상입 또는 누적적 진입이 만들어내는 인과는 선형적 기계적 인과가 아니고 비선형적 연기적 인과이다.53)

 

 

앞서의 로지스틱맵을 다른 관점에서 살펴보자.<그림6>에서 수직으로 나타나는  흰 띠들을 볼 수있을 것이다. 이것은 혼돈속에 간헐적으로 출현하는 규칙성을 나타내고 있다. 예컨대 r=3.835에서 50회 정도의 반복계산 동안 예상대로 혼돈의 양상을 보이다가 57회째 갑자기 0.5120,0.4945,0.5863이 차례로 반복되는 셋갈래질의 질서가 출현한다. 그리고 r=3.739에서 혼돈 후에 119회째 갑자기 0.8411,0.4996,0.9347,0.2280,0.6582이 차례로 반복되는 다섯 갈래질의 질서가 출현한다. 혼돈속에 존재하는 이러한 질서를 '간헐성'(intermittency)이라 한다. 이 간헐성은 혼돈속에서 새로운 질서가 자발적으로 생성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위해서 다음 <그림7>을 보자.

 




그림 7 혼돈속의 질서

 

혼돈의 가장자리에서 돌연한 질서가 출현한다.54) 혼돈에 후속하는 질서는 혼돈이전의 질서와는 다르다.전자를 단순한 질서,후자를 "복잡성의 질서"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이 복잡성의 질서를 확대하면 우리는 놀랍게도 자신을 포함한 전 계가 자신속에 상입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이 복잡성의 질서는 단순한 질서-기계적 질서-의 형태를 시늉내고 있다.즉 그것은 常住하는 법칙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그래서 우리는 이 질서를 단순한 질서와 혼동한다.그러나 라이프니쯔가 옳게 통찰했듯이 그것은 기계적 질서로 치환할 수 없는 특성을 갖고 있다.그것이 기계라면 그 부분 조차도 기계인 그런 기계이다.

창조적 진화가 일어나는 것은 무자성속의 자성,혼돈속의 질서를 具有하고 있는 존재에서이다.그것은 전체계를 자신속에 내포하고 있다.복잡한 질서는 혼돈위에 세워져 있다. 그래서 그 혼돈을 또한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혼돈속에 질서를 구현하는 방법은 방대한 정보를 압축하는 방법이고 그것이 우리가 앞서 본 것과 같은 界속에 界,또 界속에 界의 重重無盡의 界를 누적시켜가는 방법을 통해서이다.이것이 화이트헤드의 누적적 진입을 통한 창조적 진화이다.그것은 동시에 끊임없이 자신을 해체시켜가는 과정,즉 空化의 과정이기도 하다.혼돈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 창조적 진화는 없다.55)화이트헤드가 전자를 강조했다면 화엄의 祖師들은 후자를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생명이 무엇인가에 대한 동일한 통찰들이다.우리는 생명과 존재에 대한 이 심오한 통찰위에 근대 기계론적 생명관이 야기시킨 해독을 씻어내고 새로운 생명관을 세우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이것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문명의 절박한 요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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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R.Westfall,Force in Newton's Physics(N.Y:American Elsevier,1971),p.285

2) 같은 책,p.298

3) 같은 책,p.287

4) 라이프니쯔,『라이프니쯔와 단자형이상학』,정종 옮김(원광대 출판국,1984),29쪽,§66,67

5) 法藏,『華嚴學體系(華嚴五敎章)』,金無碍 譯註(우리출판사,1998),411면서 재인용.

6) 龍樹,『中論』,김성철 역주(경서원,1996),411쪽,역주25.

7) A.N.Whitehead,『과정과 실재』,오영환 역(민음사,1991),77면.

8) 같은책,78면

9) 같은책,387면

10) 새용어를 하나 제안하고자 하는데 결합체나 사회의 "합생"에 合宮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어떨까 한다.이것은 여럿 自己(宮,selves)를 통합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 뉘앙스에도 어울리는 것 같다.거꾸로 읽으면 宮合이 되는데 그럼으로써 화이트헤드의 긍정적 파악과 부정적 파악에 해당하는 동적인 뉘앙스까지 포함할 수 있다.

11) Whitehead,앞의 책,389면 이하 참조.

