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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콘텐츠와 철학

가상,가상현실,현실(1997.6)

 

      

 

 가상.가상현실.현실

 

 "토탈 리콜"의 철학

 

  1. 가상현실    

                                               

뉴턴 시대만 하더라도 과학과 철학은 구분되지 아니하고 자연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러나 19세기에 오면 과학과 철학은 뚜렷이 구분되는 영역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 과정에서 철학의 중요한 문제들은 과학의 과업으로 이전되어 갔으며 20세기에 들어와서 이 과정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경험으로 환원할 수 없는 비경험적 영역을 제외하고는 거의 과학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경험으로 환원할 수 없는 것은 무의미한 '헛소리'(nonsense)로 치부되었으며 그 결과 철학은 사실에 대해 발언할 기회와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 가운데 철학의 위기론이 대두하게 되었다. 그러나 위기는 기회라 했던가? 지금까지의 과학기술이 철학의 전반적 썰물현상을 가져왔지만 이 과학기술이 이제 역으로 철학의 밀물현상을 가져올지 모른다는 조짐이 여기저기 보이고 있다. 오늘날의 과학기술,특히 컴퓨터 발달은 철학적 담론을 새로운 수준에서 논의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즉 종래 현실과 괴리된 철학적 아포리아(aporia) 소위 헛소리가 과학기술의 발달로 현실의 문제로 등장한 것이다. 이제 철학적 문제는 소수의 별종들이 빠져드는 취미수준의 문제로 제쳐 놓을 수 없게 되었으며 어떤 방식으로든 집고 넘어가야할 현실의 문제로 등장한 것이다.

물론 아직 까지의 과학기술의 수준에서는 철학의 문제는 과학이 고민해야할 시급한 문제는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원하든 않튼간에 미래과학은 철학적 아포리아의 그물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과학과 철학이 다시 실타래 처럼 얽히는 뉴턴 이전의  자연철학의 시대에로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둘은 어떤 식으로 얽혀 드는 것일까? 예컨대 미래의 과학기술이 인간과 외모가 똑같은 인조인간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고 하자. 그들의 능력은 점차 개선되어 급기야는 어떤 측면에서는 인간을 추월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창조주를 배반하지 않을까? 그러리라고 보여지는데 이것은 사실의 문제가 아니고 논리의 문제이다. 논리의 문제라면 그 배반은 필연적이다.(이것을 다루기 위해서는 또 한편의 글이 필요할 것이다. 여기서는 이 논증을 다루지는 않겠지만 관심있는 사람은 졸고 『정신은 어떻게 출현하는가?』의 제 5장 참조)

인간과 인조인간을 구분할 수 있을까? 얼핏 생각나는 간단한 방식이 엑스레이 투시사진이다. 그들은 피와 살과 뼈로 된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물리적으로 구분가능한 모든 검사를 통과할 수 있도록 자신을 진화시켰을지 모른다. 그래서 엑스레이 사진 정도에 대한 위장술은 당연히 갖고 있을 것이다. 즉 그는 육체적으로는 인간과 전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이제 인조인간이 곳곳에 심어져서 은밀한 반역을 준비하고 있다. 어쩌면 당신의 이웃,당신의 동료가 인조인간인지 모른다. 어쩌면 당신의 아내,남편이 그럴지도 모르고 심지어는 당신의 자식이 그럴지도 모른다.(사실 인조인간인 당신의 아내는 당신의 아이를 임신한 척 하고 있다!)

이제 당신이 인조인간을 색출해서 처단하는 터미네이터(영화 터미네이터에서는 이것이 거꾸로 되어있지만)로서의 과업을 부여받았다고 하자. 당신은 이 둘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 것인가? 이제 당신은 난마처럼 얽혀 있는 철학의 아포리아로 뛰어들어야 한다. 당신은 '심신동일론'으로 또는 어쩌면 '부대현상론'으로 무장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 정도의 특명을 부여받았다면 '심신이원론'이나 '유심론'으로 무장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신이 미래의 그 시점에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아마 인지과학자로 불릴 것이다.) 오늘날의 눈으로 볼 때 당신은 철학자의 모습을,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악마의 징표를 찾아 다니는 엑소시스터를 더 많이 닮아 있다.

