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몸의 철학

몸의 이미지;하나인가,여럿인가?(2000.9)

몸의 이미지;하나인가,여럿인가?

 

 

   잘못된 그림?

 

아래 그림은 지오토(Giotto,1267-1337)의 『영광의 마돈나』(madonna in glory)라는 유명한 그림이다.우측은 그 일부의 확대이다.

  

 

이 그림에서 아기 예수의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다.아기의 형태가 성인의 축소형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실제 아기는 성인의 기하학적 축소형이 아니다.신체 각 부위의 성장률이 다른데 예컨대 머리에 비해서 몸통의 성장률이 빠르다.그래서 성인이 됨에 따라 머리가 상대적으로 작아지게 된다.이것을 알로메트릭 성장이라고 한다. 아래 그림은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지오토의 그림은 사실에 대한 정확한 관찰이 결여된 서투른 그림일까? 지오토는 아기와 성인간의 신체의 각 부위간의 비율이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한 서투른 관찰자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여기에 비해 라파엘로(Raphael,1483-1520)의 아기예수는 훨씬 자연스럽다.이 그림에서는 아기의 신체비율이 제대로 되어 있다.이것은 지옷또의 시대에 비해 라파엘로의 시대의 회화예술의 진보를 의미하는 것일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지오토도 당연히 성인과 아기의 신체비율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그는 그렇게 그리지 않았을 뿐이다.

 

   

 

이집트의 그림을 보면 사람의 모습이 묘하게 비틀어져 있다. 우측의 Osiris의 모습을 보라. 얼굴은 측면을 보이고 있는데 동체는 정면을 향하고 있고,다시 발은 측면으로 비틀어져 있다.이것은 신체에 대한 잘못된 서투른 묘사일까? 그렇게 볼 수 없는게 좌측의 파라오 Khafre의 입상이다.이것은 완벽한 신체의 비례를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이 나무랄데 없는 완벽한 솜씨에서 유추해 볼 때 그들은 다만 그렇게 그릴줄 몰랐다기 보다 단지 그렇게 그리지 않았을 뿐이다.

 왜 그렇게 그리지 않았을까? 시대와 문화에 따라 보는 눈이 달라진다는 문화상대주의는 지나친 주장이다.그들이 본 것은 오늘날 우리들이 본 것과 다르지 않다.시각적 지각은 생물학적 사실이지 문화적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그 보다는 그림이 무엇인지에 대한 시대에 따른 관점의 차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우리의 시각이 보여주는 상은 불완전하다.그것은 화가의 시점에 따른 우연한 한 일면만을 보여줄 뿐이기 때문이다.대상의 완전한 상을 그림속에 담고자 한다면 일시적이고 우유적인 것 보다 그 대상의 본질을 드러내 주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인간의 신체 부위에서 그 사람의 불변적 특징은 정면 프로필이 아니라 측면 프로필에서 잘 드러나며,반면 동체는 측면보다 정면이 그 특징을 훨씬 잘 보여준다. 시간적 흐름에 따라 변전해가는 우유적인 것이 아니라 불변적인 것을 포착하고 그것을 그림속에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앞서 지오토의 그림으로 돌아가자.왜 라파엘로처럼 그리지 않았을까? 그림에 대한 지오토의 시대의 인식과 라파엘로의 시대의 인식이 달랐다고 본다.지오토에게 그림이란  눈에 보이는 것의 묘사가 아니라 메시지의 전달이었다.이것이 휴머니즘이라고 하는  르네상스시대의 세례를 받았던 라파엘로와는 다른 점이다.

 필자의 해석은 이렇다.아기 예수는 비록 인간의 몸을 빌려 태어났지만 그는 하느님의 아들이지 인간이 아니다.이것을 어떻게 그림속에 표현할 것인가? 육신의 옷을 입었다는 점에서 인간이면서 그 영적 특성에 있어서는 신이라는 것을 어떻게 구상화할 수 있을까? 신에게 성장이란 있을 수 없다.그자체 완전한 존재로서 거기에 있다.예수는 육신으로서 아기이지만 이미 완성된 존재(성인)로서 거기에 있다.그 구상이 성인의 형상을 한 아기예수를 그려내지 않았을까?(르네상스이전의 대부분 그림은 이 패턴을 따르고 있다.예컨대 Cenni di Peppi의 Madonna and Child(1270),Simone Martini의 Madonna and Child(1310)을 보라 )

 라파엘로는 이미 난숙해진 르네상스의 분위기속에서 활동한 예술가이다.이미 보티첼리,레오나르도 다빈치,미켈란젤로 등의 천재적 화가들의 출현으로 그림의 의미가 변화되었다.르네상스를 인간중심주의라고 흔히들 부른다.무엇보다도 인간중심주의의 핵심은 감각의 복권이다.이제 우리의 감각은 플라톤이 본 것처럼 진리의 인식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아니라 진리로 인도해가는 통로이다.우리의 눈으로 보는 세계,그것이 진짜 세계이다.그림은 이 감각에 의해서 드러난 세계를 충실히 묘사하는 것을 그 사명으로 한다.감각은 진리를 우리에게 개시한다.(같은 유형으로 Sandro Botticelli의 Madonna and Child(1469),오나르도 다빈치의 Litta Madonna를 보라.)

