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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기장

만물의 기원...도대체 이 물음이 물음으로써 가능한가?



만물의 기원..도대체 이 물음이 물음으로써 가능한가?



1. 현대과학은 빅뱅이론에 근거해서 우주의  나이를 150억년으로 추산하고 있다. 그 구체적 논의야 어떻게 되었든 이 결론이 당혹스럽다는 것을 느낀다.

우주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우주의 시작 이전에 시간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수업시작 전","나의 출생 전" 등의 말은 의미가 있지만 "우주의 시작 전"이라는 말은 과연 의미있는 말인가? 우주의 시작은 동시에 시간의 시작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 말은 "시간이 있기 전"에 라는 말이 되는데 그것은 시간이전에 시간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리고 빅뱅이 있었다면 그 대폭발은 어디서 일어난 것일까? 그러나 그것은 어떤 곳에서 일어난 폭발이 아니다. "어디서" 라는 장소는 이 대폭발과 더불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시간 이전의 시간을 말하듯이 공간의 공간을 말해야 하는가?


2. 우주론적 논증은 사물의 원인을 묻는다. 내가 여기에 존재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일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나를 낳아준 나의 부모로 인한 것이다. 그러나 나의 부모도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그 원인을 계속 소급해 간다면 그 최초의 원인이 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 원인은 더 이상 원인이 없는 자기원인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또 그것의 원인을 찾아 소급해 올라가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제 1원인이며 이것이 신이다. 아퀴나스는 이러한 관점에서 이렇게 말한다.


관찰 가능한 세계에서는 사건의 원인들을 질서 있게 연속해서 발견할 수 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의 원인이 되어 나타난 것을 우리는 발견한 적이 없으며, 발견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것이 존재하기 이전에 이미 그것 자체가 또 존재했었다는 것을 뜻하며, 그러한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원인들을 끝까지 따져 들어가면 반드시 어디선가 멈추어야 한다. 그래서 첫번째 항이 중간 항의 원인이 되고, 중간 항은 마지막 항의 원인이 되어야 한다(중간 항이 하나이든 다수이든 간에). 이제 만일 당신이 하나의 원인올 제거한다면 당신은 그것의 결과까지도 제거하는 것이 되며, 첫 번째 항을 갖고 있지 않고서는 중간 항들도 가질 수가 없다. 따라서 만일 원인의 사슬이 끝없이 소급된다면, 그리하여 거기 첫번째 원인이라는 것이 없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중간 항의 원인도 마지막 결과도 없을 것이며, 이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그러므로 어떤 첫번째 원인을 가정할 수밖에 없다. 그 첫번째 원인을 사람들은‘하느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무한히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인과(因果)의 연쇄 사슬에 대한 논쟁을 하면서 아퀴나스나 클라크는, 우주창조의 증거를 합리적인 논리보다는 '하느님의 계시’에 의존하여 설명하려고 한다. 그들은 전 우주를 둘러싼 원인과 결과의 무한한 연쇄사슬이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만일 그러한 무한한 진행을 염두에 둔다면… 다음의 사실은 저절로 명백해질 것이다. 즉, 삼라만상의 전체 시리즈는 외부로부터의 어떤 원인에 의해서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시리즈 속에는 지금까지 우주 안에 존재했었고 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다음의 사실도 명백해진다. 즉, 그것이 존재하게 된 원인은 그 자신 내부에도 있지 않다. 왜냐하면 이 무한한 인과 사슬 속에서는 스스로 모습을 나타낸 자존적(自存的)인 존재는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반드시 그 앞의 것에 의존해 있다… 그러므로 애초의 독립된 원인이 전혀없이, 단순히 비독립적인 존재들로 구성된 이 무한한 연속은 외부에도 내부에도 아무런 필연성이나 원인을 갖고 있지 않은 존재의 계열이 된다. 다시 말해, 이것은 명백한 모순일 뿐더러 불가능하다.