이것은 컴퓨터에 의식이 부여되면 충분히 있을 법한 상황이지만 아직 먼 미래의 문제이다. 필자는 이것 보다는 이미 현실로 다가온 과학기술의 문제중의 하나를 여기서 다루어 볼려고 하는데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이 그것이다. 다행히도 이 문제라면 필자의 빈약한 상상력을 동원할 필요가 없다. 가상현실의 문제를 실감나게 그려낸 피어스 앤터니의 『토탈리콜』(Totl Recall)이 있다. 이것을 저본으로 가상현실의 과학기술 속에 깔려있는 철학적 문제들을 검토해 보겠다.

토탈리콜은 본래 필립 리크의 『추억을 팝니다』는 소설을 저본으로 해서 피어스 앤터니가 영화용으로 각색한 것이다. 이것은 기발한 착상,특수효과,슈와저네거의 근육질의 연기 등으로 해서 우리의 기억(적어도 나의 기억)에 남아 있는 영화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도 재미있지만 그것이 깔고 있는 철학적 배경 자체가 만만치 않다.

사실 필자는 SF물-그것이 소설이든 영화든-을 좋아한다. 난해한 철학의 고전속에서나 다루어질만한 문제들이 현실적 문제로 예사로 다루어지고 있는데서 오는 참신함 때문이다. 이것은 SF작가들이 의식적으로 철학의 문제를 상황속에 끌어 들이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SF의 수준과 규모에서는 그 상황 자체가 철학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아서 클라크의 『서기 2001년』,딘 포스터의 『홀로그램』(motion pictures) 그리고 최근의 마이클 클라이튼의 『데우스』 같은 SF물들은 철학개론의 부교재로 사용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 각설하고 본론으로 돌아가자.

 

 2. 토탈리콜

 

때는 미래의 어느 싯점. 인류는 우주공간에 대한 식민을 시작해서 이때 쯤 태양계의 행성의 대부분에 식민기지가 건설되어 있었다. 그중 가장 주목받는 행성은 화성이었는데 여기에는 레이져 폭탄을 만드는 타비니움라는 광석이 대량 매장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주인공은 더글라스 퀘이드(슈와저네거 粉). 그는 뉴욕에 살고 있는 건물철거에 종사하고 있는 평범한 노동자이다. 그는 어느날 부터인가 밤마다 화성에 관련된 악몽에 시달린다. 그는 단서를 찾아 화성에 가고 싶어하지만 비용때문에 그럴 형편이 못된다. 그러다 그는 우연히 그럴듯한 방법을 알게 되었는데 가상현실 기법을 이용한 가상여행이다. 그래서 그는 그러한 여행을 전문으로 하는 리콜사를 찾아간다.

이 기술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다. 소설에 비하면 아직 초보적 수준이지만 충분히 가상여행의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다. 오늘날 가상현실은 두가지 방향에서 연구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우리의 감각으로 하여금 마치 현실공간속의 느낌을 그대로 갖게 하는 것이다. 소위 "감각몰입형"(sensory-immersive)이다. 가상현실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머리에 헬멧 같은 머리부착용 디스플레이(HMD)를 부착하고 손에는 파워글로브를 껴야한다.이것은 외부에서의 정보를 차단시키고 가상공간의 정보를 주입하기위한 장치다. 사용자는 가상공간을 통해 시각,청각,촉각의 정보를 받게 되는데 이 때의 느낌은 현실적 느낌과 구분이 불가능하다.