 이제 관심은 인간의 신체 자체에로 향해졌고 그것을 상세히 연구했다.이것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에 대한 다양한 묘사로서 나타났다면 베르살리우스(A.Versalius)의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De Humani Corporis Fabrica,1543)는 그와 같은 정신에 의해서 인도된 것이다.(이것은 의미심장하게도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와 같은 해에 출판되었다) 이것은 그 전까지 의학의 수범으로 받아들여져온 갈렌(Galenos,130-200)의 것과는 다르다.피부와 근육은 층층히 벗겨져서 조직의 각면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근육, 혈관, 신경, 호흡, 골격 등의 기관들이 세밀하게 묘사되고 있다.그는 무엇보다도 지각되는 것을 지각되는 그대로 충실히 묘사하고 있다.그러나 감각이 진리를 개시한다는 믿음이 없다면 이 작업은 큰 의미를 가질수 없다.

 라파엘로에서 아기 예수는 이제 인간 아기의 모습 그대로 재현된다.

 

   과학혁명

 

 감각이 진리를 드러낸다는 생각은 아주 새로운 생각이다.전통적으로 감각은 진리에 대한 불완전한 안내자이며 그것이 보여주는 그림은 전체 그림의 한 편린들일 뿐이다.감각에 의해서 구성된 세계는 진짜 세계에 대한 한 허구적 구성물이기 때문에 그 구성물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어느것이 진정한 실재라고 주장할 특권은 갖고 있지 않다.어느것을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은 단지 유용성의 문제일 뿐이다.경험(결국 그것으로 구성되는 과학)이 할 수 있는 것은 그 정도이며 진정한 실재에의 접근은 그것의 몫이 아니다.희랍철학은 그것을 진리에의 직관에,중세서양철학은 그것을 신의 계시로 돌렸다.그러나 르네상스는 그것을 우리 인간에게 되돌렸다.진리는 인간에게 열려있다.그러므로 과학은 실재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지 단순히 유용성을 위해서 선택된 도구가 아니다.우리는 전자를 현상론이라 부르고 이 새로운 견해를 실재론이라고 부른다.이 실재론적 경향은 근대 과학혁명을 출발시켰던 코페르니쿠스,케플러,갈릴레오가 공히 공유하고 있던 신념체계였다.이것을 이해하지 않고는 갈릴레오 재판의 진정한 의미를 포착하기 어렵다.

 코페르니쿠스 체계 그 자체는 혁명적인 것이 아니며 그것은 기독교의 성서의 원리와 반하는 것도 아니다.과학은 실재에 대한 그림이 아니라 유용한 결과를 산출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그래서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다는 성서의 기록의 사실을 받아들이더라도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받아들이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사실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관해서』라는 책이 처음 출판되었을 때 이 책은 교황청의 추천도서목록에 등재되었다.) 그것은 어떠 사실에 대한 기술이 아니라 천체현상을 보다 신속하고 정확하게 계산하기 위한 하나의 허구적 장치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오래된 사건(갈릴레오재판)은 무엇에 관한 것인가?그것은 코페르니쿠스의 세계의 체계의 인식론적 지위에 관한 것이다.이 체계에 의하면 태양의 일주운동은 사실상 지구 자신의 자전에 기인하는 외양상의 현상일 뿐이라고 한다.교회는 이 체계가 구체계 보다 더 간단하다는 것,즉 그것은 천문학적 계산과 예측을 위한 더 편리한 도구라는 것을 인정할 용의가 있었다.그레고리 교황의 曆法의 개혁에는 이 체계가 실제로 충분히 이용되었다.갈릴레오가 코페르니쿠스주의의 이론은 단지 "도구적인 것" 즉 벨라미노 추기경이 말한 것처럼 단지 "계산을 간략하고 용이하게 하기위하여 고안되어지고 가정되어진 가정 또는 수학적 가설이라는 것을 명확히 했다면 갈릴레오가 그 수학적 이론을 가르치는데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다.요컨대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관해서』에서 서문을 쓴 안드레아스 오시안더( A.Osiander)의 입장을 따랐다고 한다면 아무런 반대도 없었을 것이다.1)

 

 오시안더의 서문은 다음과 같다.