'비독립적인 존재들’의 무한한 연속, 쉽게 말해 원인과 결과의 무한한 연쇄사슬이라고 해도 그것이 존재하는 이유에 따른 설명이 필요하다는 믿음은 철학자들, 특히 흄과 러셀 같은 철학자들에게서 심한 공격을 받았다(그 연쇄 사슬이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다 포함하고있을 때에는 그러한 설명을 발견할 수가 없다). 코플스턴(Copleston) 신부와의 유명한 BBC 논쟁에서 러셀은 자신의 관점을 이렇게 피력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어머니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명백히 인간 종족은 한 사람의 어머니를 갖고 있지 않다.” 요점만 말해, 연속체의 각 개별항들이 설명될 수만 있다면, 바로 그 사실에 의해서 그 연속체는 설명이 된다. 그리고 사슬의 각 항들이 앞의 항에 의존하듯이, 무한한 연쇄 사슬의 각 항들도 그런 식으로 설명이 된다. 전 우주의 원인을 묻는 것은 우주 안의 낱낱의 물체들이나사건의 원인을 묻는 것과는 다른 논리 체계가 필요하다.


우리가 사건을 말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가능하다. 시간과 공간을 떠나서 사건이 무엇인지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빅뱅이 납득이 안 되는 것은 바로 그 점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이해 가능한 사건이라면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일어나야 하는데 그 빅뱅이라는 사건으로 시간과 공간이 출현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원인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우리가 원인을 말하는 것은 이 우주 안에서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가 묻고 있는 최초의 원인은 이 우주 밖에 있다. 그 원인 이 우주를 가능하게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말하는 통상의 원인의 의미가 아니다. 그런데 우주론적 논증은 우리의 사건에 적용되는 원인의 개념을 이 우주의 원인에 적용하고 있다. 말하자면 원인의 원인에 원인의 개념을 적용하고 있다.


3. 왜 우리는 이러한 혼동을 일으키는 것일까? 럿셀의 역설이 보여주듯이 성원(member)과 집합(class)을 혼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분에 적용될 수 있다고 그것이 전체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으로 어느 크레타인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자신의 말도 이 진술 속에 포함되는가? 그렇다면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다"는 것도 거짓말인가? 그렇다면 모든 크레타사람은 거짓말쟁이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진짜 거짓말을 했고 따라서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가 된다. 그러나 그렇다면...

이 크레타사람의 말이 의미를 가지려면 "크레타사람은 거짓말쟁이다"는 자신의 말은 여기서 제외시켜야 한다. 럿셀은 크레타 사람이 하는 말을 대상언어라 하고 이 크레타사람에 관해서 하는 말을 메타언어로 구분한다. 이 메타언어는 성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그 집합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류의 혼돈은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낙서를 하지 마시오"라고 담벼락에 써놓은 것은 낙서인가, 아닌가? "조용히 하시오"라는 나의 고함 역시 소음이 아닌가? 헌법의 개정절차를 규정한 헌법의 조항은 그 개정절차에 따라 개정할  수 있는가?"너는 거짓말쟁이야"라고 말했을 때 "예, 나는 거짓말쟁입니다"라고 말한 사람은 거짓말쟁이인가?

사람의 집합이 사람이 아니듯이 사물들의 집합인 우주는 사물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물에 적용할 수 있는 시간, 공간, 원인의 개념을 사물의 집합인 우주에 적용할 때 모순이 발생한다.

한번 생각해 보자. 우주는 크기를 가지는가? 사물이 크기를 가짐으로 우주도 크기를 가질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현대과학도 그렇게 생각하고 우주의 크기를 측정하는 허망한 작업에 돈을 쏟아 붓고 있다. 그러나 그 크기는 얼마인가? 그 크기의 한계 밖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밖에 아무것도 없다면 밖이 없는데 어떻게 안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안이 없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그러나 안이 없다면 동시에 바깥이 없는 것이고 그런 면에서 경계가 없이 무한하지 않은가? 지대무외(至大無外)이므로 지소무내(至小無內)이고 至小無內이므로 至大無外인 셈이다. 화엄의 4대 祖師인 징관(澄觀)은 십현문의 하나인 광협자재무애문(廣狹自在無碍門)의 "광대즉입어무문 진모포납이무외"(廣大卽入於無門, 塵毛包納而無外)란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小는 곧 內가 없으니,內가 없는 까닭으로 中間이 없다. 無外는 大를 말한다.大는 곧 밖이 없으니, 밖이 없음으로 광대한 신찰(身刹)이니, 곧 內가 없는 진모(塵毛)로 들어간다. 그러므로 광협무애(廣狹無碍)라 이름한다. 卽하거나 入함에 모두 廣狹無碍함을 얻는다. 진경(『晉經』)에 이르기를 "금강위산(金剛圍山)의 수가 무량하나 모두 한 터럭 끝에 능히 안치할 수 있으니,지극히 큰 것이 작은 相에 있음을 알고자 하여 보살이 이런 까닭으로 처음으로 발심하였다."고 하였다. 지극히 큰 것이 작은 相에 있음이 즉 廣狹無碍이다. 또 이르기를 "능히 작은 세계로써 큰 세계를 만들고, 큰 세계로써 작은 세계를 만든다."고 하였다.