이것은 오늘날 여러가지 방면에 응용되고 있다. 그중 하나가 비행훈련 시뮬레이터이다. 당신은 실제 비행기와 똑같은 조종석에 앉는다. 당신이 시뮬레이터 안에서 이륙하면 실제와 똑같은 비행장과 주변모습이 보인다. 당신은 날개를 휘감는 바람소리를 들을 것이고 랜딩기어가 접히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곧 고공으로 상승하고 눈을 휠끔 돌리면 아래쪽에  구름덮힌 산의 정상을 볼 수 있을 것이고 또 그 아래로 구불구불 구비치고 있는 강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갑자기 당신 앞에 적기가 출현하고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린다. 총격을 받은 당신의 비행기는 상하로 격렬히 요동하다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아주 그럴싸해서 당신의 감각은 상당히 공포에 휩싸이기는 하겠지만 완전히 속지는 않을 것이다. 청각,시각적 자극은 그럴듯하나 촉각은 아직 초보수준이며 후각,미각은 아직 흉내 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감각은 이 5감을 종합한 통각(統覺)의 형태로 지각함으로 곧 속임수를 알아챌 것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을까? 감각을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의 뇌라면 거추장스러운 장치를 할 필요없이 우리의 뇌의 특정부위를 자극하면 될 것이다. 이것은 그렇게 새로운 것은 아니다. 우리의 꿈이 바로 그 수법을 구현하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이 가상현실의 수법을 사용함으로 가상을 더 현실감있는 형태로 그리고 원하는대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데 있다. 이것을 구현하기위해 컴퓨터 케이블을 우리의 중추신경계에 직접 연결하면 된다. 이것은 물론 아직 실현된 기술은 아니며 SF수준에서 논의되고 있는 정도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것은 감각몰입형 보다 훨씬 그럴듯하다. 청각,시각에 촉각,후각,미각을 통합할 수 있으며 감각은 이제 전혀 가상과 현실의 차이를 구분해 내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현실과 똑같기 때문이다. 이것이 "신경접속형"(neural-direct) 가상현실 구현기술인데 퀘이드의 화성여행은 바로 이 방식으로 행해진다.

 

 

퀘이드가 기억을 이식받고 있다.

 

사실 퀘이드는 실제 화성에 간적이 있을 뿐아니라 오랫동안 화성 식민정부의 정보원으로서 복무해왔다. 그러나 지구로 추방되면서 정보원으로서의 기억전체가 봉합되었고 대신에 그의 뇌속에 가공적인 다른 기억이 심어졌다. 그는 사실 착암기를 조작하는 기사 퀘이드가 아니라 최근까지 화성총독의 핵심 오른팔이었던 하우저였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뇌속에 가공적 경험이 이식되면서 은폐되어 있던 실제경험과 충돌을 일으킨 것이다. 발작이 일어나면서 이식은 중단된다. 그는 자신의 잃어버린 과거를 찾아 화성으로 향한다.

    

 3. Cogito 속이기

 

신경접속형 가상현실에서 감각은 가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 사실 감각의 차원에서 볼 때 둘은 전혀 동일한 것이다. 이것은 감각을 멋지게 속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자기자신 조차 속일 수 있을까? 퀘이드가 의문을 표시하자 리콜사의 직원은 "어쨌든 당신의 머리속에서 그 차이를 전혀 알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알정도라면 비용은 전부 돌려드립니다. 게다가 어엿한 유형의 증거도 넣게 되죠. 반쪽짜리 승선권,그림엽서,필름말입니다. 그리고 토산품에 그 밖의 여러가지 기억을 뒷받침할 증거들이 전부 갖춰져 있어요.맡겨만 보세요."라고 확신을 표시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자신을 속일수 있을까? 자신이 가상여행을 위해 리콜사에 갔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한 아직 자신을 완전히 속일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것조차 지워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이러한 기억제거는 초법적 국가기구라면 몰라도 합법적 테두리 안에서 영업을 해야하는 리콜사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비합법적 방법이 아닌 보다 교묘한 방법이 있다. 의식을 속이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동화같은데서 흔히 쓰이는 수법이기도 하다. "옛날 나이 서른이 넘어도 아직 총각신세를 못 면한 더벅머리 나무꾼이 살고 있었다. 하루는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가 잠깐 쉬는 사이에 깜박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예쁜 선녀가 나타나......" ,이런 식이면 이것은 꿈에 지나지 않는다. 의식은 속지 않는다. 자신이 꿈꾸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이렇게 진행되어야 한다. "...깜박 잠이 들었다.꿈속에서 예쁜 선녀가 나타나.....그러나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놀라 잠에서 깨어나보니  일장 춘몽이었다. 나무꾼은 자기신세를 한탄하면서 터벅터벅 산을 내려오는데 한 처녀가 무엇에 쫓기듯 나무꾼에게 달려와서 도움을 청했다. 꿈속에서 본  바로 그 선녀와 판에 박은듯 닮지 않았는가! 나무꾼은 필시 하늘이 정해준 배필이라 생각하면서......." 이제 의식을 멋지게 속여 넘겼다. 여러분도 속았는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나무꾼은 아직 꿈을 꾸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의식은 꿈에서 깨어났기 때문에  이후는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의식을 속여넘긴 나무꾼의 이 꿈은 이제 나무꾼에게 꿈이 아니다. 그에게 그것은 조금도 다름없는 현실이다!