 

성실하고 주의깊게 관찰을 함으로써 천체운동의 역사를 비교한 다음 어떤 종류의 것이든간에 그가 원하는 원인 또는 가설을 발명하고 고안해내는 것은 천문학자가 할 일이다.왜냐하면 그는 결코 참된 원인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이 가설들을 가정함으로써 바로 그 운동의 과거와 미래의 모습이 공히 기하학의 원리에 따라서 올바르게 계산될 수가 있다.그 가설이 참일 필요는 없다.그것이 사실 있음직한 것일 필요조차도 없다.그 가설이 관찰과 일치되는 계산방식을 제공해준다는 사실 하나로도 충분하다....천문학이 어떤 가설을 고안해내든지 그것을 고안해내는 것은 그것이 참임을 설득시키고자함이 아니다.다만 그것이 수적인 관계를 올바르게 산출할지 모른다는 것을 설득시키고자함이다.그런데 태양의 운동에 대한 편심의 가설과 주전원의 가설에서 보듯이 한 개의 동일한 운동에서 때때로 상이한 여러 가지 가설들이 제기되기 때문에 천문학자는 가능한한 이해하기가 쉬운 가설을 택할 것이다...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신의 계시에 의한 영감이 주어지지 않는한 어떤 확실한 것을 이해하거나 내놓지 못할 것이다.가설에 관한한 그 누구도 천문학에 대해서 확실한 것을 기대해서는 안된다.2)

 

 코페르니쿠스 체계는 단순한 도구인가? 그렇다면 갈릴레이의 투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그의 투쟁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계산은 연필과 종이로 할수도 있고 계산기로서도 할 수 있다.연필로만 한 계산이 진정한 답이라고 주장한다면 그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오시안더의 말이 맞다면 갈릴레오는 허깨비와 싸우고 있었던 셈이다.지동설이든 천동설이든,태양중심설이든 지구중심설이든 그것은 하늘의 운행을 예측하기 위한 하나의 계산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면 계산의 편의에 따라 사용자가 임의로 선택할 문제이지 어느 특정 도구의 독점권을 주장할 일은 아니다.그의 투쟁의 근거는 코페르니쿠스의 체계의 중요성은 단순한 도구적 유용성에 있는 것이 아니고 실재의 모습이라는 것이다.과학적 실재론의 태동이다.

 코페르니쿠스가 자신의 체계의 실재성을 믿었다는 것과는 별도로 그 체계자체에는 그것의 실재성을 확인해주는 아무런 논증도 없다.단지 지구를 고정시키는 것 보다 태양을 고정시키고,지구를 운동시키는 것이 여러 가지 측면에서 관찰결과와 더 잘 부합한다는 것이다.그러나 지구중심체계인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도 관찰결과와 잘 부합한다.다만 여러 가지 보조장치를 도입함으로써 체계 자체가 더 복잡할 뿐이다.그렇다면 보다 효율적이고 계산이 간단한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를 수용할 수 있다.카톨릭 교회가 초기에 이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를 용인하고 수용한 것은 이 체계의 실재성에 대한 아무런 주장도.논의도 이 체계속에 들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체계 자체만을 본다면 오시안더의 견해가 그렇게 틀린 것은 아니다.

진리에 대한 시대정신은 어디에서나 같다.실재를 그 본연의 형태로 드러내는 것이다.차이가 있다면 감각이 과연 그 실재를 보여주는가 하는 것이다.적어도 르네상스 이전의 철학자나 예술가들은 그것을 믿지 않았다.그래서 그들은 영원의 상을 그리는데 감각에 의존하지 않았다.르네상스기의 위대한 화가들에게서 회화란 감각에 드러난 것을 그대로 충실히 재현하는 것이었다.그러나 그 감각의 재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실재에 대한 우유적이고 일시적인 파편들이 아닌가?그러나 이제 시대정신이 변화했다.감각 그 자체가 실재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라할지라도 적어도 실재를 파악할 수 있는 신뢰할만한 단서였다.그것이 실재에 대한 불완전한 그림이라할지도 감각과 이성을 날카롭게 연마함으로써 실재에 점점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이제 이성은 감각을 단서로 실재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 선포된다.그것은 인간능력 밖의 것이 아니며 신의 계시를 필요로 하는것도 아니다.

 이것이 갈릴레오 재판의 진정한 본질이며 이것은 감각과 이성의 권능을 둘러싼 두 세계관의 충돌이다.