그래서 우주는 무한히 작으면서 무한히 큰 셈이다. 이것은 우주가 무한히 작으면서 클 수 있다는 사실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그것은 우주의 크기를 논하는 것은 범주오류이며 넌센스라는 것을 의미한다. "사고의 깊이"라는 말을 쓸 수 있지만 그 깊이가 몇 미터인지를 묻는다면 그것은 넌센스다. "불같은 정열"이라는 말을 쓸 수 있지만 그것이 몇도에서 발화하는지를 묻는 것은 넌센스이다. 우리의 일상의 상투성을 경고하는 의미에서 우주의 크기를 메타포로서는 얼마든지 쓸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우주의 크기를 측정할려고 한다면 그것은 범주오류이고 넌센스이다. 노란색이 크기와 아무 상관없듯이 우주는 크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우리가 측정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광대하다더라도 어디까지나 우주의 내부를 측정하고 있는 것이지 우주 자체를 측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1)


4.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이러한 우주론적 논증은 상호모순되는 주장이 동시에 성립되는 안티노미로 이끈다는 것을 밝히면서 물음을 중단하고 실천이성비판의 문제로 넘어가고 있다.이제 우리는 왜 이러한 논의가 안티노미로 이끄는가를 밝힐 수 있게 되었다. 성원에 대해서 성립하는 것이 성원들의 집합에 대해서도 성립하는 것은 아니라는 럿셀의 역설로 인한 것이다. 우주안의 사물들에 성립하는 것이 우주 자체에 성립한다고 본 것이 잘못이며 이것이 안티노미로 이끈 것이다.

그러면 왜 우리는 우주를 논하고 그 시초를 논하는가? 그것은 과학적 질문이라기 보다 철학적 질문이며 종교적 질문이다. 우주의 시초를 묻는 질문은 나의 존재 이유를 묻는 질문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주론"(cosmology)이지 "우주에 관한 과학"(science on the universe)이 아니다. 칸트도 영혼,우주,신에 관한 물음을 순수이성의 물음(과학의 물음)에서 빼내어 실천이성의 물음(철학과 종교의 물음)으로 가져 온다.이것이 순수이성비판에 이어지는 실천이성비판의 주요한 주제이다.

우주에 관한 사색이 어떤 역설에 빠져 있는지를 생각해 보자.내가 무엇을 관찰할 때 나는 그 관찰대상의 밖에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내가 사과를 보고 있는 것은 내가 사과 밖에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내가 우주 전체를 대상으로 사고하기 위해서는 나는 우주 밖에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그러나 다른 한편 나는 우주의 일부이다.나의 관찰이 우주에 참여하며 그것이 우주를 바꾸어 버리고 동시에 그 바뀐 우주가 나의 관찰의 대상으로 된다.그렇다면 내가 관찰하고 있는 것은 우주인가 나인가?

이 역설이 하이젠베르크를 당혹시켰고 이것이 오늘날의 양자역학을 출범시킨 계기가 되었다.관찰자가 관찰대상에 개입하지 않고는 관찰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그렇다면 관찰은 순수이론의 문제가 아니고 실천의 문제인 셈이다.

하이젠베르크(W.Heisenberg)는 관찰자가 고전역학적 전제와는 달리 관찰대상에 독립적일 수 없으며 관찰자의 관찰행위 자체가 대상을 교란시킴으로써 관측의 정확성정도는 일정한 한게 즉 Δq(위치의 불확정) × Δp(운동량의 불확정)를 픞랑크상수 h 보다 더 작게 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진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Δq × Δp ≥ h


이 관계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기위해서 전자의 위치를 매우 정확하게 측정한다고 해보자.즉 이 경우 Δq=0이다.그러나 Δq=0이면 Δp는 무한대가 되어야 한다.그 역도 마찬가지이다.고전역학에서 처럼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결정할 수 있기 위해서는 플랑크상수 h는 0이 되어야 한다.


