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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철학

안의 의학과 밖의 의학/타다 토미오

 

'안'의 의학과 '밖'의 의학

                 몸을 보는 두가지 관점

  타다 토미오,『면역의 의미론』

 인간은 여러개의 관으로 이루어져 있다.그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관은 소화관이다.인간은 그 속에 소화관이라는 긴관을 가지고 있는 거대한 관이라고 볼 수 있다.소화관은 구강에서 항문까지 총길이가  8m이다.소화관은 해부학적으로도 몇 개씩 되는 기관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성의 관으로 인간존재의 가장 신체적인 기능을 맡고 있다.
 그런데 위(胃) 안이라든가 장(腸) 안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 몸안일까 아니면 몸바깥일까?해부학적으로 보아 위안이나 장안은 어디까지나 몸 바깥이다.사람은 피부와 감각기관을 통해 외계와 접할 뿐 아니라 소화관 내강의 점막을 통해서도 외계와 접하고 있다.사람이 거대한 관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소화관의 내면은 미세한 주름을 갖고 있기 때문에 표면적이 아주 넓다.외계와 접하고 있는 면적이 약 400 제곱미터로 계산된다.이 정도라면 테니스코트의 두 개의 면적에 해당한다.반면 피부의 총면적은 2제곱미터이고 외계와 접촉해 가스를 교환하는 폐는 80제곱미터정도이다.
 우리의 면역계는 자기(self)와 비자기(non-self)를 구분해서 비자기를 배제하는 시스템이다.그런데 자기와 비자기의 구분이 그렇게 분명한 것은 아니다.여기서 비자기를 자기로 착각하기도 하고 자기를 비자기로 착각하기도 한다.전자와 같은 착각이 일어나면 암세포가 창궐하게 된다.그러나 후자의 착각도 흔하며 사실 불치병의 대부분은 이러한 류의 것이다.예컨대 당뇨가 그렇고 류마치스성 관절염이 그렇다.심지어는 특정 음식에 대해서 면역계가 반응하는 경우도 있다.사실 따지고 보면 모든 음식은 바깥에서 들어오는 비자기인 이물질이 아닌가? 이러한 것이 알레르기성 질병으로 무시해버리면 좋을 것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함으로써 일어나는 병이다.
 이것은 어떤 경우에는 착오의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자기와 비자기의 구분에 엄격해야 하고 어떤 경우에는 관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이러한 미묘한 구분이 제대로 잘 작동하고 있는 것이 건강한 몸이다.보다 엄격해야 할 경우는 몸내부의 영역에서이다.거기로 들어오는 이물질은 대부분 해로운 비자기로 보아도 무방하다.혈관내는 이 원칙이 지켜진다.여기서는 자기를 나타내는 특별한 ID를 갖고 있지 않는한 비자기로 간주한다.혈관에 바로 놓는 주사가 급작스러운 쇼크사를 낳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로해서이다.반면 장의 경우는 음식을 비롯한 온갖 이물질들이 드나드는 곳이다.이곳에서는 자기와 비자기의 구분이 엄격해서는 안될 것이다.여기서는 말하자면 특별한 수배자 명단에 들어있지 않는한 자기로 간주한다.
 이러한 차이로 해서 혈관에 분포해 있는 항체와 소화계에 분포해 있는 항체는 서로 달라야 하는데 실제 다르다.가차없는 반응은 주로 면역글로블린 G와 M에 의해서 일어나고 보다 관용적인 면역반응은 A에 의해서 일어난다.이 A의 80%가 소화관에 분포되어 있다.이 A는 G나 M처럼 항원의 파괴,백혈구의 이동,염증 등 어느 작용도 가지고 있지 않다.염증도 일으키지 않고 파괴하지도 않는다.다만 분비액중에 다량 존재함으로 유해한 항원을 중화하고 세균이 지나치게 늘어나는 것을 억제할 뿐이다.A의 역할은 소화관내부에 늘 존재하는 세균등과 공존하기 위해 낮은 장벽을 쌓고 있을 뿐이다.