 

   실재론의 한계

 

감각이 실재를 모사하고 있는가? 그것은 아니라고 본다.동물들의 경우 생활세계가 달라지면 실재의 모습도 달라진다는 것을 앞서 보아왔다.우리는 시각적 동물이기 때문에 주로 시각에 의존해서 외부의 정보를 얻는다.그러나 시각적 상은 실재의 모사가 아니고 상당한 수준에서 가공되고 재해석된 것이다.(상세한 논의는 여기를 클릭하세요)

물론 재해석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실재와는 별도의 가공물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그것이 일정 정도 실재를 반영하고 있지 않다면 그것에 기초해서 정보를 얻는 동물들은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감각이 실재의 전체를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생활세계에 따라 달라지며 그것의 충실성도 달라진다.카메라가 어떤 부분에 초점을 맞추면 다른 부분이 흐려지듯이 그 동물의 생에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는 부분은 그 반영의 충실도가 클 것이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충실도가 떨어질 것이다.아니 왜곡이 나타나기도 할 것이다.그 경우 오히려 감각이 실재의 접근을 막는 장애요인이 될 수도 있다.감각은 그 동물의 익숙한 영역내에서는 효율적으로 작동하지만 그 영역 밖으로 나가면 애매하고 모순된 결과를 만들어낸다.

 인간의 감각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생활세계를 반영하고 있다.그 가운데 무엇보다도 먼저 고려해야할 것은 우리의 사이즈이다.우리는 우리의 사이즈로 세계를 본다.그렇게해서 지각된 세계가 세계의 진정한 모습일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그런데 실재론의 귀결은 그것이 실재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주장한다.그것은 세계가 반영되는 한 측면이 아니라 실재의 유일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상당히 폭력적이다.우리의 지각상과 다른 그림은 다른 관점의 그림이 아니고 단적으로 잘못된 그림일 것이기 때문이다.그러면 지오토의 그림도,이집트의 그림도 잘못된 것이다.우리의 감각적 수용상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그러나 이렇게 주장하는 꽉막힌 미술사가는 없을 것이다.그림은 감각적 상과는 다를 수 있으며 오히려 다르다는 점에서 그만큼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떻게 된 셈인지 과학의 영역에 오면 용납되지 않는다.예술은 우리의 정서에 호소하는 것이지만 과학은 사실을 다루기 때문이라고 한다.사실은 하나이며 유일한 사실이 있을 뿐이다.지동설이 맞다면 천동설은 틀린 것이지 다른 관점이 아니다.이것이 갈릴레오가 교회와의 투쟁에서 이끌어낸 승리이다.물론 성서외의 사실은 없다고 본점에서 교회의 도그마도 폭력적이다.그러므로 과학과 종교의 전쟁은 과학적 사실을 둘러싼 싸움이었다기 보다 사실의 권위를 누가 가지느냐를 둘러싼 일종의 이념투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실재론에 기초한 갈릴레오의 과학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이것의 긍정적 역할을 부인해서는 안될 것이다.적어도 우리의 감각이 유효한 적용범위내에서는 감각은 우리의 바른 안내자이며 그것을 따라 가는 것이 대체로 맞다.과학이 보여주는 사실은 "근사적으로는" 유일한 사실이라고 해도 무방하다."과학이냐 칼이냐"로 무장한 이 과학의 지하드는 전영역을 파죽지세로 정복해들어갔다.고대 천문학이 붕괴한 다음 연금술의 성채가 붕괴하고 곧이어 생기론적 생물학의 영역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이 파죽지세는 20세기 들어와서 물질의 미세구조로 들어가면서 주춤거리기 시작했다.우리의 감각이 맥을 못추는 낯설은 영역으로 들어온 것이다.감각이 맥을 못추면 이성은 자신을 통제하고 제어할 수 없다.빛의 본성이 입자인지 파동인지 우리는 종잡을 수 없다.아인시타인은 입자설에 근거해서 광전효과에 대한 올바른 답에 도달했고 드브로이와 슈뢰딩거는 파동설에 근거해서 수소의 기본구조를 해석해낼 수 있었다.둘다가 모순이 없다.그러나 사실은 유일한 사실이 있을 뿐이다.그렇다면..??

 자연이 이러한 어처구니 없는 모순을 범하다니..그럴 리가 없다.좀더 우리의 지식의 지평이 넓어지면 이것이 모순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질 것이다.아인시타인은 그 모순없는 체계를 통해 유일한 상으로서의 실재를 재건하기위해 고군분투했다.보어의 생각은 아주 달랐다.우리는 모순이 없다면 둘다를 받아들여야 한다.좋다.그러나 이 주장은 갈릴레이의 신조 밖으로 나가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다.유일한 실재가 있다면 하나의 수용은 다른 것의 거짓을 의미할 뿐이다.그것은 오시안더의 신조로 돌아가는 것이며 과학이 실재의 그림이란 철학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과학이 예측을 위한 도구라면 그 도구가 파동이 되었든 입자가 되었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보다 정확한 예측을 주고 현상을 구제할 수 있다면 그것을 된 것이 아닌가?과학은 이제 더 이상 실재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