 Δq × Δp = 0


이 경우 Δq와 Δp는 동시에 0이 될 수 있으므로 원리적으로 임의의 정확성으로 p와 q를 규정하는 것이 가능하다.그런데 h는 원자수준에서 유의의성을 가지는 극히 작은값(10-15eV)이므로 고전물리학이 다루는 거시계에서는 Δq×Δp = 0으로 보아도 무방하다.그러나 미시계에서는 그것이 성립할 수 없다.하이젠베르크는 이것을 보여주는 한가지 인상적인 사고실험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가 사물을 관찰한다는 것은 빛이 대상에 충돌할 때 반사하는 빛이 모아진 상을 본다는 의미이다. 육안으로 볼 수없는 아주 작은 물체를 관찰하기 위해서 현미경을 사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광학현미경으로 전자를 관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자는 더 짧은 파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충돌할 수없다. 그러나 이것은 원리적으로 극복 불가능한 한계는 아닌데 전자 보다 짧은 파장을 가진 γ선을 사용하면 된다. 그러나 그럴 경우 짧은 파장이 가지는 강한 운동량 때문에 관측하고자 하는 전자가 그 충돌에 의해 밀려나 위치를 정확하게 규정할 수 없게 된다.


불확정성의 원리는 항상 관찰자의 관찰과 연결되는 문제이다. 위의 사고실험에 의하면 전자의 위치는 γ선 파장 정도의 정확성만을 갖고 파악한다. 전자는 관찰을 수행하기 전까지는 실제로 정지상태에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관찰이라는 행위를 통해서,γ선의 광량자는 현미경을 통과하여 피관찰대상인 전자에 충돌한다. 충돌과정을 통해서 전자는 광량자에 의해 그 원래의 위치에서 밀려나게 되고 따라서 원래의 상태와는 달리 피관찰 대상인 전자의 위치가 변화된다. 이 변화의 불확정도는 불확정성 원리의 수용한계 보다 훨씬 넘어서 있다. 결국 원자핵 주위를 도는 전자의 궤도를 정확하게 관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W.Heisenberg,『철학과 물리학의 만남』,최종덕 옮김,한겨레,p.48)


관찰되는 대상은 측정과의 상호작용의 결과이다.이것은 "나"를 떠나서 독립적 대상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전역학의 기본전제와는 달리 나와 세계는 끊을 수 없게 얽혀있다.물질을 뚫고 들어감에 따라 우리는 그것들이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그러나 이것들은 데모크리투스나 뉴턴적 의미에서의 기본적 단위들이 아니다.그것들은 단지 실제적 견지에서 유용한 이상화에 불과하며 근본적 의미는 없다.봄(D.Bohm)은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예를들어 2천년전에 데모크리투스에 의해서 최초로 제창된 원자론을 생각해 보자.본질적으로 이 이론은 우리가 세계를 허공에서 운동하는 원자로 구성되었다고 보게 한다.거시적 세계에 속하는 대상의 영원히 변화하는 모습과 특징은 운동하는 원자의 구성이 변한 결과로 본다는 점이다.분명히 이 견해는 어떤 의미에서 전체의 실체화에 대한 중요한 형태였다.왜냐하면 그것은 존재 전체에 걸친 단일 공간속에서 기본구성물의 단일 집단운동으로서 전세계의 삼라만상을 이해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실재에의 단편적 접근을 낳게 되는 주요인이 되었다.왜냐하면 그것은 곧 실재 전체가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원자들로 구성되어있다는 개념을 절대적 진리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자적 관점의 실험적 확인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양자론이나 상대성이론이 차지하는 영역에서 원자론의 개념은 혼란된 문제에 부딛친다. 이 문제는 원자론이 그것이 나타나기 이전에 있었던 이론과 다른 것처럼 원자론과는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통찰이 필요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양자론은 원자입자를 정확하게 기술하고 그것을 추적하려는 시도가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원자궤도란 개념은 그 적용이 제한되어 있다.더 구체적으로 서술한다면 원자는 입자인 동시에 파동으로 움직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마 관측기기도 포함하여 그 특수한 형태 때문에 주변상황 전체에 의존하는 불분명하게 정의된 구름으로 보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따라서 관측자와 관측대상간의 관계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 오히려 관측자와 관측대상물이 모두 분할불가능하며 분석 불가능한 하나의 전체로서 실재에 합병되어 상호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D.Bohm,『현대물리학의 철학적 테두리』,전일동역, 민음사,pp.31-32 )