12) 여기에 대한 상세한 해석은 문창옥,"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과 명제이론"(연세대,박사학위논문,1994) 3장 참조.

13) 졸고,"프랙탈?관계?생명"(『오늘의 문예비평』,97.가을),155-170면 참조.

14) .Whitehead,앞의 책,313면

15) 같은 책,406면.

16) 같은책,91면

17) 같은책,80면

18) 같은책,81면

19) 비트겐슈타인은 "주체는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그것은 세계의 한계이다"고 말하고 있는데 동일한 통찰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L.Wittgenstein,Tractatus Logico-philosophicus(London:RKP,1971),p.117(5.632)

20) 『中論』,257면

21) 같은책,258면

22) 존재에 대한 단순한 부정개념으로서의 무와 공은 다르다.공은 공인 사물로 표상한다는 입장마저 공하다고 여긴다.그래야만 비로소 공이 된다.그것은 공이 단순히 유밖에 있는 유와 별도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와 하나인 자기동일체로서 지각된다는 뜻이다.

有卽無니 色卽是空이니 하는 말은 한편에는 유를 두고 다른 편에 무를 두어 나중에 그들을 연결시키는 것이 아니다.대승불교의 맥락에서 볼 때 논리적 분석을 통해 도출되는 중심원칙은 "유즉무"라는 비논리의 논리이다.유즉무란 오히려 "卽"에 서서 "卽"에서 유를 유로,"무"를 "무"로서 본다는 의미이다.물론 우리는 통상 유를 유만으로 보며,유에 얽매여 있다.따라서 그러한 견해가 부정되면 거기에 허무가 나타난다.그러나 그 허무의 입장은 또 무를 단지 무만으로 보며 무에 얽매인 입장이다.즉 다시 부정될 수 밖에 없는 입장이다.따라서 그러한 이중의 얽매임을 이탈한 완전한 무집착의 "공"이 나오는 것이다.

니시타니 게이지,『종교란 무엇인가』 ,정병조 옮김(대원정사,1993),151면      

23) 『中論』,232면. 바로 다음에 "만일 모든 존재에 자성이 없다면 어떻게 변화가 있겠는가?(若諸法無性 云何異有異)"라는 구절이 이어진다.

이것은 앞 구절과 상호모순되는 주장임을 알 수 있다.앞에서는 자성이 없기 때문에 변화가 가능하다고 주장한 다음 곧이어서 자성이 있기 때문에 변화가 가능하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있음의 없음,없음의 있음을 드러내기위한 중론 특유의 방편적 언명이다.있다고 해도 안되고 없다고 해도 안되는 것이다.우선 없음에 주목한다면 그것은 "아니다"라고 부정될 것이다.그러나 그것은 무는 아니므로 "이다"로 긍정되어야 할 것이다.있음에 주목한다면 그것은 "이다"로 긍정될 것이다.그러나 그것은 상주하는 유가 아니므로 다시 "아니다"로 부정될 수 밖에 없다.분별하는 언어로는 없음의 있음,있음의 없음이라는 이 사태의 실상을 표현하는 것이 애당초 가능하지 않다. 그러므로 그 두 명제를 동시에 긍정하면서(또는 동시에 부정하면서) 그것을 모순속에 병치하는 것이다.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그 명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두 명제가 모순속에 충돌하는 그 행간 사이에 있다.충돌속에 의미는 저절로 드러난다.

24) 같은책,230면.

25) Whitehead,앞의 책,313면

26) 같은책,92면

27) A.Kostler,『야누스』,최효선 옮김(범양사,1993), 40-41면

28) E.Jantsch,『자기조직하는 우주』,홍동선 옮김(범양사,1989),311-312면 참조.

29).이것은 다음 도표를 참조해서 재구성했다.N.A.Bass,"Emergency,Hierarchies,and Hyperstructure",C.Langton(ed),Artificial LifeⅢ,(Addison-Wesley,1994),p.524.

30).Whitehead,앞의 책,78-79면

31).Jantsch,앞의책,,328면.

32).같은책,332면.