감각은 왜 이러한 혼란을 일으키는가?그것은 우리의 감각이 진화해온 예의 그 익숙한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극소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우리의 감각은 아무런 통제와 제어기능도 하지 못하고 허상만을 연발할 뿐이다.이것은 마치 전혀 예상하지 못한 광경을 보았을 때 목격자들의 이야기가 각양각색이고 중구난방인 것과 비슷하다.물론 우리의 이성은 이 혼란된 감각의 이면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그러므로 우리가 실재에 다가가기위해 전적으로 감각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그러나 감각은 이성을 통제하는 최소한의 기능은 해줄 수 있어야 유의미한 결과를 산출할 수 있다.칸트가 보여주었듯이 감각적 경험의 제어없는 이성의 홀로작업은 안티노미를 낳을 뿐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실재론자이다.그리고 우리의 감각경험은 그 실재에 닿을 수 있는 유효한 장치-물론 이성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라는 것을 인정한다.그러나 그 감각경험은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우리가 진화해온 그 토양에서만 효율적으로 작동한다.우주대의 크기에 대해서 우리의 감각은 무능하며 극소의 크기에 대해서도 우리의 감각은 무능하다.이성으로 그 한계를 넘어설 수는 있지만 그것이 실재의 상인지에 대해서는 감각경험에 의해 확인되어야 한다.그러나 감각경험은 그것을 확인해줄 수 없다.

그런데도 만일 실재론을 그 영역으로 까지 확대하겠다면 그것은 폭력적이다.이것이 순수이성비판에서의 칸트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라고 나는 생각한다.이러한 관점에서 나의 생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우리의 감각경험에 익숙한 영역(대부분 간주관적 검사를 통한 합의나 재현실험이 가능하다)내에서는 실재론적 관점을 견지한다.

둘째,우리의 감각경험이 익숙하지 못한 영역(합의가 불가능하며 재현실험도 제한적이다)에 대해서는 현상론적 관점을 취할 수 밖에 없다.이 영역에서 만들어진 과학이론은 실재의 그림이라기 보다 도구 이상의 것이 될 수 없다.

 이 경계를 넘어설 때 실재론은 폭력적 인식론으로 변한다.인간은 인식에 있어서 자기한계를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도그마적 일원론 보다는 차라리 중구난방의 다원론이 낫다.

 셋째,이것이 사실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우리의 인식범위내에서도 실재론과 현상론이 양립불가능한 것이 아니다.비행기의 항법사는 지구가 하루 1회 자전하면서 년 1회 태양주위를 돈다는 것을 유일한 사실로 받아들이면서도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고정되어 있다고 보고 항로를 계산한다.그렇게 하는 것이 지구의 자전을 감안한 계산과 별 차이없는 결과를 산출하면서도 계산이 훨씬 간단하기 때문이다.이 문제를 자세히 검토해 보자.

 

   땅과 지도

 

 근사적으로 말해서 종으로서의 인간에게는 감각적 경험상은 모두 같다.시대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다고 해서 그것이 달라진다고 보지는 않는다.코페르니쿠스가 본 태양이나 프톨레마이오스가 본 태양이나 다르지 않다.

 그것을 통해 하나의 사실에 도달할 수 있을까?필자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보지 않지만 설사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서 하나의 이론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이론은 여럿일 수 밖에 없다.그리고 이론간의 우열을 결정하는 것도 극히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그 의미의 외연이 상이할 것이기 때문이다.

 의미론자들은 땅과 지도의 비유를 흔히 가져온다.지도는 땅이 아니다.그리고 그것의 정확한 모사도 아니다.지도의 의미는 그 쓰임새에 의존한다.다음 그림을 보자.

 

 

이것은 부산전역의 항공사진이다.이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모습에 가장 근사하다.그러면 아래 지도 가운데 어느것이 사실에 가까운 것일까?

 

 

  

 

당연히 왼쪽 지도가 더 사실에 근사하다.그러나 그렇다고 오른쪽 지도가 틀린 것은 아니다.이 지하철 노선도는 왼쪽과는 다른 방식으로 실재를 반영하고 있다.지하철노선도는 우리가 어디서 갈아타야할지,여기서 몇 구역후에 내가 내려야할지를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그러나 이것만을 가지고는 내가 서쪽으로 가고 있는지 동쪽으로 가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노선의 형태 전체는 심하게 왜곡되어 있어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왼쪽의 지도의 생명이 사실과의 대응이라면 오른쪽 지도의 생명은 그 유용성이다.하나의 경험적 사실에 여러 가지 이론이 있을 수 있으며 각 이론이 그것의 어떤 측면을 반영하고 있는 이상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같은 의미에서 지옷또의 그림이 틀렸다고 말할 수 없으며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단지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는 코페르니쿠스의 체계와 적용의 외연이 서로 겹침으로 그 가운데 어느 것이 더 효율적인가 하는 것은 판단할 수 있다.오시안더는 이런 관점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체계의 수용을 권고하고 있다.