이 수법은 호러(horror) 영화를 만드는데도 이용할 수 있다. 아무리 무시무시한 영화도 진짜로는 무섭지 않다. 겁많은 여성들은 비명을 지르지만 자신이 그 영화의 상황과는 무관한 상황에 있다는 것을 하시도 잊고 있지 않다. 그것은 영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끝없이 자기에게 주입시키고 있다. 계속해서 더 무서운 공포를 요구하면서도 끊임없이 그 공포에서 자신을 떼어놓을려는 이율배반적인 관객들의 태도가 감독이 볼 때는 얄미울 수도 있다.그래서 이 관객들을 정말 간떨어지도록 놀래주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데 자신이 영화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관객의 그 의식만을 속이면 된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가능하지 않다. 관객들을 속이기위해 극장밖의 전시민들과 몰래카메라식 공모를 해야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래의 가상현실 기법의 영화라면 이것이 가능하다. 일단 영화가 끝난다(그러나 실제로는 끝나지 않았다). 관객들은 실컷 비명을 지르면서 스트레스를 풀었지만 별로 무섭지도 않고 유치하기만 하다고 불평하면서 관람용 특수 헬멧과 옷을 벗고는 복도로 나온다(이것도 영화의 일부이지만 관객은 모른다). 이 때 화재경보기가 요란스럽게 울린다. 극장에 불이난 것이다!(관객은 이제 이 화재를 영화가 아닌 실제상황으로 생각한다) 관객의 입장에서 이것은 조금도 다름없는 현실일 것이다.

여러분은 이제 토탈리콜을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퀘이드는 사실 평범한 기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는 리콜사의 광고를 보고 단순한 호기심에서 화성에로의 가상여행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가상여행이 진정 성공하기 위해서는 퀘이드 자신의 의식을 속여 넘겨야 한다. 상하 문맥을 그럴듯하게 맞추기 위해 꾸지도 않은 화성에 대한 꿈의 기억이 사후에 삽입되고 그의 가공적 신분-화성정부의 총독의 오른팔-이 만들어진다. 이식될 내용과 기억의 충돌이 이제 그럴듯 해진다. 이제 퀘이드의 의식을 속일 모든 무대장치가 마련되었다.다음 토탈리콜사가 해야할 마지막 처리는 이식이 실패했다는 기억을 이식시키는 것이다. 이후 퀘이드의 화성에서의 모험은 리콜사에서 만들어 놓은 프로그램이지만 퀘이드로서는 현실 그자체이다.

