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과학,유토피아,디스토피아

철없는 문명 속에서 철학하기



1. 사라진 계절, 철없는 과일

현대 문명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계절과 밤낮의 구분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생명은 계절의 주기에 민감하다. 한낱 땡볕에 무성하던 신록도 가을이면 겨울을 대비해 잎을 떨어뜨린다. 가을이 오면 벌레들은 다음 세대를 기약하며 땅속에 알을 낳고 죽는다. 인간은 계절을 모른다. 무더운 여름은 차가운 에어컨의 냉기 속에서 겨울처럼 살고 추운 겨울에는 난방된 실내에서 런닝셔츠 차림으로 여름처럼 산다.

동물은 해가 떠면 일어나고 해가지면 잠자리를 찾아 든다.(물론 야행성 동물은 그 반대주기를 따른다.) 휘황한 조명아래 밤이 사라져 버렸다. 요즈음 대형마켓은 밤이 되면 쇼핑하러 온 손님들로 더 붐빈다고 한다.

『황제내경』(黃帝內徑)에 사계절의 변화에 따른 인간생활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다. 그 요점은 봄,여름에는 활동을 많이 하고 가을,겨울에는 활동을 적게 하여, 천지(天地)의 음양(陰陽)에 생활을 맞추라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현대인의 살아가는 양태를 보면 걱정되는 점이 많다. 겨울에도 여름과 똑같이 활동하고, 밤에도 낮과 같이 사는 사람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모든 운동을 살펴보면 수축된 후에야 팽창할 수 있다. 그처럼 사람도 겨울에 충분히 수축해야 여름에 힘차게 팽창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즈음 사람들처럼 겨울에 활동을 많이하면 여름에 팽창하기 위한 수축을 할 수 없게 된다. 열대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체력이 약한 것은 바로 음기로 수축할 기회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밤에 잠을 자지 않는 것도 똑같이 문제다. 혹 대신 낮잠을 자면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낮잠을 자면 비록 육체는 잠들지 모르지만, 몸 깊은 곳에 있는 정기(精氣)까지 잠들지 못한다. 그러므로 잠은 반드시 밤에 자야 하는 것이다. 물론 낮잠을 자는 것만으로도 살도 찌고, 피도 생길 수가 있다. 그러나 스스로 조절하고 통제하는 근원적인 기(氣)는 우주의 기와 함께 움직이기 때문에 낮에는 잠을 자지 못한다.(박찬국,『한의학 특강』,집문당,152-153면)

우리의 몸은 세월의 흐름도 속일려고 한다. 왕성한 젊음의 열정이 있으면 조락해가는 늙음의 관조도 있다. 그러나 요즈음 '늙은 젊은이'가 유행이다. 장수의 비결을 찾아 늙은 젊은이로 꽉 채우겠다는 것이 현대의학의 주요 관심사이다. 오늘의 우리의 정치는 도무지 늙을 줄 모르는 '불멸'의 청춘들이 좌지우지하고 있다. 은퇴는 꼭 기력이 쇠했기 때문은 아니다. 조병화 시인의 시 '의자'에서처럼 다음 세대에 길을 터 주기 위한 것이다.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 드리지요.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어요.

먼 옛날 어느 분이
내게 물려주듯이.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습니다.

                                     조병화,『시간의 宿所를 더듬어서』,(1964)




이것이 자연의 이법이고 자연이 자신을 건강히 되살려내는 방법이다. 인간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계절이 사라진 것의 대표적인 것은 우리들의 먹거리이다. 봄에는 풋풋한 생명력을 토하고 있는 달래, 냉이, 쑥 등으로 겨우내 무기력해진 생명력을 보한다. 여름은 과일과 채소의 계절이다. 포도,복숭아,딸기,수박,참외,토마토를 먹고 가을에는 햇곡과 사과, 배, 감, 대추 등의 과일을 먹는다. 이것들을 우리는 '제철과일'이라고 한다.