 

   몸과 해부도

 

필자의 관심은 사실 여기에서 시작되었다.동양의학에서의 몸의 이미지는 왜 이렇게 얼토당토 않은가? 아래 경락도와 15C의 이탈리아에서 출판된 책의 해부도의 그림을  비교해 보라.(큰 화면을 보기위해서는 그림을 클릭하세요)

 

 

   

 

이 그림을 앞의 지도와를 비교해 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동양의학의 경락도는 지하철 노선도와 아주 흡사하지 않은가?그것이 사실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는 점에서도 닮아있다.반면 서양의학의 해부도는 지도와 닮았다.지도는 그 자체가 사실은 아니라하더라도 사실에 대한 '근사한' 그림이다.

 지도와 지하철노선도의 차이를 염두에 두면서 김용옥 교수는 다음말을 세겨 읽어보자.

 

서양의학사의 문제는 감각주의입니다.서구의 감각주의 계열에서 의학이 발전하거든요.서양의 의학은 인체에 대한 인식이 우리의 감관에 나타나는 것만을 인정한다는 입장이죠.그렇게 해서 서양의학은 모든 것을 감관으로 환원했습니다.그러면서 끊임없이 감관에 나타나는 진리체계로서 조사 연구하는 기구를 발전시켜간 역사죠.서양의학의 역사라는 획기성은 렌즈,현미경,전자현미경의 발견등 결국 기구의 혁명입니다.그것은 감관에 나타난 사실에 정밀성을 제공하려는 노력이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동의학의 언어가 비감관적이라는 말은 상대적으로 쓴 것인데 동의학이 대상으로 하고 있는 인체관은 어떤 의미로 추측의 체계이죠.동의학이 비감관적이라는 것은 감관에 나타난 사실에 기초해서 의학체계를 세운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동의학의 발전과정을 보면 비질서를 질서로 환원시키는 능력을 전제로 하고 그 능력을 발휘하는 모든 현상을 기초로 추측해가는 체계들이죠.예를 들면 서양의 약리에서 성분분석을 한다는 것은 감관적으로 정확하게 신경전달계에 무슨 영향을 주느냐 이런 것을 연구하지 않습니까?그런데 동양 사람들은 찬약과 더운약을 컴비네이션할 적에 君.臣.佐.使라는 말을 쓰는 것도 임금이 있고,신하가 있고,보좌역이 있고,졸개들이 있어서 어떠한 작전을 펼칠 것이다 하는 추측을 가지고 약을 쓰는 것이거든요.

 동양의 진리체계는 기본적으로 감관적이지 않고 factual하지 않으므로 기능적( functionalistic)이라는 말을 씁니다.진리체계가 사실로서 감관에 드러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비질서를 질서로 환원시키는 기능이 있느냐 없느냐 그 기능만이 문제라는 것이죠.그러니까 침을 여기에 놔서 이러한 기능이 나타날적에 그들은 그 기능을 물리적 사실로서 감관적으로 증명할려는 것이 아니라 그 기능이라는 결과에 의해서 기능과 기능을  complex시켜 가면서 인체를 추측해가는 체계로 발전했습니다.3)

 

이 동양의학의 '기능주의적 관점'은 갈릴레오의 실재론적 관점과 대비되는 오시안더의 반향으로 들린다.우르서스(A.R.Ursus)는 『천문학의 기초』(1588)에서 이 오시안더의 입장을 더 분명히 언술하고 있는데 이것을 김용옥 교수의 동양의학의 관점과 비교하면서 읽어보자.

 

가설 즉 허구의 가정은 우주체계에 관한 가상적인 모형 속에서 나오는 어떤 가상적인 원들에 대한 가상적인 표상으로서 천체의 운동에 관한 관찰을 수용할 수 있는 것이며 천체의 운동을 보존,유지하며 또 그것을 정량적인 말로써 표현하기 위해서 발명하고,도입하고,가정한 것이다.나는 우주체계에 관한 가상적인 모델에 관한 가상적인 표상이라고 말하지 옳고 참된 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왜냐하면 우리는 그러한 것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우리가 발명하는 가설은 우주의 체계에 관해서 우리가 상상하고 또 구성해낸 가공물에 지나지 않는다.그러므로 그런 가설들이 철두철미 우주자체의 체계에 들어맞는다는 것은 전혀 불필요한 일이고 또 가설을 고안하는 사람들이 그런 요구를 해서도 안된다.만약에 우리들이 구성해낸 가설이 천체의 운동의 정량적인 관계를 보존,유지할 수 있다면 그것에 어떤 어리석고 얼토당토 않은 점이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감수할 수도 있다...그래서 가설은 설령 성서의 권위에 위배되어 설정되더라도 다른 학문과 다른 분야의 상식저인 원리를 위반하고 있다고 비난할 수 없다.왜냐하면 허구 또는 거짓인 가정을 가지고 문제에 대한 옳은 답을 탐지하고 추적하며 또 불러일으키는 것이 가설의 기능이기 때문이다.참인 가설이든 아니면 허구이고 거짓인 가설이든 간에 하여튼 천체의 현상과 겉모습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고 그것들 사이의 정량적 관계를 적절히 드러낼 수 있으며 그렇게 해서 목표와 과제를 성취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가설을 발명하는 것은 일종의 천문학적인 허가증으로 인정되고 있다.4)