 

 4. 버클리 재론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해 보면 가상은 의식을 속임으로서 '현실성'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면 의식을 속임으로서 얻은 것은 현실이 아니고, 가상과 현실의 구분을 없앤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것을 거꾸로 말하면 가상과 현실의 구분은 의식의 현전하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식이 결여된 상태에서는 감각에 주어지는 모든 것이 '현실'이다. 의식이 부여될 경우 비로소 가상과 현실이 문제되고 그 구분이 문제된다. 그 구분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 구분을 철폐하는 것이 의식을 속임으로서 가능했다면  의식의 역할이란 그것을  구분하는 기능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제 좀더 근본적인 철학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여기에 '사과'가 하나 있다. 이 사과가 '있음'을 당신은 어떻게 아는가? 눈으로 봄으로 안다. 그렇다. 그렇다면 눈을 제거해 버리자. 그래도 사과는 여전히 있다고 확신하는가? 물론이다. 코로 냄새 맡아볼 수 있고,손으로 만져볼 수 있고,뚜드려 소리들 들어볼 수도 있다. 내친김에 후각,청각,촉각 등 모든 감각기관을 다 제거해 버리자. 이제 사과는 있는가? 사과가 없다고 주장한다면 당신은 버클리와 견해를 같이하고 있는 셈이다. '있음'은 '지각됨'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거꾸로 말해서 사물은 지각됨으로서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지각하기를 그치는 순간 존재는 사라진다. 이제 우리는 이 세계는 나의 지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유아론(solipsism)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당신은 이 주장에 승복하지 않을 것이다. 사과의 '있음'은 객관적 사태이므로 그것이 인식능력의 주관적 요소에 좌우된다고 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감기에 걸려 냄새를 맡지 못한다고 해서 내 앞에 있는 사과의 냄새가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닐 터이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면 당신의 반론은 납득할 수 없는 근거에 서 있다. 당신은 우리의 인식 -적어도 '있음'의 인식- 이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사과를 지각할 수 있는 모든 통로가 차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근거로 그럼에도 그것은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이제 반대의 경우를 보자. 당신은 지금 가상현실의 헬멧을 쓰고 있다. 사과에 관한 모든 정보가 입력되었다. 당신은 사과를 볼 수 있고,만질 수 있고,냄새맡을 수 있으며,두드려서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이 사과는 있는가? 당신은 그것이 우리의 감각을 아무리 현혹하더라도 단지 가상일 뿐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모든 감각이 그것의 있음을 확인하고 있는 마당에 당신은 무슨 근거로 그럼에도 그것은 "없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자 이제 당신을 약간 현혹시켜 보자. 당신은 헬멧을 벗는다. 그리고 사과를 본다. 똑같은 감각자료가 들어온다. 이제 당신은 그 사과가 있음을 확신한다. 그러나 사실 당신은 헬멧을 벗은 것이 아니다. 헬멧을 벗은 것으로 당신을 현혹시킨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받은 정보는 앞서와 마찬가지로 컴퓨터를 통해 입력된 것이다. 그럼에도 당신은 사과의 '있음'을 확신한다.

이제 당신의 '있음'과 '없음'을 가르는 기준이 어느 정도 분명해졌다. 헬멧을 쓰고 있다는 의식이 수반된 감각은 존재를 지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의식을 감각에서 분리시켜 버리자 당신은 그 존재를 받아들인다. 이것은 있음과 없음,현실과 가상은 감각의 문제가 아니라 의식의 문제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5. 있음의 근거- cogito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하더라도 존재하는 자신의 존재는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적어도 무엇인가를 의심하기 위해서는 의심하는 자기가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는 "나는 생각한다.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고 결론지었다.

"생각한다"는 것은 타동사이다. 따라서 목적어를 수반해야 할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인가? 필자는 'myself'가 생략되었다고 본다. 즉 "I think myself. therefore I am"이다. 나는 나자신을 생각하는 그러한 존재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의식,자기의식,또는 마음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나의 '있음'을 확인해주는 것은 나의 감각이 아니고 나의 마음이다. 일단 내가 있음이 확인되면 내 바깥의 있음도 확인된다.안(자아)과 밖(외부세계)은 상관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안이 있으면 당연히 밖도 있다. 안이 있는데 밖이 없다면 사실상 그것은 안이 아닐 것이다. 반대로 밖이 있는데 안이 없다면 그것은 사실상 밖이 아닐 것이다. 내 존재의 실재성은 내 바깥 세계의 실재성을 동반한다.  