그런데 지금 과일에는 계절이 없다. 겨울에도 슈퍼의 매장에 가면 수박이나 참외를 사서 먹을 수 있다. 이것은 물론 노지에서 재배된 것이 아니고 하우스에서 재배된 것이다.하우스 재배가 늘어난 것은 자연재해 등을 우려해 농민들이 갈수록 노지재배를 꺼리는데다 도매상들도 안정적인 물량확보를 위해 하우스 재배를 권장하기 때문이다. 농산물이 점차 공산품을 닮아가면서 제철과일을 먹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제철의 과일을 먹으라고 한다. 나는 그것이 하우스 재배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구체적으로는 모르지만 상식적으로도 그것이 땅과 계절의 왕성한 정기를 뽑아서 자란 제철의 노지의 과일과 같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일단 그 향기와 맛이 다르지 않은가? 이래저래 ‘철없는’ 과일들이 대세를 이루면서 우리는 자연의 미각을 점점 상실해 가고 있다.


 2. 철의 2가지 의미


우리말에 '철'은 2가지 의미가 있다. 국어사전을 찾아 보자.

철1 ① 일정한 특징의 기후를 나타내는,봄이나 가을이나 겨울과 같은 때. 계절
/이 지난 옷/따라 피는 꽃/이 바뀌다/이 이르다.

② 일년중 어떤 일을 하기에 알맞거나 어떤 일이나 현상이 으레 이루어지는 일정한 때
김장/농사/모내기/장마/요즈음은 장사가 잘 안되는 이다.

철2 사람이 나이가 들면서 세상사는 이치나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깨닫게 되는 상태. 또는,세상 이치나 사람의 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정신적 능력. 지각. 분별
 철이 나다/이 들다/아직 이 없는 아이.

철1의 의미에서 철2의 의미가 파생되어 나왔다면 이것의 의미는 분명해 보인다. 우리조상들은 자연의 이법이 바로 우리가 지켜나가야할 인간의 규범으로 보았던 것이다. 인간이 가진 분별력은 다름 아닌 자연의 철을 알고 거기에 순응하는 것이다. 분별력이 없다는 것은 '철'(철2)이 없는 것이고 이것은 자연의 '철'(철1)을 모르는 것이다.

이것을 영어와 비교해 보면 차이를 잘 알 수 있다. 영어에는 이 두 의미에 대응하는 단어가 하나가 아니고 각각 다르다. 우선 철1에 해당하는 단어는 문자 그대로 계절을 의미하는 season일 것이다. 그래서 제철과일은 seasonable fruit (fruit in season)이고 그 반대는 unseasonable fruit (fruit out of season)이 될 것이다. 이것은 “계절에 맞지 않는”,“시기가 좋지 않는” 등의 뜻이다. 말하자면 영어의 season에는 철1의 의미 밖에 없다.

“철없는 행동”을 unseasonable behavior로 번역하면 아주 어색할 것이다. 그것은 분별없는 행동을 의미하므로 indiscrete behavior(또는 thoughtless behavior)로 번역해야 본 뜻에 가까울 것이다. “철이 들었다.”고 했을 때 이 말은 타자와의 연관성 속에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비추어 볼 수 있는 눈-반성력reflection-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이다. 우리말로 “시건”이 든 것이다. 이것은 have a discretion으로 discretion이 철2의 의미와 부합한다. 그것은 season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말하자면 우리는 자연과 인간의 길(道)를 하나로 본데 대해서 서양-적어도 근대의 서구의 주류사상-은 그 둘을 무관한 둘로 본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차이를 낳는데 예컨대 인간의 복제는 자연이 취하는 길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동시에 우리 인간에게도 취해야할 길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서양의 입장에서 볼 때 자연의 도-차라리 자연법칙이라고 불러야 겠지만-와 인간의 도(윤리학)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season과 discretion 만큼이나 다르다. 과학자는 말하자면 season(사실)에만 관여할 뿐 discretion(가치)은 그들의 관여사항이 아니다. 그들은 과학기술이 사회에 던지는 파문과 폐해는 과학기술 자체에 있다기 보다 인간이 그것을 악용한데서 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정신이 원자폭탄을 죄책감없이 만들게 했으며 유전자 조작을 서슴없이 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 이원론은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사실에 대한 지식욕에 불탄 파우스트 박사는 그것을 준다면 메피스토펠레스에게 혼을 내 주어도 상관없다고 한다. 말하자면 season을 준다면 discretion은 아무렇게나 되어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둘이지만 하나인 '철'의 철학에서 볼 때 이미 계약과 더불어 그의 혼은 악마에게 넘어간 것이다. 그 둘은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3.철없는 문명