 

이것을 좀더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서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의 체계를 잠깐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그 가운데 역행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유소독스(Eudoxus,B.C.408-355)가 주전원(epicycle)을 도입하는 과정을 보자.지구가 중심에 있고 태양을 비롯한 모든 천체가 지구주위를 도는 동심천구설에서 설명하기 곤란한 현상중의 하나는 행성의 역행운동이다.행성은 보통은 다른 별과 마찬가지로 서에서 동으로 운동하지만 때때로 어떤 위치에서 멈추었다가 방향을 틀어서 동에서 서로 거꾸로 움직이는데 이것을 역행운동( retrograde motion)이라고 한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유소독스는 행성의 본래의 궤도(대원, deferent)위에 작은 궤도(주전원, epicycle)가 돌고 있으며 그 주전원위에 행성이 자리잡고 있다고 가정했다.이러한 운동에서 관찰자의 관점에서 보면 어떤 때는 마치 역행하는 것처럼 보일 경우가 있다.그러나 그것은 관찰상 생겨나는 겉보기 현상이며 행성은 여전히 서에서 동으로 움직이고 있다.그러므로 지구중심의 동심천구설에 아무런 모순이 없다, 아래 그림은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 이 주전원이 실제 존재하는가?유소독스를 비롯한 그리이스 천문학이 이것을 확인해 보려고 한 노력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없다.이것을 가정함으로써 현상을 잘 설명하고 정확한 계산을 할 수 있다면 도입할 수 있으며 그것의 실재성 여부는 별도의 문제이다.지하철역의 노선도의 실재와의 근사성을 확인하는 것이 의미가 없듯이 이것의 실재성 여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경락의 경우는 어떨까?그것의 소재 여부를 확인하려고 하는 노력은 분명 전통적 동양의학적 관점에서 낯설은 생각이다.그것은 갈릴레오에서 태동하고 그 영향권하에 있는 서양의학의 실재론적 관점에서 나온 생각이다.

 유소독스의 동심천구의 체계의 수용여부가 그 주전원의 존재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듯이 동양의학의 수용여부는 그 체계를 받치고 있는 여러 개념들의 실재와의 대응의 여부에 의해서 결정될 문제는 아니다.동양의학에서는 모식도는 있지만 해부학은 없었다.

 

코페르니쿠스 체계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의 차이를 비교해 보기위해서는 여기를 클릭하세요

 

the image와 a image

 

김용옥 교수는 서양의학의 해부도는 우리몸에 대한 유일한 이미지가 아니고 여러 가능한 이미지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재미있는 주장을 한다.

 

解剖學이란 말의 anatomy를 해석할 적에 tomy는 자른다는 의미의 剖에 해당하고 ana는 가른다는 의미의 解에 해당됩니다.이 해부학이란 말은 근세적인 의미죠.소위 칼로 잘라서 인체를 본 결과의 학문입니다.해부학이란 것은 근세적 서양의 감각주의의 신체관을 나타내는 말이에요.우리가 말하는 해부학이라는 것도 서양의 의학사에서 본다면 서양사람들이 몸에 대해서 그려온 이미지의 극히 최신판이죠.서양에도 몸에 대한 그림들이 이집트시대로부터 희랍시대,중세기를 거쳐서 꾸준히 있어 왔어요.요새 서양의 해부학이라는 것은 최근 100년 동안 집약적으로 발전된 인체에 대한 이해방식이에요.해부학에 대한 대표적 교과서인 『그레이 아나토미』와 같은 책에서 말해주고 있는 인체에 대한 세세한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참으로 경이롭죠.그런데 서양의 해부학을 공부하다 보면 해부학이 인체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는 이미지가 "The image"인줄 알게 되요."하나 밖에 없는 그 모습이다.그것이 몸의 진실이다."이렇게 단정짓게 되죠.예를 들면 신장은 해부학적으로 보면 2개가 완전히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은 콩팥이 아니라 콩콩이 되든지 팥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그러나 이것을 콩팥이라고 한 사람들은 이 2개에 대한 이미지가 달랐다는 이야기이죠.

