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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철학

살과의 전쟁



살과의 전쟁



 몸이 기계와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로 설탕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자. 우리는 지나친 설탕의 섭취가 몸에 해롭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요즈음 무가당식품이 인기를 끌고 있다. 그렇다면 설탕 자체가 나쁜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 몸에 들어온 섬유질(셀룰로스), 녹말, 글리코겐은 최종적으로는 2탄당인 맥아당, 유당, 자당(포도당+과당)으로 분해되어 흡수되는데 이중 마지막의 자당이 바로 바로 설탕이다. 이 2탄당 가운데 가장 흡수가 빠른 것이 자당이다.

 과일은 포도당, 과당이 각 10%,그리고 나머지 80%는 섬유질이나 녹말의 성분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포도당과 과당은 별도의 소화과정 없이 바로 흡수되고 나머지는 복잡한 과정을 통해 포도당과 과당으로 분해된 다음 최종적으로 흡수된다. 그렇다면 구태여 과일을 섭취하여 다시 포도당과 과당로 바꾸는 번거로운 과정을 취할 필요없이 바로 자당인 설탕을 섭취한다면 몸으로서는 훨씬 경제적일 것이 아닌가? 자동차로 치면 가장 순도 높은 연료만 사용하는 격이 되는데 왜 그것이 몸에 해롭다는 것일까? 또 왜 소화과정에 에너지가 많이 들고 수속이 번거러운 녹말이나 섬유질의 섭취를 권장하는 것일까? 몸이 기계라면 이해되지 않겠지만 이것이 기계와 몸의 차이이다.

 다량의 설탕을 섭취할 경우 몸에 필요한 거의 모든 에너지가 그것만으로 충족될 수 있다. 신체가 습관적으로 자당에서 직접 필요한 당을 얻게 되면 구태여 녹말이나 섬유질을 소화시키려는 번거롭고 복잡한 과정을 유지하려 하지 않는다. 자연은 가장 경제적인 방식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녹말과 섬유질을 소화시키려는 효소의 생성이 억제되고 이 때문에 위가 녹말이나 섬유질을 소화해내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몸은 점차 소화가 어려운 음식은 피하게 되고 흡수가 쉬운 설탕만을 요구하게 된다. 그 결과 더 많은 설탕을 섭취하게 되고 그것이 다시 섬유질 등을 거부하게 되는 악순환이 되풀이 된다. 이것이 설탕 중독이다.

 그렇다면 설탕만 계속 섭취하면 될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겠지만 몸은 진화의 산물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는다. 자연에는 먹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먹히는 자가 있다. 먹이가 되는 것은 포식자가 자신을 소화시키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 자신이 살아남는 방법이다. 반면 포식자는 이 소화가 어려운 거친 먹이를 어쨌든 소화시키는 것이 살아남는 방법이다.(사실 식물이 개발해낸 셀룰로스는 아직 동물이 그것을 직접 소화시키는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 소와 같은 반추동물들이 순수히 풀잎이나 나무가지만을 먹이로 해서 진화할 수 있은 것은 자신의 위 속에 셀룰로스를 분해시키는 박테리아를 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것을  위해 고안된 4개의 방으로 된 위를 가지고 있다. 셀룰로스를 분해한 박테리아를 흡수함으로써 반추동물들은 간접적으로 셀룰로스를  소화시키고 있다.)

 자연히 몸의 소화기관은 음식은 용이하게 소화시키기 어렵다는 전제 하에 설계되어 있다. 다시말해서 몸은 거친 음식에 적응되어 있다. 그런데 인간의 기술은 그대로 흡수될 수 있을 정도의 완전히 정제된 음식 즉 설탕을 추출해 내었다. 그런 음식이 계속 들어오면 우리의 소화기관은 구태여 이 어려운 과정을 되풀이하지 않으려 하고 그 과정에서 거친 음식의 소화를 위해서 갖추고 있는 모든 효소생성을 중단시키게 된다. 이것까지라면 계속 설탕만 공급될 수 있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것은 몸의 기능을 전반적으로 악화시키게 된다. 왜 그럴까?