이 둘이 분리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파우스트 박사는 철을 추구함으로써 철(season)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철(discretion)이 박탈되었음으로 진정한 철을 알았다고 할 수 없다. 마지막 장면에서 신이 구원해 주리라는 괴테의 귀결도 철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구 난장판짓을 해 놓은 다음 신이 사태를 수습해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철없는 재벌 2세의 망나니질 처럼 보인다. 그것을 서구문명이 희망했다면 철이 없어도 너무 없다. 나는 신이 그런 식으로 구원의 손을 뻗어 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신이 야훼든 알라든 미륵불이든 한울님이든..

철이 없다는 것은 과학기술 문명의 효율성의 비결이기도 하다. 그들은 자연을 교묘히 조종함으로써 자연이 가하는 구속에서 해방되기를 원했다. 그것이 모두가 지켜야 하고 또 지키고 있는 구속인 만큼 그것을 어길 수 있다면 엄청난 이득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이익에 지나지 않는다. 그 이익은 곧 밑천을 드러낼 것이다. 더군다나 그 빚은 그것을 빌린 사람의 몫이 아니라 전체가 갚아야 한다. 공적 자금 비슷한 것이다. 어떤 재벌이 저지른 짓을 우리 국민 모두가 갚아 나가야 하듯이 말이다.(자신이 진 부채를 모두에게 떠넘기는 이것 또한 전형적 철없는 짓의 하나이다. 우리 모두 공적 자금이란 말의 장난에 속아서는 안된다. 현란한 말로 장식해본들 그것은 부채떠맡기기이다.)

요즈음 미국 주식시장의 거품 여부를 두고 '폰지사기'란 말이 언론을 타고 있다. 몇년전 우리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파이낸스사의 사기와 비슷하다. 폰지 사기는 미래의 수익을 핑계로 빚을 끌어다 현재 약속한 수익을 지급하는 수법이다. 즉 나중에 참여한 투자자의 돈을 먼저 투자한 사람에게 지급해 그 사업이 성공적으로 보이게 하는 방법이다. 1920년대 미국 플로리다에서는 부동산 투기 바람이 불었는데 찰스 폰지란 사기꾼이 떼돈을 벌게 해주겠다면서 투자자들을 끌어 모았다. 그는 첫 투자자들의 이익금은 그 다음 모은 사람들의 납입금으로 지불했다. 더 이상 사람을 모을 수 없을 때 사기극은 끝장이 났다.

과학기술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방법이 아니다. 과학기술을 통해 한방울의 기름도 공짜로 만들어낼 수 없다. 그것은 자원을 조직하고 집중시키는 방법일 뿐이다. 과학기술의 효율성은 그것의 효율성일 뿐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자연에 착취의 강도의 증가의 표현일 뿐이다. 폰지사기에 초기 투자자들이 모두 이득을 보듯이 우리 모두는 이득을 본다. 그러나 그것이 끝났을 때 막차를 탄 사람들이 그 부채를 끌어안게 된다. 그 막차가 우리의 아들대일 수도 있고 손자대일 수도 있고 아니면 조금 더 연장될 수도 있다.(개인적으로는 생각보다 훨씬 빨리 파장이 오리라 생각한다. 파장에 다가갈수록 불안감이 그것을 더 가속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히 막차는 있다. 오늘 빚으로 흥청망청 하면서 그 빚을 자손들의 부담으로 고스란히 넘긴다면 철없는 조상임에 분명하다.