원자물리학에서 과학자는 초연한 객관적 관찰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고, 단지 관찰되는 대상의 속성에 그가 영향을 미치는 정도만큼 자신이 관찰하는 그 세계에 개입하게 된다. 휠러(J.Wheeler)는 관찰자가 이러한 방식으로 개입하게 되는 것을 양자론의 가장 중요한 특성으로 여기고 '관찰자'라는 말을 '참여자'라는 말로 대체시킬 것을 제의하였다.


양자론은 20cm의 판유리 조각을 사이에 두고 관찰자와 안전하게 분리되어 있는 '저 바깥에 놓여있는 세계'라는 개념을 깨뜨렸는데 양자론에 관해서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전자와 같이 그렇게 작은 대상을 관찰하는데 있어서까지 관찰자는 그 유리를 부수고 거기에 도달해야 한다. 그는 그가 선택한 측정장비를 설비해야 한다. 그가 위치를 측정할 것인지 운동량을 측정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 달렸다. 어느 하나를 측정하기 위한 장치를 설치한다는 것은 곧 다른 것에 대한 측정장치를 가로막고 배제하는 일인 것이다. 더욱이 측정은 전자의 상태를 변화시킨다. 우주는 그 다음 결코 동일하지 않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것을 기술하기 위해서는 '관찰자'라는 말을 지워버리고 그 자리에 '참여자'라는 새로운 말을 집어넣어야 한다. 좀 이상한 말이지만 우주는 참여하는 우주이다.( 앞의 책, p.159)


그렇다면 내가 관찰하고 있는 것은 우주인가 나인가? 칸트는 우주의 시초를 포함한 우주론적 질문은 "그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론적 질문이라기보다 "나는 누구이며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실천적인 윤리적 질문이라는 것을 간파했다. 순수한 인식론적 차원 하에서의 접근은 해결 불가능한 파라독스로 이끌 뿐이다. 실천적 차원으로 전환할 때 비로소 우주론적 질문은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우주의 기원은 과학의 주제라기 보다 신화와 종교의 주제에 더 가까운 이유는 이 때문이다.




  (주)

1) 99년 개봉되어 화제가 되었던 매트릭스(matrix)라는 영화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네가 현실이라 믿고 있는 이 세계는 현실이 아니라 가상의 세계 매트릭스"라고 이야기한다.

자신이 매트릭스 속에 있지 않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매트릭스내에서 매트릭스를 볼 수 있을까? 보여지는 대상은 계내의 대상이지 계자체가 아니다.계를 보기위해서는 계 밖으로 나가야 한다. 사실 영화에서는 모피어스가 네오를 계밖으로 내 보내어 매트릭스를 보게한다. 그러나 사실 이것이 딜레마이다. 네오에게 2개의 알약이 제시된다. 하나는 일상의 세계로 돌아가는 약이다.이 약을 먹으면 마치 악몽을 꾼 것처럼 잠에서 깨어날 것이다. 다른 하나는 매트릭스 밖으로 나가게 하는 약이다.네오가 이 약을 선택했다는 것은 매트릭스를 믿고 있다는 이야기이다.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매트릭스의 존재를 어떻게 설득시킬 수 있는가? 일단 믿음을 가져라.그러면 모든 것이 보일 것이다.그러나 믿음을 가져야만 보인다는 것은 그것이 주관적 환상이라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만일 매트릭스와 같은 것이 있다면 그 매트릭스내에서는 결코 그것을 볼 수 없을 것이다.그것을 보고자 한다면 네오의 선택(믿음)이 필요하다. 이것은 플라톤의 동굴의 우화 이래로 오늘날 까지 계속되고 있는 신앙과 이성의 갈등의 중요한 요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