33) 義湘大師 法性偈

34) Leibniz,앞의 책,28면 §64

35) Whitehead,앞의책,78면

36) 法藏,『華嚴學體系』,379면

37) 義湘大師 法性偈

38) Steve Odin,『과정형이상학과 화엄불교』,안형관 옮김(이문출판사,2000),166-167면

39) 같은책,174-177

40) Garma C.C.Chang,『화엄철학』,이찬수 옮김(경서원,1989),2장 참조

41) 澄觀,『華嚴經玄談1』,불전국역연구원 공역(중앙승가대 출판부,2000),170면

42) 스티브 오딘,앞의 책,70-71면서 재인용.

43) 같은책,80-81면서 재인용.

44) 이승렬,"선불교에서 거울의 상징의미",동국대 대학원,28면서 재인용.

45) W.Dunne,The Serial Universe,(Farb&farb,1930),p.28

46) D.R.Hofstadter,『괴델,에셔,바흐』,박여성 옮김(까치,1999),919-923참조.

47)앞의 책 『괴델,에셔,바흐』는 여기에 대한 아주 자극적이고 통찰력있는 사례와 논의들을 제시하고 있다.

48) 반복계산에 지나지 않으므로 간단한 BASIC프로그램으로 실행해 볼 수 있다.

 

 10 INPUT R

 20 X = 0.9

 30 N = 1

 40 PRINT N,X;

 50 N = N+1

 60 X = R*X*(1-X)

 60 PRINT  N,X;

 70 GOTO 50

 80 END

49) 이것을 실행하는 소프트웨어는 필자의 홈페이지에서 다운받을 수 있다.초기화면에서 download 로 들어가  fractal_practice.zip을 다운받은 다음 logistic map을 실행.여기에는 이외에 프랙탈과 카오스에 연관된 여러 가지 프로그램들이 들어있다.(http://chaos.inje.ac.kr/Alife)

50) R.Sheldrake,A New Science of Life(Park Street Press,1995)  과거의 형태가 미래의 형태에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영향을 미친다는 쉘드레이크의 비국소적 형태형성장도 이 영향이라는 것이 기계적,선형적 인과가 아니고 비선형적,연기적 인과이다.인과를 전자의 관점에서만 생각하는 입장들의 쉘드레이크에 대한 비판은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51) 봄과 쉘드레이크간의 대화,같은 책,236-237;봄의 철학에 대해서는 『현대물리학의 철학적 테두리』,전일동 옮김(민음사,1991), Science,order,and creativity(Bantam Book,1987) 참조.

52) 같은 책,p.237

53) 연기적 인과를 설명하기 위해 법장은 금사자상과 인다라망의 비유를 사용하고 있다.전자와 유사한 것이 라이프니쯔의 모나드,데이비드 봄의 "함축된 질서"라면 후자의 비유에 유사한 것이 카우프만(S.Kauffman)의 "연결망"이다.그러나 이 둘은 다른 것이 아니라 연기적 인과를 설명하기 위한 두가지 다른 방편이다.카우프만의 연결망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필자의 "카우프만의 신의 마음",『과학철학』,2권2호,1999참조.

카우프만은 생명의 질서의 근거가 "자기촉매적 과정"(autocatalytic process)에 있다고 본다.자기촉매란 a가 b를 만들고 b가 c를 만들고 c가 다시 a를 만드는 그런식으로 자기되먹임적 가속반응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이것은 자기의 산물이 자기를 만드는 자기되먹임으로 문자 그대로 相入이다 .카우프만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도식화 시키고 있다.

 

 

A와 B가 결합하여 각 BA와 AB를 만든다.이 AB는 다시 B와 A의 결합에 촉매로 작용하여 BA를 만들고 BA는 다시 A와 B에 촉매로 작용하여 AB를 만든다.일단 자기되먹임 과정이 작용하면 A,B의 재료가 공급되는 한 AB와 BA는 내적 원리에 따라 자기생산한다.카우프만은 이 과정이 생물체의 세포분화의 과정에,또 효소의 합성과정에도 작용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S.Kauffman, At Home in the Universe(Oxford Univ.Press,1995),p.49

54) 카우프만은 이 돌연한 질서가 성립하기 위한 특정 조건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이 경우 전체와 부분의 복잡한 상호작용이 수반하는데 이것은 화이트헤드의 합생의 과정에 비유될 수 있다.그 특정조건에 대해서는 필자의  "카우프만의 신의 마음",『과학철학』,2권2호,1999 참조.

55) 조용현,"창조,그 넌센스의 가장자리",과학문화센터 하계세미나 발표문 참조,20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