그러나 바깥은 나와는 이질적인 것이므로 (그렇지 않다면 이미 그것은 바깥이 아닐 것이다.) 나에게는 불투명한 것이다. 따라서 세계(바깥)가 우리의 감각(안)이 보여주는 바대로 존재한다고 볼 수 없다. 그래서 우리에 의해 지각되지 않음에도 존재할 수 있고(지각되지 아니한 사과) 우리에 의해 지각됨에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가상현실속의 사과). 나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상상이 나의 감각에 아무리 생생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바깥에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그것은 가상이지 현실이 아니다.     

동물의 경우 바깥은 존재하지 않는다. 바깥은 지각되지 않음에도 있음을 전제할 때 가능한데 동물은 있음과 없음을 오로지 지각됨에 의해서만 알고 있기 때문이다. 비유적으로 말해서 동물은 '안'에 갇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동물에게는  '바깥'으로 나가는 통로가 없다.(안과 밖이 상관적 개념이므로 이 말은 어디까지나 비유적 표현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상과 현실의 구분도 없다. 헬멧을 통해 지각하는 가상은 동물에게는 전혀 다를바 없는 현실일 뿐이다. 버클리의 명제는 동물에게 잘 들어맞는다. 마음을 통해 인간은'안'으로 걸어잠긴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는 내부로 부터 해방된 것이다.

 

6. 가상현실과  cogito속이기

 

마음은 동일한 감각자료라도 현실의 사과와 가상현실속의 사과를 구분한다. 그러나 그 구분에 뚜렷한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가상현실속의 사과를 가상으로 인식하는 것은 그것이 지각된 상황이 정상적 상황이 아니고 가상현실의 상황에서임을 지속적으로 의식함을 통해서이다. 그래서 마치 정상적 상황으로 돌아온 것 처럼 속임수를 써면 쉽게 그것을 현실로 착각한다.

토탈리콜에서의 기술이 현실화되면 마음의 메카니즘 뿐만 아니라 마음 그 자체를 속일 수도 있을 것이다. 퀘이드를 하우저로 바꿔놓고,하우저를 퀘이드로 바꿔놓을 수도 있다. 어느것이 진짜 그의 모습일까? 화성의 영웅 하우저가 그의 현실이고 평범한 착암기 기사 퀘이드가 가상일까? 아니면 착암기 기사 퀘이드가 현실이고 화성의 영웅 하우저가 가상일까?  퀘이드가 화성에서 반정부군을 도와 맹렬한 영웅적활동을 펼치고 있는 가운데 뜻밖에 의사인 리콜사 직원이 그를 방문함으로써 가상과 현실이 뒤죽박죽된다. 퀘이드의 혼란을 감상해 보자.(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장자』 제물론薺物論의 나비의 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당신에게 있어서 상당히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겠지만,당신의 신체는 지금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퀘이드 씨"

퀘이드는 긴장하면서 웃음이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봐 의사선생 나를 놀리셈이야"

 "정말입니다. 당신은 이곳에 있지 않습니다. 동시에 나도 이곳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의사가 환자와 함께 망상을 꿈꾼다는 말인가? 퀘이드는 한쪽손으로 의사의 어깨를 움켜지고서 감촉을 확인했다. "그거 참 놀라운걸.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 있는거지?"

"리콜사입니다. 당신은 지금 기억이식용 의자에 누워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정신심측용 콘스르로 당신의 마음을 모니터하고 있습니다"

"결국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거요"하고 퀘이드는 비꼬듯이 말했다 "게다가 이것은 당신네 회사가 판 멋진 휴가의 일부인 셈이고"

"약간 다릅니다. 지금 당신이 체험하고 있는 것은 당신이 기억테이프를 토대로 하여 멋대로 창조하고 있는 망상입니다. 나는 긴급조치로써 당신의 기억속에 들어온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정신분열에 의한 정신상의 색전증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우리들 힘으로는 당신을 이 꿈에서 부터 구해낼 수가 없습니다. 나는 당신이 스스로 현실로 돌아오도록 설득하기 위해서 파견된 것 뿐입니다"

"그래서 저 '현실'에서는 나는 여기에 있지 않다는 거요?"