 제일 심각한 것은 혈당량이 요동치게 됨으로써 몸의 시스템의 항상성을 유지할 수 없다는 점인데 이것은 전문적 논의이므로 좀더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다른 영향을 살펴보자.

 소화도 중요하지만 배설 또한 중요한데 그것-특히 대장-은 소장에 의해 1차적으로 소화되고 남은 찌꺼기를 재료로 해서 2차적으로 알뜰살뜰 가용 영양분을 뽑아낸다. 그런데 설탕의 경우 신속하게 흡수되어 버리기 때문에 대장에까지 내려갈 것이 거의 없다. 그래서 대장은 무의미한 헛운동을 되풀이하게 되고(시동이 걸린 채 헛바퀴만 돌리고 있는 차와 비슷하다. 곧 과열로 타이어는 터져 버릴 것이다) 대장의 생태계 -주로 몸과 공 진화해온 장내의 균총들- 는 먹이가 없어 와해되게 된다. 이 생태계가 붕괴되면 이 균총들 때문에 침투해 들어오고 있지 못하던 몸 바깥의 박테리아들이 쉽게 침투해 들어올 수 있도록 대문을 열어주는 격이 된다. 이것들은 우리 몸과 함께 공진화해 온 장내균총들과 같은 자제력이 없다. 그것은 우리 몸에서 최대한의 영양을 탈취하려 할 것이고 이것이 몸의 저항력을 전반적으로 약화시키게 된다.(상세한 원리는 3.2에서 다룬다.)

 사실 이것은 비단 설탕만의 문제가 아니다. 문명병은 우리의 몸과 우리의 문화간의 갭에서 나온다. 그 전형적 예가 영양의 과다섭취에 의한 비만과 고영양가의 편식에 의한 변비가 그것이다. 변비는 앞서 설탕의 과다섭취가 가져온 증세와 같다. 야채를 많이 섭취하면 변비를 막을 수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야채는 영양가는 적으면서 소화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 결과 대장의 운동이 활성화되는데 이 대장이 만들어내는 최종산물(더 이상 흡수할 수 없는 찌꺼기)이 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야채류 보다 주로 고기와 같은 지방이나 고단백질만을 섭취하게 되면 소장에서 거의 흡수되고 대장으로 보낼 거리가 거의 없어진다. 그것은 대장의 운동을 위축시키고 그것이 변비로 나타난다. 전통적으로 채식을 주로 하는 동양인 보다 육식을 주로 하는 서양인들에게 변비가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요즈음 우리의 음식습관이 서양식으로 바뀌면서 변비증세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좋은 재료가 오히려 병을 만들어낸다. 얼마나 역설적인가?


영양의 과다섭취도 마찬가지이다.(이하 G.윌리암즈,『인간은 왜 병에 걸리는가』,p.210 이하)


 현대 식생활의 문제는 석기시대에 진화한 미각과 그 미각이 현대에 끼치는 부조화 사이에서 생겨난다. 지방, 소금, 설탕은 우리가 진화해온 역사에서 거의 항상 부족했다. 대부분의 시대에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런 물질들을 많이 섭취할수록 더 큰 이득을 얻었으므로 그것들을 구하려 애쓰고 좀더 많이 먹으려는 행동은 언제나 적응적이었다. 오늘날에는 대다수 사람들이 지방, 설탕, 소금을 생물학적 적응 보다 더 많이 섭취하고도 남는데 사실 이 수준은 수천년 전의 조상들이 보통 얻었던 정도를 훨씬 능가한다.