결론적으로 그 효율성의 비결은 그 무책임성이다. 마구 가져다 쓰고 거기서 생기는 부산물들-오염,자원고갈 등-에 신경쓰지 않는다면 그것을 모두 고려한 생산양식에 비해서 엄청난 효율성을 가질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4. 철학을 찾아서

철학은 원래 Philosophy에 대한 일본인의 번역이라고 한다. 철학(哲學)은 '밝은 이치'(哲)를 '궁구'(學)한다는 의미이므로 지혜(sophia)에 대한 사랑(phil)을 의미하는 Philosophy에 대한 그럴듯한 번역으로 보인다. 이것을 60년대부터 길흉화복을 점치는 점술에서 철학이라는 말을 전용하기 시작하면서 일반인들에게 이러한 이미지-그러나 이 발상만큼 반철학적인 발상도 없다-로 각인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일반인은 철학 하면 점치는 기술 정도로 안다. 나를 포함한 우리 철학도들은 이 이미지 때문에 보통 집안에서 난리를 겪은 경험을 다 갖고 있다.

철학이란 말의 이미지도 잘못 각인되어 “철학하고 있네”라면 “놀고 있네”라는 경멸조의 의미까지도 일상어 속에 들어왔다. 탁상공론이라는 뜻일 것이다. 가끔 좋은 의미로 쓰이기도 하는데 “철학이 있는 분..”의 식인데 이것은 보통 높은 사람을 언론이 추켜세울 때 가끔 쓰일 뿐이다.

언제부터인가 철학이라는 말을 바꾸자는 논의가 철학계 내부에서 제기된 적이 있었다. 누구는 현학(玄學)을 제시했으며 또 어떤 이는 필로소피아라는 원음 그대로 쓰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필자는 철학이라는 용어 자체는 그대로 사용하되 그것을 순수 우리말로 해독했으면 한다. 우리말의 함축이 훨씬 더 본래의 철학의 의미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단순히 '지혜에 대한 사랑'이나 '밝은 이치의 궁구'라는 함축 보다 더 깊은 내포와 더 넓은 외연이 부여될 수 있다. 그러면서 총체성과 더불어 구체성의 함축도 아우르고 있다.게다가 이것은 철학이 가져야할 중요한 요소인 실천적 측면 까지 아우르고 있다.

철학, 그것은 철을 밝히고 철을 배우고 철을 실천하는 학문이다. 철을 밝힌다는 것은 이 우주속에 인간의 위치에 대한 궁구이며 철을 배우고 실천한다는 것은 우리말 그대로 '철들음'의 과정이다. 그것은 성숙의 과정이며 자연과 인간,그리고 그 속에 자신의 올바른 자리매김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동시에 그것은 철없는 모든 것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크게로는 문명에 대한 비판이며 작게로는 편의주의에 사로잡혀 자신의 몸을 망치고 있는 일상에 대한 비판이다.

특히 자본주의와 과학기술의 결합은 '철없음'에 기초한 전형적 문명이다. 또 그것이 그것의 융성의 비밀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그것의 반철학적 태도는 그 기원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의 융성이 얼마나 허망한 모래탑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우리 모두가 애써 외면하려고 할 뿐이다. 인간은 결국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을 떠나서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시적 이득을 미끼로 모든 사람에 최면을 거는 폰지사기에 가깝다. 이 문명으로 하여금 주문에 풀려나 '철들게 하는 것', 그것이 철학의 과제이지 않으면 안 된다. 신이 얼마만큼의 시간을 유예해 줄지 우리는 모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