"깊이 생각해 주십시오.퀘이드 씨.당신의 꿈은 기억이식 작업 도중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의 모든일 -피 튀기는 살해극이나 일등선실을 이용한 화성여행,이곳 힐튼의 스위트룸은 모두 리콜의 상품에 의한 것입니다

"완전한 속임수야!" 퀘이드는 그렇게 말하기는 했어도 정말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무엇을 믿을 수 없단 말입니까,퀘이드 씨? 급성 정신적 외상에 의해 일어난 편집증적 망상을 품고 있는 것 말입니까? 아니면-" 그의 목소리에는 조소적인 울림이 섞여 나오기 시작했다. "당신이 진짜 무적의 비밀첩보원이었는데,혹성간의 음모에 희생되어 하찮은 노동자로 기억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까?"

퀘이드의 확신은 토대에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피어스 앤터니,『토탈리콜』,186-189면)

 

 

퀘이드 선생, 이 약을 먹으면 현실로 돌아오게 되오

 

 리콜사 직원은 정말로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아니면 화성정부의 사주를 받은 정부끄나풀로 그를 속이고 있는 것인가? 전자라면 퀘이드는 리콜사의 이식용 침대에 누어있고 후자라면 그는 화성에 와있는 것이다. 어느것이 현실인지 확인해줄 방법이 있는 것일까? 퀘이드는 자신이 쏠듯이 들이된 권총에 리콜사 직원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는 것을 보고 후자가 현실이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이렇게 쉽게 판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리콜사 직원의 입장에서 환자가 막무가내로 꿈에서 깨어나려 하지 않을 때 초조한 나머지 진땀 정도 흘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어쨌든 퀘이드는 직원의 말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그를 쏘아 죽인다. 만일 리콜사 직원의 말이 사실이라면 현실세계의 퀘이드는 기억이식의 부작용으로 영원히 자폐증에 빠졌을 것이다. 그 후 전개되는 화성구조를 위한 퀘이드의 맹활약은 리콜사의 프로그램에 따라 그의 마음속에 진행되고 있는 가상일 뿐이다.

이것은 마음의 자기존재에 대한 확신이 데카르트가 본 것 처럼 그렇게 자명하고 확실한 기초위에 서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 마음의 불확실성은 근본적으로는 데카르트의 코키토가 무한퇴행을 허용하고 있다는데 있다. 이 무한퇴행을 닫을 수 있는가?               

 

7. cogito를 넘어서

 

어떤 사물을 본다는 것은 감각의 기능이다. 그러나 그 사물을 보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로 이것은 마음의 기능이다. 전자는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기계적 알고리듬으로 바꿀 수 있지만 후자는 그렇지 못하다. 이렇게 물어보면 그 차이가 분명해진다. 당신은 당신이 그 사물을 보았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그 사물을 보았음을 알고 있음을(의식)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의식의 의식)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면 어떤 사물을 보았음을 알고 있음을 알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고(의식의 의식의 의식)... 이것은 무한퇴행에 빠질 것이다. 코키토의 무한퇴행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호프스태터에 의하면 이러한 외양상의 무한퇴행은 마음을 알고리듬으로 본 오해에 있다는 것이다. 마음은 알고리듬이 아니며 의식의 각 수준들(의식의 수준,의식의 의식의 수준,의식의 의식의 의식의 수준....)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그러면서도 닫혀 있다. 그는 마음을 '이상한 고리'(strange loop)라고 명명했다. 똑같은 논리를 우리는 불가의 화엄사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금 여기서 화엄사상의 존재론 일반을 논할 게재는 아니다. 단지 의식의 문제에 한정시켜 검토해 보자. 우리가 의식을 붙잡는 순간 의식의 의식으로 퇴행하고 다시 의식의 의식을 붙잡는 순간 의식의 의식의 의식..으로 퇴행해 간다. '나'의 확실성은 다가가면 물러서는 신기루와 같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의식에서 의식의 의식으로 진행하는 것과 똑같이 꺼꾸로 의식의 의식에서 의식으로 진행해갈 수 있다. 각 수준 사이의 계기나 경계는 임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같은 대상내에 다른 수준들이 서로 공존할 수 있으며('동시구기'同時俱起의 원리),그리고 다른 수준들이 동시에 존재하는 동안에도 방해됨 없이 서로 통할 수 있다.('동시무애'同時無碍의 원리)