 서양의학은 '안'의 의학이다.그것은 주로 혈관을 통해서 치료하는데 이것은 몸의 안에 해당한다.이것이 서양의학의 주사이다.이것은 몸안으로 들어온 것을 바로 처치하는 직접적 방법이다.그러므로 그 효과도 훨씬 빠르다.그러나 이 모형에는 생물체의 수동성 또는 기계적 관점의 철학이 그 밑에 깔려 있다.농부에 의해 길들여진 재배식물은 스스로 잡초에 대해 생존을 강구하지 않는다.잡초를 뽑아줄 것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마찬가지로 안의 의학(서양의학)은 몸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강구할 수 없다고 할 때 나올 수 있는 발상이다.여기서 몸은 점점 기계를 닮아간다.
 동양의학은 '밖'의 의학이다.그것은 주로 위나 장을 통해서 치료하는데 그래서 주 치료법이 첩약이나 침술이다.이것은 몸안의 자율적 부분에 대해서 관계하지 않는다.그것은 몸바깥을 다스릴 뿐이다.이것의 철학적 기초는 몸의 능동성이다.궁극적으로 병을 해결해야할 것은 몸자신이다.치료는 그것을 간접적으로 도울 수 있을 뿐이다.안의 의학에서는 자기와 비자기가 칼같이 구분되어야 하지만 밖의 의학에서는 이 구분은 항상 일정한 것이 아니며 그것은 유동적이다.전자가 주로 혈관계를 중심으로 자기와 비자기를 나누는데 대해 후자는 소화계를 중심으로 자기와 비자기를 나누기 때문이다.동양의학은 예로부터 치료는 위를 다스리는 것이었다.이것의 의미를 면역학적 관점에서 재고찰해 보자.(이하 ,p.168-)
 음식 가운데 항체의 대부분은 혈액 가운데 있지 않다.그러면 식품중의 단백질 등은 완전히 소화되어 몸의 내부로 들어오지 않는 것일까?예를 들면 우유 1l를 마시면 이질물인 소의 알부민 단백질이 상당한 농도로 혈액안으로 들어온다.이것은 입을 통하지 않고 정맥주사로 직접 혈액안으로 들어오거나 했다면 틀림없이 아나필락시 쇼크를 일으킬 양이다.
 그러면 입을 통해서 들어온 항원은 무엇을 하는 것일까?쥐에게 달걀흰자에서 추출한 알부민을 1000분의1 mg정도의 적당한 조건으로 주입하면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면역글로불린 E항체가 생산된다.그러나 미리 달걀흰자의 알부민을 입으로 섭취하게 해두면 항체가 만들어지지 않는다.고작 몇 mg의 달걀흰자 알부민을 섭취하였을 뿐인데도 같은 알부민에 대해서 몸은 면역반응을 일으키지 않는다.이미 입으로 섭취한 뒤여서 쥐는 닭의 단백질을 이물질로 인식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이런 식으로 특정한 물질에 대해 특이적으로 면역반응을 일으키지 않게 되는 현상을 면역학에서 '관용'이라고 한다.
 소화관은 늘 흘러들어오는 외부세계의 이물을 배제하기 위한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대신 이물을 관용하기 위해 적극적인 작용을 하는 것 같다.엄청난 종류의 외계 이물이 소화관이라는 생명의 관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거부하지 않고 내부에 받아들여 그것과 공존하기 위한 메카니즘,그것이 '관용'이다.
 그러고 보면 소화관의 면역계는 '관으로서의 생명'의 존재양식에 관해 많은 점을 시사해주는 것같다. 생물은 기본적으로 관으로 살아가고 있다.관의 내부에는 외부세계가 교묘히 보존되고 있다.외계는 파괴되어서는 안된다.그러나 어디선가 경계를 만들어놓지 않으면 '자기'와 '비자기'를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관의 면역계는 생물이 외계와 공존하기 위한 훌륭한 지혜이다.
 
 결국 밖의 의학은 안과 밖의 유동적 균형을 어떻게 잘 맞추느냐가 몸의 건강의 핵심이라고 본다.그런 의미에서 병이 없다는 것 자체가 병이다.그것은 자연스럽지 못하기 때문이다.실제로 무균사육된 동물의 경우 면역계의 발달이 두드러지게 저해되고 면역글로불린 농도도 낮다.뿐만아니라 소화관의 해부학적 구조도 세균이 없으면 제대로 형성되지 않는다.무균사육된  동물의 경우 소화관의 벽의 점막층이 제대로 발달하지 않는다.바깥과의 관계를 통해서 내가 만들어지고 그 안과 밖의 유동적 균형속에 있을 때만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 동양철학의 심오한 통찰이고 그것이 우리 인체의 치료에 적용된 것이 한의학이다.
 결국 건강은 위와 장을 다스리는 것이고 그러므로 한의학은 궁극적으로 養生學이 된다.