 현대사회의 예방가능한 질병들 중 대부분이 고지방 음식으로 인한 해악에 기인한다.  어떤 사회집단에서 조기사망의 가장 큰 요인인 뇌졸중과 심장마비는 아테롬성 경화증에 의해 동맥이 막히기 때문에 생긴다. 암의 발병률도 고지방식단에 의해서 급상승한다. 대부분의 당뇨병이 지방의 과잉섭취로 인한 비만에서 유래한다. 미국인은 식사로 얻는 열량 중 평균 40%를 지방에서 얻는데 반해 전형적인 수렵채취인의 경우는 20%를 넘지 못한다. 우리 조상들 중에는 고기를 많이 먹은 사람도 있겠지만 야생동물의 지방함유량은 겨우 15% 안팍이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이런 식의 과잉섭취에 더 빠지기 쉽다. 이러한 사실은 저체중에서 과체중에 이르는 각양각색의 변이들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과체중인 사람들은 영양분의 과잉으로 인해 심장 혈관에 병이 나기 쉽고 갖가지 암의 발병률도 높다. 이런 추측이 최근 연구를 통해 입증되었다. 미시건대학의 유전학자 제임스 니일과 그 동료들은 애리조나주의 피마족 인디어들의 만성적 영양실조를 치료하기 위해 한 일들이 실제로 비만과 당뇨병을 유발시키는 것에 주목하였다. 그는 이런 병에 걸리는 사람들은 "알뜰 유전자",즉 뛰어난 효율로 음식물 속의 에너지를 찾아내어 저장하는 능력을 유전적으로 갖추고 있다고 제안하였다. 겉보기에는 아주 평범한 식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피마족 사람들의 체지방은 날로 늘어갔다. 이것은 걸핏하면 기근에 시달렸던 지역에서는 아주 적응적이었을 것이다. 체지방을 풍족하게 비축한 사람들은 오랜 기근 동안 비축 효율이 낮은 동료들 보다 더 잘 살아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알뜰 유전자형은 식량이 풍부한 세상에서는 더 이상 적응적이지 못하다. 기근에 잘 적응한 사람들은 이 새로운 환경에서는 그저 살이 찌고 또 쪄서 결국에는 의학적인 문제나 다른 어려움을 겪게 된다. 살아남은 자만이 자손을 남길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알뜰 유전자형을 가졌던 누군가가 우리의 조상일 공산이 크며 따라서 그들의 후손인 우리는 비만의 소질을 누구나 갖고 있다고 하겠다.


【최근 살을 빼기 위한 다이어트가 유행이며 이제 거대한 산업으로 자라났다. 그저 살을 빼면 된다고 생각하는 다이어트의 원리 자체가 상당히 기계적 발상이다. 다시 우리의 몸은 기계가 아니다. 그 이유를 살펴보자. 】


영양분의 과잉섭취는 쉽게 치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많은 일상적인 조치들이 도움은커녕 오히려 해가 되고 있다. 우리가 스스로 음식물을 사양하는 것을 신체의 조절기구는 "아! 나의 몸이 다이어트를 하고 있구나!"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음식물이 부족해졌다는 위기의 신호로 받아들인다.(앞서 논의한 것처럼 개체로서의 우리와 세포로서의 우리는 같은 우리지만 다른 환경세계에 살고 있다. 1부의 다층적 존재에 관한 논의 참조)

 그 결과 기초대사 작용이 다시 조절되어 열량을 소비하는 효율이 높아지고 지방은 더 많이 쌓이게 된다. 지나친 음식조절은 우리를 극도로 배고프게 했다가 이내 엄청나게 먹게 만든다.

 무가당과 같은 인공감미료가 한 때 다이어트의 대안으로 논의된 적이 있었다. 그것은 설탕에 대한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영양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럴듯하게 들렸다. 그러나 연구결과는 그것이 체중을 감소시키는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입안의 단맛은 위장 속으로 당분이 들어간 다음 혈류로 흡수될 것임을 나타내는 신호이다. 그래서 단맛이 감지되면 몸은 대사과정을 재빨리 재조정하여 비축되어 있던 지방과 탄수화물을 혈당으로 전환하는 것을 중단한다. 지금 새 원료가 들어오는데 아까운 창고를 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맛과는 달리 들어온 것은 자당이 아니라고 하자. 혈당이 결핍되게 되고 허기만 더해 질 것이다.(은행에 잔고를 잔뜩 가진 채 굶고 있는 꼴이 된다) 그 결과 다시 설탕을 폭식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