그러나 경계와 수준을 무시한 사고들은 자기언급의 역설을 불러일으킨다. 예컨대 '진리는 없다'는 말은 언명의 수준을 무시하면 자기역설에 빠진다. '진리는 없다'는 언명 자체를 진리의 집합속에 포함시키면(자기언급을 허용하면) "'진리는 없다'는 진리도 없다" 즉,'진리는 있다'는 주장이 되어 자기반박의 꼴이 되고 만다. 그래서 럿셀은 이러한 역설을 피하기위해 경계와 수준을 준수해야 한다는 '계형이론'(theory of type)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역설은 근본적으로 '실체'(substance)라는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실체란 불가의 용어로 표현하면 자성(自性)을 가진 존재인데, 그러한 것은 없으며 한존재는 다른 존재에 의존함으로서만 있다. 법장은 이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른바 '하나'란 자성을 가진 하나가 아니라 연(緣)하여 일어나는 하나이다. 그러므로 하나가 열을 포함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연하여 일어나는 '하나'를 의미한다. 만일 그것이 자성을 가진 '하나'라면 그것은 자족적이고 분리된 하나일 것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고려대상과 다른 방도는 배제된다.

이것이 자성에 의한 '하나'로서 만일 이것이 일단 존재한다고 한다면 반드시 연기(緣起)의 진리는 부정될 것이다. 더구나 자성에 의한 하나는 '하나'라는 낱말의 참의미와 작용도 틀림없이 무효화할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참 '하나'가 아니라 미혹하여 추측해낸 임의의 '하나'이다. 참으로 의미있는 '하나'는 연하여 일어나는 '하나'이며 여럿에 의하여 포용되고 여럿과 동일한 하나이다.(까르마C.C.츠앙,『화엄철학』,243면)

 

마음을 실체로 보는 한 무한퇴행을 피할 수 없고,무한퇴행을 피하고자하는 한 자기언급의 역설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마음은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상호의존함으로 존재하는 '관계자'이다. 따라서 계기와 수준을 자유로이 오갈 수 있다. 그것은 무한대로 열려 있으면서도(一中多) 닫혀 있다(多中一). 이것이 호프스태터가 '이상한 고리'라고 했을 때 뜻했던 바가 아닌가 한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동물은 '안'에 갇혀 있다. 여기서 가상과 현실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데카르트의 코키토는 '바깥'으로 나가는 통로이다.(인간존재를 의미하는 實存existence의 라틴어 existentia는 바깥으로ex 선다sisto는 뜻이다.그래서 이것은 가끔 脫存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이제 가상과 현실의 구분이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통로일 뿐이다. 우리는 데카르트의 코키토가 현실을 확실하게 담보할 수 없음을 보았다. 미래의 가상현실의 기술은 데카르트의 코키토에 근거한 나의 존재의 자명성 조차 분명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우리는 가끔 이런 망상에 빠져 드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끝없는 꿈에 빠져 있는지 모른다. 꿈속에 꿈을 꾸고,꿈속에서 꿈을 깬다. 그래서 꿈에서 깨어났는데 그 또한 꿈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진정한' 현실은 무엇이며 도대체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일까?  

동시구기하고 동시무애해서 계의 계기와 수준을 융통무애(融通無碍)할 때 현실을 가상과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모든 연(緣)이 끊기는 깨달음의 상태-마지막 꿈에서 깨어난 상태-일까?  우리는 앞서 퀘이커가 꾸고 있는 꿈이 하우저인지,하우저가 꾸고 있는 꿈이 퀘이커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이것은 아마 깨달음에 도달할 때 까지 답은 없을 것이다.

 

출전;조용현,"가상,가상현실,현실"(『오늘의 문예비평』,1997,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