 오늘날 우리의 해부학적 지식이라는 것은 인체에 대한 그림입니다.정확성과 실체성있는 해부학적 지식을 가지고 황제내경을 분석해 보거나 옛사람들의 인체에 대한 생각을 분석해 보면 99%가 거짓말이에요.어떤 서양의사가 말하기를 동양의학,서양의학이라는 말은 근대의학과 전근대의학으로 바꾸어야 한다.동양의학이 얘기하는 정도는 서양의 중세기의학에도 있었다.서양에도 사혈,부황 등이 있었다.그 말의 의미는 동양의학이 그리는 인체의 이미지는 전근대적인데 반해서 서양의학이 그리는 이미지는 근대적이다,또는 서양의학은 과학적인데 대해 동양의학은 비과학적(형이상학적)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단지 내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인체에 대한 이미지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어 왔으며 그 이미지들은 과연 오늘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만을 묻고자 합니다.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의학적 지식을 사실로 아는데 의학에도 똑같은 문제가 개재됩니다.물론 의학적 지식은 사실로 확인되는 것이 동양보다 서양에 더 많을지 몰라요.모든 사실에 대해서 그 사실을 어떻게 해석하는냐 하는 해석의 문제가 인체의 의미를 결정합니다.

 임상병리 같은 것은 서양의학에서 중시하는 fact 들이지만 그  fact들은  fact 자체로서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GOT,GPT 같은 수치도 마찬가지에요.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것입니다.그러기 때문에 같은 수치를 놓고 대부분의 의사들이 일치하는 부분은 있겠지만 해석은 무궁무진한 것입니다.마찬가지로 인체해부학이 제공하고 있는 모든 사실에 대해서도 문제는 해부학 철학이 없습니다.나는 해부학이라는 말은 잘못된 말이라고 생각하는데 해부라는 말은 방법에 관한 얘기로 사실은 몸의 형태학(Morphology of Mom)입니다.형태라는 것은 즉 이미지죠.이것을 러프하게 본 것을 해부학이라고 하고 아주 디테일하게 본 것을 조직학이라 합니다.해부학은 "The Image"가 아니고 서양사람들이 이렇게 보았다는 이미지이죠.5)

 

필자로서는 서양의 해부학의 이미지가 여러 이미지 가운데 하나라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서양과학의 실재론적 입장은 우리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이미지를 계속해서 추구해왔다.우리의 감관이 실재에 대한 정확한 반영이 아니라는 인식론의 근본적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the image일 수가 없다.그러나 우리의 눈은 그 눈이 어떤 시대 어떤 문화에 있었든 그 해부학적 이미지가 가장 근사한 이미지라는데는 쉽게 동의할 것다.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the image 이며 (적어도 우리 인간에게는) 보편적 이미지이다.

 그러나 몸의 이미지를 통해 구현해야 하는 것은 그 구조 못지 않게 그 과정이다.그 과정은 우리의 감관에 직접적으로 반영되지 않는다.그래서 서양의 해부학적 방식으로 환원시킬 수가 없다.시각화할 수 없는 과정의 이미지는 현미경이나 엑스레이로 포착되는 것은 아니다.오히려 그것은 그럴듯한 모델을 통해서 그 과정을 설명하려고 하게 된다.물론 이 때 그 모델이 실제 존재하는 것일 필요는 없다.현상을 설명하고 예측하는데 유용하다면 허용된다.동양의학의 몸의 이미지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이러한 관점에서 몸에는 여러 이미지가 가능하다.그런 의미에서 동양의학의 경락도는 a image이다.

해부학의 몸의 이미지를 기능주의적으로 해석해서 가능한 여러 이미지 가운데 하나로 해석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동양의학의 몸의 이미지를 실재론적으로 해석해서 그 이미지의 요소들이 실제 대응하는 것이 없다고 해서 그것을 학문이라고 할 수 없다고 매도해 버리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다.다시한번 말하지만 지하철 노선표는 실제 지형을 근사하게 묘사하기 위해서 그려진 것이 아니다.그것은 일반지도와는 그 기능이 다르다.기능이 다르면 그것을 판단하는 관점도 달라지는 것이 당연하다.

 

 

 

 

 

 

 

 

1) K.R.Popper,Conjectures&Refutations,Rutledge&.Kegan Paul,pp.97-98

2) R.Harre,『과학철학』,민찬홍 옮김(서광사),pp.118-119

   N.Corpernicus,『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민영기 옮김(서해문집),pp.11-13

3) 김용옥,『東醫壽世保元 강론』, pp.9-10

4)Harre,앞의책,pp.112-113에서 재인용.

5) 김용옥,앞의책,pp.258-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